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의 나이에도 포즈를 취하는 모습에선 복서 유제두가 살아 있는 듯 하다.(사진=헤럴드스포츠 조석연 PD) |
1975년 6월 7일. 일본 남부의 해안도시 기타규슈의 고쿠라 실내체육관에서는 WBA(세계복싱기구)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와지마 고이치와 도전자 유제두의 세계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경기는 예상과 달리 유제두가 일방적으로 이끌어갔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검정색 팬츠를 입은 유제두는 변칙 복서 와지마 고이치를 상대로 소나기 펀치를 날리며 상대를 조금씩 무너뜨렸다. 마침내 7회 2분4초 만에 통쾌한 KO승을 거둔 유제두.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초의 외국 원정 KO승이자 WBA 주니어미들급의 김기수, WBA 밴텀급의 홍수환에 이은 3번째 세계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월 어느 날,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유제두체육관에서 왕년의 세계 챔피언을 만났다. 2명의 트레이너를 두고 있었지만,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관원들을 가르치며 체육관을 떠나지 않는 유제두 선생을 만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복서 일대기를 직접 들었다.
#1. 사기로 시작한 복싱 입문기
체육관이 꽤 오래됐네요. 언제 이곳에 자리를 잡으신 건가요?
“1983년에 문을 열었으니 벌써 30년이 넘었어요.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체육관일 겁니다. 보기엔 허름해도 여기서 세계챔피언, 동양챔피언이 탄생했어요. 제 인생이 묻어있는 곳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수생활부터 은퇴 후 지금까지 복싱을 떠나지 않으셨네요.
“권투에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1965년에 상경해서 지금까지 권투와 인연을 맺었으니까요. 고3 때 복싱을 배워서 1971년 동양챔피언이 됐고, 1975년 세계챔피언이 된 후 1979년 더 이상 상대할 선수가 없어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 권투보다 더 잘할 게 없다는 생각에 체육관을 열고 지금까지 오게 됐는데, 요즘엔 체육관 운영하기가 힘들어요. 오래전부터 권투가 침체됐고, 요즘 부모들은 매 맞는 운동 안 시키잖아요. 한 명 아니면 둘을 둔 집이 대부분인데, 아이들이 축구나 야구하는 걸 좋아하지 글러브 끼고 치고 받는 건 안 좋아하니까요. 어쩔 수 없이 권투체육관이 다이어트를 위한 체육관도 겸하게 됐습니다. 체육관을 운영하면서도 마음이 편치는 않아요.”
체육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알까요?
“어린애들은 모르죠. 나이 먹은 아빠 세대라면 몰라도. 체육관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대충 뭐하는 사람이었구나 싶긴 할 겁니다. 어린 학생들은 무하마드 알리가 누군지도 몰라요. 알리랑 찍은 사진이 저기 걸려있는데, 누구냐고 묻는 학생들이 많았으니까요.”
1970년대 대전료는 얼마 정도였나요?
“4라운드에 40만 원이었어요.”
그 당시 40만 원이면 무척 많은 돈이었네요.
“그렇죠. 1라운드 당 10만 원씩 받은 셈이니까요. 세계타이틀매치는 15라운드였고, 파이터의 인기가 있고 없고에 따라 대전료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처음에 복싱을 접한 계기가 특이하시더라고요.
“전남 고흥이 제 고향인데, 크게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지만, 4형제가 먹고 살만한 그런 집이었습니다. 1965년 고흥농고 3학년 학기말 고사를 치른 어느 날이었어요. 여수에서 온 복싱 사범이 학교에서 시범을 보이더라고요. 원래 태권도를 했기 때문에 복싱에도 관심이 있었죠. 복싱 사범을 따라 글러브를 끼고 스텝을 밟으며 복싱을 배웠더니 그 사범이 제게 소질이 있어 보인다며 같이 여수에 가서 복싱을 정식으로 배워보자고 권유하더라고요.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난리가 날 것 같아서 아버지랑 친한 쌀가게 아저씨를 찾아가 쌀 한 가마니 값인 2800원을 빌려 따라나섰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오직 복싱에 꽂혀서 나선 길이다보니 모든 걸 사범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쌀가게 아저씨한테 빌린 돈은 사범에게 맡기고, 전 사범의 소개로 중국집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복싱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처음에는 중국집 문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다가 나중에는 주방 보조일을 맡아서 보름 정도 일을 했어요. 거기서 열심히 일 하면 사범이 소개해준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집 일이 워낙 바쁘다보니 체육관에 갈 시간이 되지 않았어요. 운동은 못하고, 몸은 고되고, 내가 왜 여수에 왔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밤 11시에 청소를 마쳤는데, 직원 한 명이 씻어 놓은 가마솥을 옮겨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 솥을 들고 걸어가다가 그만 솥을 놓치고 만 거예요. 다음날 중국집 사장이 깨진 솥을 보고 난리가 났었죠. 저한테 당장 나가라며 화를 냈는데, 전 나가고 싶어도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일한 거 달라고 했더니, 가마솥 깨트린 걸 생각하면 오히려 제가 더 돈을 내야 한다고 소리를 치더라고요. 결국엔 빈손으로 중국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관원들을 가르치려면 끊임 없이 운동을 해야 한다. 샌드백을 두들기며 시범을 보이고 있는 유제두 관장.(사진=헤럴드스포츠 조석연 PD) |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나요?
“절 여수로 이끈 사범은 이미 고흥으로 돌아간 뒤였어요. 중국집 종업원에게 고흥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보니까 200리(78.5km)정도 된다고 해요. 운동 삼아 뛰어갈 요량으로 무작정 달려갔습니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쉼 없이 달리다보니 몸은 지쳤고, 더 이상 걸어갈 힘도 나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차를 세우려 했지만, 한 대도 서지 않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트럭이 오는 걸 보고 길 한 가운데 섰습니다. 날 치고 가든가 아니면 차를 세우든가, 알아서 하라는 행동이었죠. 트럭 운전사에게 욕만 실컷 얻어먹은 후에 그 차를 얻어 탈 수 있었습니다.”
그 복싱 사범이 정말 원망스러웠겠네요. 고흥으로 돌아가서 그 사람을 찾았습니까?
“어디 있는 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2800원이면 큰 돈인데, 그걸 챙겨서 도망갔으니…. 사기꾼에게 된통 당한 셈이었죠.”
그래도 복싱과 인연을 맺게 해준 ‘은인’이기도 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셈이죠. 학교에서 복싱 시범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제가 복싱과 인연을 맺기 어려웠을 겁니다.”
#2. 고물상 일을 도우며 복싱을 배우다
1966년 6월 상경하셨던데, 이때도 복싱을 배우기 위해서였나요?
“초등학교 친구가 서울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 친구 주소만 들고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서울역에 내려서 주소만 들고 집을 찾아갔더니 그 친구는 마포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더라고요. 권투만 배울 수 있다면 친구 일을 돕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물을 줍고, 그걸 팔아서 번 돈으로 체육관 회비를 모았습니다. 마포 굴다리 옆에 있던 제일체육관에 등록했는데 당시 회비가 300원이었죠. 보름 정도 스텝을 배우니까 관장이 스파링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복싱에 소질이 있어 보였는지, 그 체육관 관장이 세계챔피언 김기수 씨를 배출해낸 삼청동 골든 올림피아 체육관의 리차드 바비 씨에게 절 소개시켜 줍디다. 리차드 바비 씨는 세계 챔피언을 배출해낸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박종규(대통령 경호실장) 씨가 삼청동에 체육관을 마련해줬다고 하더라고요. 그 체육관에 들어가면서부터 고물 줍거나 구두닦이 등을 하지 않고 오로지 복싱만 하면서 생활했어요.”
그럼 리차드 바비 씨와 운동하면서 프로에 데뷔한 건가요?
“아니에요. 그 체육관은 1년 후에 문을 닫았고, 다시 마포 제일체육관으로 옮겨 갔어요. 1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 덕분에 전국체전에서 은메달도 따고 멕시코올림픽 선발전에도 나가고, 그러다보니까 관장님(이영환 관장)이 프로에 도전해 보자고 권유하시더라고요. 그 후로 ‘유제두’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로 데뷔 후 6전승의 전적을 쌓으며 잘 나가다 체중 조절 문제로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69년 웰터급 최강자 임명보 선수와의 경기에서 ‘사건’이 터졌었죠?
“프로 데뷔 후 10라운드 시합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랭킹도 임명보 선배가 1위이고, 전 5위였어요. 실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죠. 10라운드 시합을 앞두고 무식하게 체중을 빼는 바람에 정작 경기 당일, 힘이 없어서 도저히 시합을 못하겠더라고요. 이영환 관장에게 날도 덥고, 힘이 빠져서 시합을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경기에 나가지 않으면 제재가 있을 수 있으니까 1라운드만 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1라운드를 뛰었죠. 이번에는 2라운드만 더 버티라고 하셔서 2라운드를 뛰고…, 그렇게 7라운드까지 나섰다가 ‘이제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링에서 내려갔습니다. 경기를 더 지속했다가는 링 위에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경기에 임했는데, 거기까지였던 거죠. 그 후로 개런티를 빼앗기고 6개월가량 자격정지를 당했어요. 이 경기가 체급을 올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후론 미들급에서 뛰었으니까요.”
#3. 군 입대 후 복싱을 계속하려고 사령관에게 편지를 쓰기도
이안사노 선수와 한국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을 3일 앞두고 군에 입대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경기 3일 전에 군에 입대했다면 정말 힘든 상황이 됐겠어요.
“그 일로 광주 병무청장을 찾아갔어요. 3일만 있다가 입대하면 안 되겠느냐고, 다른 일도 아닌 한국 챔피언전인데, 좀 사정을 봐 줄 수 없느냐며 빌었어요. 안 된다고 합디다. 그건 봐줄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면서. 처음에는 하사관 학교로 차출이 됐다가 서울 필동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스카우트가 됐어요. 그때 수경사 사령관인 윤필용 장관에게 ‘겁 없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군대 안에서 권투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제 간절함이 통했는지 윤 장관께서 을지로 3가 쪽에 있는 체육관에서 휸련할 수 있게 배려해줬어요.”
세계주니어미들급 챔피언 와지마 고이치와의 타이틀매치 조인식 장면.(사진=유제두 제공) |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네요. 당시의 복싱 열기와 관심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죠. 그때는 권투 좀 잘하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시대였으니까요. 윤필용 장관이 복싱을 아주 좋아했어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허버트 강까지 스카우트해서 절 스파링 파트너로 묶어 주실 정도였어요. 멕시코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장규철 선배도 입대 후 우리와 같이 훈련했습니다. 그때 운동을 계속하지 못했더라면 한국챔피언은 물론 동양챔피언에도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유제두는 이후 이안사노와 맞붙어 1회 KO승을 거두고 한국 미들급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다음 도전은 동양(OPBF) 미들급 챔피언 자리였다. 상대는 일본의 캐시어스 나이토. 1971년 8월, 왼손잡이 혼혈 흑인 복서를 상대로 접전을 펼친 끝에 6회 KO승을 거두고 동양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유제두는 동양 미들급에서 21차례의 방어전을 치렀다. 상대는 주로 일본 선수들이었고, 타이틀을 빼앗긴 캐시어스 나이토는 이후 2차례 더 도전에 나섰지만, 번번이 패했다. 나이토와의 인연은 나이토의 아들한테까지 이어졌다. 캐시어스 나이토는 몇 년 전 아마 복싱 선수인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유제두 체육관을 직접 찾았다고 한다. 왼손잡이를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을 아들에게 배우게 해주려 함이었다. 유제두는 1978년 12월17일, 후배 강흥원을 판정으로 꺾고 21차례의 방어전을 치른 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이유는 더 이상 싸울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 세계챔피언의 명암, 인기와 몰락
이제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렀던 와지마 고이치 선수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와지마와의 타이틀매치는 당초 팽팽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일방적으로 경기를 압도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와지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셨던 건가요?
“복싱 선수의 꿈은 딱 하나입니다.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신념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기 영상을 구해 와지마 선수의 특징을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움직임이 많고 까다로운 선수라 잡기가 힘들 것 같았어요. 그런데 경기 중에 제가 날린 펀치에 한 대 맞더니 다운되었고, 다시 일어섰지만, 이미 눈동자가 풀려 있더군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에 소나기 펀치를 날렸습니다. 마치 샌드백을 치듯 와지마의 턱과 몸통에 좌우 훅에 이은 스트레이트를 작렬시킨 바람에 이후 두 차례 더 다운이 됐고, 결국 세계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와지마 고이치와의 세계타이트매치 경기 영상>
세계 챔피언에 오른 소감이 어떠했나요?
“말해 뭐하겠습니까.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기뻤죠. 세계챔피언에 오르고 청와대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전 챔피언이었던 김기수, 홍수환 선수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격려금을, 육영수 여사로부터는 땅을 선물 받았습니다. 김기수 선배한테는 100만 원과 신설동에 500평의 땅을, 홍수환한테는 200만 원과 여의도에 500평의 땅이 주어졌습니다. 제가 챔피언이 됐을 때는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신 이후라 그런 혜택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주신 3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구자춘 서울시장이 절 불러선 은퇴 후 체육관 차리라며 서울 강남 영동의 체비지 500평을 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짧은 생각에 호박밭인 영동보다는 연희동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연희동에 땅을 달라고 부탁드렸죠. 땅도 김기수, 홍수환과는 달리 사유지 가격으로 제 돈 주고 제가 구입한 겁니다. 그때 영동에 500평을 사두기만 했어도…. 후회하면 뭐 하겠습니까. 당시엔 부동산 지식이 없었으니까 영동 대신 연희동에 체육관을 차렸던 것이죠. 그 후 이곳 독산동으로 옮긴 것이고요. 육영수 여사 서거 후 박근혜 대통령이 영부인 역할을 맡았었고, 청와대에서 격려금을 받았을 당시의 인연과 고마움을 잊지 못해 대통령 선거 때 열심히 도와드렸습니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었죠. 전라도 출신이 배신했다고. 전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의 선거를 도왔던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300만 원 중 100만 원은 방위성금으로, 100만 원은 불우이웃돕기성금으로 내고, 나머지 100만 원으로 매니저, 트레이너와 각각 30만 원씩 나누고 10만 원은 회식 비용으로 지출했다고 한다. 유제두는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인터뷰에서 ‘수경사 윤필용 장군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당시 윤필용 장군은 구데타 모의 혐의로 감옥에 있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이었지만 유제두는 ‘계산’하지 않았다.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은 은인에게 눈치 보느라 고맙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운동선수가 아니라고 말했다. 은퇴 후에도 윤필용 장관과 유제두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윤 장관이 돌아가셨을 때 빈소를 찾은 복싱인은 유제두가 유일했다고 한다.)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선수 유제두의 모습.(사진=유제두 제공) |
고 김대중 대통령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지 않으셨나요?
“고향 선배 중 한 분이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당시엔 대통령이 아니셨죠. 야당의 유명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말하기를, 호남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니, 네가 인사드리면 정말 좋을 것 같다며 저를 동교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세계챔피언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그 후 명절 때마다 그 선배와 함께 동교동을 방문했습니다. 세계챔피언이 된 후에도 동교동 방문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발목을 잡혔다는 건가요?
“권투계의 한 인사가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에게 저에 대해 오해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고 합디다. 동교동 쪽이랑 친분이 깊다고. 그 후 와지마 고이치를 상대로 2차 방어전을 치를 때 이른바 ‘딸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계체량을 마치고 김덕팔 트레이너가 제게 딸기를 건넸고, 귀한 딸기를 혼자만 먹었었죠. 트레이너에게 같이 먹자고 권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딸기를 먹은 후부터 몸이 이상해졌습니다. 자꾸 눕고 싶고, 힘도 안 나고. 다음날 경기 내내 손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15라운드 KO패를 당했습니다. 최악의 졸전이었죠. 경기 후 ‘유제두 약물복용설’이 엄청난 이슈가 됐습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딸기 외에는 이유될 게 없었습니다. 딸기에 뭔가 들어간 게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끝내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야 그 사건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정보기관에 근무하던 한 복싱 후배가 정치권에서 제가 DJ와 친분이 있는 걸 막으려고 작업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얼마 안가 정보기관 사람들에 의해 ‘남산’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 그 복싱 후배가 있더군요. 그 후배는 제게 ‘형님, 그것은 다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라며 사과를 했어요. 베일에 쌓인 ‘진실’을 알 수 있었어요. 후배의 ‘아니다’란 말이 반대로 전달됐으니까요. 다시 챔피언에 도전해서 그때 받은 오명을 벗고 싶었습니다. 다시 세계챔피언에 올라 와지마전에서 벌어진 상황이 실력 부족 때문에 진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 했지만, 시합이 잡히질 않았어요. 결국 동양타이틀매치에 만족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던 겁니다.”
(유제두는 당시 돈 매수설에도 휘말렸다. 와지마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챔피언 벨트를 팔아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제두는 이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와지마와 방어전 이후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몬존과 대결하기로 합의했고, 대전료가 무려 50만 달러였다는 것. 와지마와의 파이트머니가 4만 달러인데, 겨우 그 돈을 받고 챔피언 벨트를 팔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와지마한테 패하면서 유제두는 세계챔피언에서 내려왔고, 카를로스 몬존과의 50만 달러짜리 대전도 물 건너갔다.)
1976년 삼청각에서 만났던 무하마드 알리와 유제두.(사진=유제두 제공) |
#5. 무하마드 알리와의 만남
세계챔피언에 오르고 영화 촬영을 했었더라고요. ‘눈물 젖은 샌드백’이란 자전적 영화였는데, 흥행에 성공했나요?
“영화배우 여수진 씨가 제 부인으로 나왔습니다. 한 달 정도 촬영했는데, 제가 봐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습디다. 영화사에서 큰 손해를 봤다고 들었습니다. 인기에 편승해서 찍은 영화라 다른 배우들에게 민폐만 끼친 셈이었죠.”
1976년에는 무하마드 알리와 한국에서 만남을 가졌어요. 복서 유제두에게 롤 모델 같은 분 아니었나요?
“그렇죠. 라디오을 통해 알리 경기를 들으면서 복서의 꿈을 키웠으니까요. 그런 사람을 직접 대면하니 감개가 무량하더군요. 굉장히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이노키와 격투기를 하고 방한한 스케줄이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복서가 겸손하고 정도 많고, 말씀도 잘해줘서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알리의 명언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이잖아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운동을 했기 때문에 당시 알리와의 만남은 제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인터뷰 도중에 유제두 선생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가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 ‘춘식이 잘 있는가? 어찌 지내? 나? 뭐 체육관하고 있지. 언제 한 번 봅시다. 그래, 내가 또 연락할게.’ 춘식이가 누굴까 궁금했다. 유제두 선생은 “춘식이 몰라? 강춘식! 허버트 강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수도경비사령부에서 함께 운동했던 허버트 강과의 통화였던 것이다. 세계챔피언보다 더 유명했던 동양페더급 챔피언 허버트 강. 순간 그의 근황이 몹시 궁금해졌다.)
와지마 고이치하고는 은퇴 후에 더 친해졌다면서요?
“그 친구가 자신의 권투 인생 중 저하고 치른 시합을 가장 잊지 못한다고 합디다. 한 번은 후지TV에서 와지마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촬영팀과 같이 우리 체육관을 방문해서 일주일 가량 머물며 촬영을 했어요. 낮에는 촬영하고 저녁에는 와지마하고 술 마시고….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더군요. 저도 일본가면 와지마를 만났습니다. 그 후로 계속 인연을 이어간 셈이죠.”
지금은 이전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침체된 복싱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선수 발굴에도 힘을 쓰고 계시는데요, 직접 챔피언을 발굴하기도 하셨나요?
“1984년 IBF(국제복싱연맹) 챔피언에 오른 장태일을 비롯 곽정호, 차남훈, 장영순, 정선용 등 동양챔피언을 길러냈습니다. 장태일이 챔피언이 됐을 때는 제가 세계챔피언에 오를 때보다 더 큰 희열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권투선수를 하겠다는 어린아이들이 없어요.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복싱인들이 서로 힘을 모아 복싱 부흥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로 가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죠. 스타 선수가 나와야 해요. 복싱에 관심이 쏠리려면.”
세계챔피언 출신 중에서 성공적으로 사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사기 당하기 십상이었죠. 마음 약하고, 도와달라면 거절 못하고, 사업 투자한다고 돈 가져가서 도망가는 놈들도 있고. 저도 체육관 운영이 아닌 사업을 했더라면 망했을 겁니다. 한 눈 팔지 않고 체육관만 운영해온 것이 지금까지 올 수 있게 했어요. 그래도 제 건물에다 체육관 지으면서 두 아들 제대로 키웠으니, 이 정도면 만족해야죠.”
유제두 선생은 시력이 안 좋은 편이다. 눈을 뜨고 펀치를 맞다 보니 시력이 떨어졌다는 것. 그래서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고 한다.
권투를 하면서 시력을 잃은 유제두 선생. 그래도 그는 복싱선수였던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사진=헤럴드스포츠 조석연 PD) |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 2명이 체육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관장에게 인사를 하고 훈련복을 꺼내 들고 나가면서 기자와 촬영하는 PD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친구에게 얘기를 한다. “우리 관장님, 유명한 사람인가봐. 인터뷰하는 거 맞지?” “그러게. 옛날에 복싱선수였다고 하던데?” “복싱? 맞는 거?”….
그 아이들은 자신이 다니는 체육관이 복싱을 배우는 체육관이 아닌 헬스클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과 67세의 관장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체육관 내부를 둘러봤더니 사각 링 주위에는 다양한 운동장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복싱의 현실과 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는 듯 했다.
<'영원한 복서'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유제두 선생>(촬영=조석연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