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세유 3 - 라마르세에즈를 생각하고는 항구에서 아인슈타인을 회상하다!
5월 23일 아침에 엑상 프로방스 Aix en Provence 에서 프랑스 국영철도 SNCF 가
파업중이라 기차편이 없으니 7시 50분에 철도에서 운영하는 Autocar 버스를
타고 40여분 만에 마르세유 생 샤를 Marseille Saint Charles 역에 도착합니다.
마르세유 하면 생각나는게 있으니 공병장교 "루제 드 릴" 이 작사 및 작곡했다는
프랑스의 국가인 "라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이니....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 일어나 왕정이 무느지자 자국에 까지 혁명의 불이 번질까
염려한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네델란드 및 러시아등이 반혁명 동맹을 결성합니다.
1792년 4월 독일등 동맹군 침공에 맞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루제 드 릴은 스트라스부르 숙소에서 하룻밤 사이에 가사와 멜로디를 썼다는데,
“일어서라 조국의 젊은이들, 영광의 날은 왔다.... 자아, 진군이다...” 라인강변으로
출정하는 용사들 심경을 그린 노래로 선율은 차이코프스키와 슈만의 가곡을 인용했다나요?
밝은 선율이 평범하고 호전적인 가사를 완전히 살리고 있어 곧 프랑스 도처에서
불리게 되었는데....... 정식 국가로서 채택된 것은 1879년의 일이니,
“라마르세예즈” 라는 노래 제목은 당시 전국에서 파리로 모여든 의용군 중에 이
도시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사람 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파리 까지 진군해 갑니다.
1792년 7월 파리에 입성한 이 도시 마르세유 의용군 대대는 8월에 튈르리
궁전을 습격 한 데서 “라 마르세예즈”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Allons enfants de la Patrie 나아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Le jour de gloire est arrive! 영광의 날이 도래하였도다!
Contre nous de la tyrannie 우리는 폭정에 대항하니,
L'etendard sanglant est leve 피묻은 깃발이 높이 올랐다.
Entendez-vous dans les campagnes 너희는 들리는가 저 전장속에서
mugir ces feroces soldats! 저들 흉포한 병사들이 고함치는 소리를!
Ils viennent jusque dans vos bras 그들은 너희들의 품 안에까지 다가와
egorger vos fils et vos compagnes! 안겨있는 너희의 아들과 아내의 목을 따려고 한다!
Aux armes, citoyens !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
Formez vos bataillons 너희들의 대대를 만들어라.
Marchons, marchons! 전진하자 또 전진하자 !
Qu'un sang impur 적들의 더러운 피가
Abreuve nos sillons! 우리들 밭고랑에 넘치게 하라 !
시내에 "법원 궁전" Palais de Justice 이라는 건물을 찾아가니 건물 앞에 연못이
있는데 어떤 부인이 엄청 큰 세퍼드 2마리를 데리고 나와 노는데 목줄을
풀어주니 그중에 한 녀석이 연못에 들어가 노는데... 주인이 그만 가자고 해도
물장구를 치고 노니 저녀석에게 물리면 죽을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는 조금 더 걸어서 생 빅토르 교회 를 찾아가는데 구글 어스에서도 찾기 어려웠던
건물이라 물어 물어 찾으니.... 포르투갈 코임브라 언덕 중간에 있는 구성당
Se Velha de Coimbra 처럼 "육중한 요새" 같은데 중세에는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일러나?
생 빅토르 사원 Basilique St. Victor 은 맷돌 사이에 끼는 형벌로 순교한 어부의
수호성인의 유골 을 안치한 교회라고 하는데 해적의 습격에 대비한 요새
구실도 했으며 지하성당에는 카타콩브가 있는데 AD 40년경 마르세유의
생트 마리 드 라메르에 상륙한 "성녀 막달라 마리아" 가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매년 2월 2일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기리는 의식이 축제 처럼 행해진다는데 오늘은 성당
입구가 폐쇄되어 안으로 들어갈수 없는데.... "막달라 마리아" Maria Magdalena
는 갈릴리 출신으로 "일곱 악령" 에 시달리다가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발에 3번이나 향유 를 바르며 회개하는등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가 바리새인의 집에 머물 때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바르며 눈물로 회개할새
예수님이 구원하니 마리아의 영혼 은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되는데....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와 요한 및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부활한 예수" 를 처음으로 만났다고 합니다.
예수의 여제자이자 후일 성녀가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승천후에 핍박을 피해 마르타,
라자로와 함께 마르세유 에 이르러 프로방스 지방의 동굴에서 30년간
참회의 고행을 행하였으며죽은후 천사에 의해 중천 높이 올려졌으니
“막달라의 마리아 승천” 이라는 그림이 나폴리의 카포디 몬테 미술관에 있습니다.
성유물인 막달라 마리아 의 신체 일부는 서기 860년에 비엔 백작 제라르 드 루시용이
프로방스로 부터 프랑스 동부 베즐레로 옮겨 라 마들렌 성당 을 건축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발끝 까지 닿는 머리를 갖고 향유병을 들고있는 모습으로 나타내 집니다.
1,190년 7월 영국왕 리차드와 프랑스왕 필리프가 회합해 제3차 십자군전쟁 출정식
을 한 곳이 베즐레 이고 그전에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 전쟁
출정식을 한 도시도 베즐레 이니..... 하고 많은 도시 중에 프랑스
동부 외진 마을을 택한 이유는 바로 저 "막달라 마리아" 에게 의지함이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성배론자들이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댄 브라운은
다빈치코드 라는 책에서 그녀는 “성배” 그 자체로 예수님의 부인이었으며....
그의 자손들이 프랑스의 메로빙거 왕조를 이었다는 이야기 까지 쓰고 있으나
아무리 소설이래도 역사적으로나 성서적으로도 너무 오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1년부터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교회
에 그린 “최후의 만찬” 벽화를 보면.... 테이블 중앙에 붉은 옷에 푸른
겉옷을 걸친 예수님 바로 옆에 같은 모양의 푸른 옷에 붉은 겉옷을
걸치고 “V" 자 형태로 앉아 있는 제자 요한(?) 은 내 눈에도 가녀린 여자 라!!!
마르세유 미술관에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1606년에 그린 “황홀경의 막달라 마리아”
는 매춘부를 모델로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니 아마도
4세기경 부터 교회 교부들이 그녀를 요한전 8장 1절 이하 “간음의 여자”
와 “죄의 여인” 에 부활한 라자로의 자매인 마리아와 동일시한 영향 일까요?
여기 언덕에서 바라보니 왼쪽으로 생 니콜라 요새 Fort St. Nicolas 가 보이고 그 옆에
바다쪽으로는 파로 공원 Jardin du Pharo 과 파로 궁전 Palais du Pharo 이
보이는데... 저기 까지야 갈수 없으니 눈으로만 보고는 다시 항구쪽으로 내려옵니다.
마스트들이 숲을 이룬 수많은 요트와 보트에 유람선 및 어선이 정박해 있는 옛 항구
Vieux Port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는데....
마르세유 항구에서 학생들을 보니 일본 초등학생들과 어울린 아인슈타인 이 떠오릅니다.
아인슈타인 부부는 1922년 10월 8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수에즈운하와 인도양
그리고 말래카 해협을 돌아 북상해서는 세토나이카이를 지나 11월 17일 일본
고베에 도착해 일본 전국을 다니며 강연하고는 43일 만인 12월 29일 일본을 떠납니다.
아인슈타인은 규슈의 모지코 門司港(문사항) 시를 방문해서는 옛 건물이 늘어선 레트로
レトロ 지구의 미쓰이 쿠라부 俱樂部(구락부) 에서 묵었다고 하는데.... 일본 어린이
들의 합창 에 즐거워져 흥이 난 아인슈타인은 즉석에서 바이얼린 연주 를 했다고 하네요?
일본에 도착하기전 배에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수상소식 을 들었지만 일본 전국 강연을
마치느라 노르웨이 오슬로 수상식에 참가하지는 못했다는데, 일본은 흥분의 도가니
로 달아올랐으며... 소년들은 꿈을 키웠으니 훗날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가와 히데키 등이니 프린스턴으로 찾아가 아인슈타인을 직접 만났다던가요?
문학평론가 전북대 왕은철 교수는 신문에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에서 아인슈타인에
대해 “오리엔탈리스트” 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아인슈타인은 이처럼 어린이를
좋아하고 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인격자인지라... 칼럼 내용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명성이 위기를 맞고있다. 1922년 10월 부터 1923년 3월 까지 중동과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쓴 일기 때문이다. 중국에 관한 부분이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중국인들이 모든 인종을 밀어내게 될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들은 사람이라기 보다 자동 인형 같다. ’‘중국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남자들을 사로잡을
치명적인 매력이 여자들에게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폭력적인 시선으로 동양인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스트 즉 인식의 전체주의자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유
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권과 사회정의를 부르짖은 사람이었다.
1933년, 미국 시민이 된 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나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미국 흑인들이 차별의 희생자로서 어떻게
느끼는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북부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프린스턴에 살면서 흑인들과 어울리며 인권운동에 적극 관여했다.”
“‘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 를 가진 알토 메리언 앤더슨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호텔에서 쫓겨나자, 자신의 집에 머물게 배려한 사람도 그였다. 인종주의가
‘백인들의 병’이라며 백인들을 몰아쳤다. 그래서 미국 연방수사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
“이렇게 상반된 것의 공존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우리는 그를 지나치게
이상화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를 변호하자면, 그 일기는 인종주의가
미국과 독일을 광기로 몰아넣기 훨씬 전인 1920년대 초반에 쓰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편견을 극복하듯이 그도 자신이 갖고 있던‘백인의 병’ 을 극복했던게
아닐까. 그러한 ‘변화’ 의 측면에서 그의 일기를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그것이 주는 상처와 모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
첫댓글 밥을 이기는 충견(忠犬)도 드물고,
돈을 이기는 충신(忠臣)도 드물다.
지금 이 시각을 중요시하라~!!!
한치의 앞도 못 보는게 인간(人間) 삶이라.
즐길수 있을 때 즐겨라.
아름다운 人生은 바로 지금부터~
마음편안한 하루길 되세요.
옳은 말인가 합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도
여느 사람처럼 두 얼굴이라.....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