2016년 12월 28일 (수) 가해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복음 묵상
요한 1서 1,5-2,2
마태오복음 2,13-18
오늘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입니다. 성탄절의 기쁨을 노래하는 8일축제 기간에 역설적인 어제의 분위기의 마찬가지로 교회는 어린이들의 죽음을 노래합니다. 그것도 2천 년 전에 헤로데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비참하게 죽인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2살 이하의 무죄한 사내아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늘 우리는 원망 섞인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왜 그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이 어린 아이들의 죽음인데 아직 채 피어나지도 않은 꽃봉오리를 거두어 가시는 듯한 모습 앞에 우리는 늘 원망 섞인 푸념을 하곤 합니다.
어쩌면 인정 있고, 연민의 생각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이 어린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통이 그들에게만 닥치는가!" 라고 하느님을 향하여 큰소릴 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아무리 큰소릴 치고 물어봐도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그야말로 "적막감" 그 자체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지치고, 지치다 못해 포기하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었다고 섣부른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하느님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의지를 담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재앙들은 우리 인간의 행동이 빚어낸 결과들인데도 아무 죄 없는 하느님께만 원망의 소리를 하였습니다.
고통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순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면,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치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으로 뛰어드신 하느님의 아들도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불안하게 느낀 인간이 결국에는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성서 저자는 예수님의 성장배경이나 공생활의 사건을 시시콜콜 전해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는 가장 강력한 인간(왕)의 잔악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구출되어 하느님의 보호로 자라나 백성을 구원한 인물이라는 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이들을 다 놓아두시고 예수님만을 구했는가에 대해 골몰할 필요도 없고, 한 명의 구세주를 위해서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원망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또는 무관심 속에서 죄 없이 학대 받고 버려지고 심지어는 생명을 빼앗기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히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낙태되고 있는 죄 없는 아기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은 그 책임이 하느님이 아니고 사람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탄시기 중 ‘무죄한 어린양’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처럼 살해된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지내면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도덕한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또 다른 헤로데가 되는 잘못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다른 요셉이 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드리건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 그리고 죄의 불감증으로 죽어가는 낙태아가 생겨나지 않도록, 다시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나 속상함을 달래기 위한 방패로 무죄한 우리 자녀들을 살해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첫댓글 다시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나 속상함을 달래기 위한 방패로 무죄한 우리 자녀들을 살해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