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 가던 길 그대로 들어서니 군데군데 보이던 신록 속 꽃나무가 이젠 낙엽송이 되어 단풍색을 띤다
사개월 동안 나름의 잡다한 일들 속에 너나 없이 훌쩍 지나는 사이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정미언니와 나,거제에 간다
사등 우리집에 먼저 내려 군불 때놓고 움직이려는 계획이라 마음이 분주해진다
중간 휴게소에서 내다본 남해바다가 11월의 빛깔로 하늘과 어우러져 펼쳐지는데 휴게소 건물 바로 앞까지 컨테니어 박스를 실은 거대한 선박이 제법 속도를 내며 지나가는데 이렇게 큰화물선을 십여미터 앞에서 속도감을 느끼는 경우는 처음이라 새삼스레 바다의 공간감을 느끼는 오후의 생동감 속에 서서 바라본다
덩치 큰 물체의 움직임이 위압감없이 느낄 수있음은 바다 위라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건물에만 들어서도 그 고층의 물체가 주는 압박감을 느끼며 위축되는 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런지 어떤 ‘유체역학의 미’라면 어떨까 이름붙여본다
막힘없이 도착한 사등집,골목집이라 차가 들어갈 수없어 사등성벽에 주차를 하고 짐을 챙겨 들어가는데 이웃집들을 새로 지으며 예전 돌담을 시맨트블록으로 채우고 남은 우리집측 돌담엔 그 시간만큼 이끼 낀 듯 녹슨 듯 얽혀든 담쟁이 넝쿨의 마른 가지가 아직 매달려 있다
돌이여, 영원한 덩어리여
그 존재 전부가 침묵의 시간을 감당하고도 끝내 그대로 갈 무생물의 존재감을 지닌 것
다자이 오사무가 이런 말을 했다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쓸쓸함을 견디는 일입니다
-예술이란 무엇입니까?
-제비꽃입니다
-시시하네요
-시시한 겁니다
-예술가란 무엇입니까?
-돼지코입니다
-그건 너무한데요
-코는,제비꽃내음을 알고 있습니다
돌담을 보며 느낀 심정을 ‘사양’과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생각과 일치됨을 떠올리며
한평남짓한 마루에 올라서며 방문을 열자 오래된 집의 고인 냄새가 은근히 콧속으로 들어온다
바지부터 갈아입고 오년전 방치되던 집을 일부 고치며 고집스레 남겨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거의 백년을 육박하는 이 아궁이에 불꽃의 열기가 안으로 들어가며 구들의 골을 따라 열기가 돌 것이고 두 시간쯤지나면 방바닥에 뜨끈한 기운이 퍼질 것이다
이 아궁이를 살리려드니 온수보일러도 저쪽방만 하긴 너무 작아 전기판넬로 깔고 겨우 건진 이 구들장 깐 방바닥엔 금이 가 연기가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데 눈이 맵고 그으름이 방 곳곳에 매달리건만 그래도 나무가 타면서 내는 열기가 돌바닥을 데워 돌아오는 온기는 단순한 열기이상의 아늑함을 주는 것이다
적당히 불을 넣는다 해도 결국 장판은 타들어 거뭇거뭇한 눌린 자국위에 두툼한 이불깔고 누워 있자면 그렇게 개운하고 솜으로 푹쌓인 느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음이 설명할 수 없지만 몸이 느끼는 안온함의 절정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또한 더할 수없이 아늑함을 주는 것이고 거슬러가보면 아버지 엄마에게로 닿는 혈육의 연원을 떠올린다
집 앞뒤로 심어둔 채소들에선 가을의 결실을 향해 뿌리를 굳히는 중이고 이미 수확한 콩대는 축담에 세워져 말라가는 중이다
아랫채 벽에는 이미 수확한 채소의 씨앗이 거물망에 담겨져 내년 파종을 향해 바람을 맞으며 조롱조롱 매달려있다
촌 농가의 장면 중에 제일이 씨앗담긴 주머니 매달린 뒷곁 처마밑 풍경이지 싶다
농기구는 모두 창고에 들어가 갈무리가 되는데 씨앗은 꼭 바깥에 두니 말이다
삼십센치 길이의 나무 토막 열 댓개는 순조롭게 타 들어가며 잉걸불에서 잦아들기까지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린다
시옷자로 쌓아올린 채 타오른 바알간 숯뭉치가 타닥 탁 소리내며 무더기덩치에서 떨어져 내리며 바스라지며 불티가 날린다
눈물이 좀 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무타는 데서 나오는 먼지는 그렇게 싫지가 않은게 또 불멍을 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한무더기 국화꽃 다발이 있는 화단가를 들러보는 언니도 주변에 스며드는 한가함을 느끼는 눈친데,사이 치헌에게서 온 전화
거제면에서 기다린다는,저녘만남을 이야기하는 데 나는 장작불이 다 이지러져야 나갈 수있다하니 아궁이 속에 있는 불길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함양출신 치헌의 말이 못미더워 약속시간을 이십분 늦추고 연기가 자욱하게 맴도는 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니 다소 넓다싶은 나즈막한 집주위로 천천히 어두워져 가는 시골의 정취가 감돈다
잠시지만 눈을 감는다
콧속을 채우는 연기와 낙엽의 냄새가 머리를 한바퀴 헤집으며 돌고나와 눈앞이 개운해짐을 알 수있다
저문 바다를 옆에 끼고 가니 민석씨 치헌이 나와 있다
그리고 식당앞에 차를 대니 건복아저씨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그렇게 마주앉아 피우는 숯불에 얼굴이 바알갛게 피어나는 데 상원이 눈가주름을 잡으며 들어온다
양념갈비가 달콤한 냄새를 피우며 굽혀져 빠르게 입속으로 들어가고 이어 언니가 빚은 연잎주를 따서 돌리자 은은한 향이 좌악 깔리며 목을 타고 내려가자 눈앞이 아찔한데
다들 그 맛에 감탄한다
우리 환갑이라고 언니가 담근 지 육개월된 술을 포장까지 해서 맛 변하지 않게 아이스박스에 갈무리해서 가져온 가양주다
우정어린 나눔이 주는 푸근함에 그 정감이 더해져 뇌가 뜨겁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자기몫의 술병을 품에 끼고 나와 찻집으로 옮기는 데 건너편 산등성이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조명이 보인다
거기 가보자해서 차 타고 오른다
휑하니 크기만 큰 건물의 커피집은 주중이라 그런지 시간이 늦어서인지 거의 비었고 불빛으로 밝힌 공간에 사람의 체온이 없으니 퀭한 느낌 이상의 감정이 돌지않는, 인조석만 가득한 밤의 한 곳이 주는 쓸쓸함이 다인 공간이다
건물을 나오며 건복아저씨와 나란히 걸으며 내가 한 말,오늘 생각나는 독일작가 한스 애리히 노삭의 책 ‘늦어도 십일월에는”한 구절을 말하니 끄덕끄덕 하는 아저씨의 공감의 몸짓이 적당했다
포개앉아 각자의 집앞에서 내리고 우리집 따뜻한 아랫목 생각이 나서 얼른 들어가고 싶어 서두른다
나가기 전 켜둔 마루의 희미한 전등불빛이 간신히 어둠을 밝히는 게 또한 십일월의 밤을 적절히 꾸며주는 듯하다
이불 두껍게 깔고 잠자리에 들자 얼마 안있어 언니의 낮게 코고는 소리에 늘 혼자 잠드는 내 일신의 조건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바닥의 온기가 적당해서 인지 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세시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없이 내라는 빗줄기가 시멘트마당에 떨어지는 소리와 텃밭에 내리는 소리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 다르게 들리고 섞여 가만가만 잠을 불러들인다
비 그치고 습기도 걷힌 아침,언니는 통영시에서 하는 귀어프로그램에 강의를 맡아 나가야하기에 아침밥을 준비한다
먹을거래봤자 햇반과 곰탕 마늘장아찌 버섯볶음 무우조림 김,이렇게
다 포장된 거지만 곰탕에 넣을 파는 텃밭에서 세뿌리 뽑자니 흰뿌리가 파란대로 올라오는 부분이 톡 꾾긴다
땅심이 내 팔힘을 이긴 것이다
식물일지라도 존재의 힘은 외부의 힘을 능가하는구나 싶었다
하물며 사람임에랴,떠난지 오십년이 지나 다시 돌아와 살아도 이물감없이 적응하는 걸 보면
뿌리의 끈질김은 심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두가지 모두에 적용되는 본능이지 싶다
이백그램짜리 햇반을 데워 둘이 나눠먹고 두드리듯 화장바르고 준비한 자료챙겨서 강의 나가는 언니를 차까지 배웅하자니 운전석문을 열더니 다시 돌아와 맞은편에 선 나와 눈을 맟추고 “마치고 오면서 꿀빵 사오까?”
순간 울컥하는데 이는 엄마가 일나가며 떨어지기 싫어 우는 아이 어르는 듯한데서,오는 정감의 표현으로 여겨져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어디 나갈 때 늙은 엄마한테 들어올 때 뭐 사올까?묻는게 대부분인 생활상이었는데 그 반대의 상황이 주는 회귀의 감정이 작용했지싶다
습기가 말라가는 오전을 구름 속에 간간히 비치는 햇살아래서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 까무룩히 가수면 상태에 들었던가보다
한 오분쯤 길게 느껴지는 아득한 시간을 보내고 온기가 그대로인 방바닥에 다시 누워 잠을 자 볼까하고 눕자마자 세상소식에 저절로 반응하듯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주식시장 체크하고 메일확인하고 팟캐스트내려받고 유튜브검색하고 뻔한 시간을 보내고 잠은 커녕 머릿속은 분주히 돌아간다
쉬려고 떠났건만 계속되는 생활인의 양태에 우리가 매인 시간속의 개체임에 저절로 실행하는 존재임을 실감한다
그러는 사이 생각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책 속 구절”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그 사람이 고독하지 않다는 증거다”
무리 속에서 생활인의 역할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된 시간 속에서도 어떤 관계의 속으로 들어가길 주저없이 택하고 거기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데 책읽는게 어디 쉽게 들어갈 수있냔말이지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다 페퍼민트 차한잔을 우려 마신다
천정이 낮은 방안, 온기가 전해지는 방바닥에 애매하게 앉아 마주하는 십일월의 한가운데 정오의 시간 속으로 훌쩍 들어서 있다
그러던 중 가뿐한 발걸음으로 들어선 언니,두시간의 일반인 대상 강의 정도야 뭐 하는 박사이력이 주는 느슨함을 보인다
우리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한번 둘러보려 마을 뒷길을 걷는데 일부는 복원을 하고 허물어진 채 그대로인 북쪽 출입문성벽에 올라서니 도꼬마리풀씨가 달라붙어 바지 속을 뚫고 들어와 간지럽힌다
성벽에서 대충 본 인상은 생각보다 규모가 큰 성안의 동네를 굽어보았고
풀씨 뜯어내는 데 한참 걸린다
언니는 다정다감한데다 품이 넓고 나눔의 인정 또한 있어서 맛있는 걸 먹는다든가 신기한 장면을 본다든가하면 꼭 데려가 체험해주는 걸 즐기는 데
성포해변가에 전망좋은 커피집이 tv에 나와 더 유명해졌다면 거기 가자한다
유명세타는 걸 못마땅해하는 나지만 그 자리에 앉아보니 그럴만하다는 정도의 표시를 하자
활기넘치는 언니왈’ “미숙아 ,니만 그렇지 다들 좋아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몰리는 거잖아”
내 말” 이정도의 풍경이 아쉬워서 저런 인공물을 세우고 전망을 가로막으며 해안선을 건드리는 시도자체가 군데군데 이뤄지니,그대로 둔 채 최소한의 시설만 해서 그저 다가가기 쉽고 시설 많이 하지않는, 그대로 유지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행정이든 소비시설이든 하지는 거지
건물과 시설은 사유재산이지만 넓혀보면 공공재의 기능이 많은 분야니까,더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어’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입에 단 케익과 커피를 이만원넘게 주고 그 장소를 흡족해하면서 나와
거제면에 위치한 식물원에 국화구경을 간다
축제기간은 지났으나 화분에 심겨진 꽃무더기가 그대로 있어 들어서자 국화향이 은은히 풍긴다
제법 넗은 부지에 갖가지모양,색의 국화가 놓여진 자리마다 벌들이 잉잉대며 가만히 꽃술에 앉았다 천천히 다음꽃으로 날아오른다
오백미터쯤 돌며 가을 향기 듬뿍 취하게 맡고 여러색깔이지만 국화라는 꽃이 주는 푸근함에 눈이 피로하지않은 구경을 하곤 집으로 향한다
어두워지기 직전의 잠시 환해지는 다섯시 못미친 네시 사십분쯤 이차선 도로에 오른 차 속에선 말소리도 낮아진다
그렇게 거가대교에 진입하는 데 네비에선 부산시에 진입하셨습니다,라는 안내음이 나오자
문득 귀환의 안정감이 겹쳐든다
내가 사는 곳이 주는 뿌리깊은 이끌림이다
더불어 드는 생각
늦어도 십일월에는 무엇이든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