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1968년 예순아홉 살의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ㆍ1899~1972)가 하얀 머리칼을 반짝이며 노벨 문학상 시상식장에 선다. 키 큰 백인들 사이에서 그는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극도로 왜소한 체구에 쏘아보는 듯한 커다란 눈, 가와바다는 겨울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당찬 어린아이 같았다. 그의 수상 연설은 선배 시인 료칸의 절명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내 삶의 기념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
봄에 피는 꽃
산에 우는 뻐꾸기
가을은 단풍 잎새.”
허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이 황량한 수상 소감은 서양인들 마음에 ‘동양의 미학’이라는 짙은 여운을 각인시킨다. 가와바다의 소설은 한마디로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그 유명한 ‘설국(雪國)’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이 명문장은 소설 전체 분위기를 단번에 보여준다. 주인공 시마무라가 도쿄에서 열차를 타고 시미즈터널을 지나 니가타현 에치코 유자와역에 도착하는 순간을 묘사한 이 문장에서 압권은 설국이라는 표현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어떤 이국땅에 뚝 떨어진 느낌이 간절하게 와 닿는다. 간혹 설국을 ‘눈의 고장’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 맛이 덜하다. 일본에는 시코쿠(四國)나 난코쿠(南國)처럼 국(國)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 나라다. 특정 지역을 국으로 표현하는 문화는 일본에선 흔하다.
‘설국’은 주인공 시마무라와 두 여인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마무라를 향한 순정을 지니고 있는 게이샤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묘한 감정을 느끼는 여인 요코는 소설의 중요한 장치다. 하지만 이들은 커다란 갈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소설은 구체적인 인과관계보다는 주인공들의 감정 흐름, 주변 관찰 등으로 밋밋하게 채워진다. 이 밋밋함이 ‘설국’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연정을 품고는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허무한 행태는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설국’에는 극단적인 갈등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승자도 패자도 없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구분도 없다. 물론 이념이나 계급갈등도 없다. 깊이 들여다보면 시작도 끝도 없다. 그저 어떤 장면을 냉정한 시각으로 촬영한 아주 느린 흑백필름을 보는 듯하다.
가와바다는 오사카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네 살이 되기 전 부모를 잃고, 백내장으로 시력을 상실한 할아버지와 함께 어둡고 고독한 성장기를 보낸다. 하루종일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살았던 때 기억이 가와바다의 삶을 지배한다. 살을 에는 듯한 무감각한 시선,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냉정함, 신비롭기까지 한 싸늘하고 허무한 세계관은 그때 이미 만들어진 것이었다.
차가운 정물화 같은 가와바다의 허무가 서구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서구인들에게 ‘설국’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어떤 신(神)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삶의 덧없음을 꿰뚫어버린 가와바다는 그렇게 전설이 된다.
가와바다는 죽음도 극적이었다. 후지 산이 보이는 집에서 그는 가스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유서도 단서도 없는 죽음이었다.
지금도 기차 속도는 소설이 쓰이던 당시보다 훨씬 빨라졌지만 터널을 지나면 거짓말처럼 하얀 설국이 펼쳐진다. 키보다 높게 쌓인 눈더미 사이로 난 길을 걸어 가와바타가 소설을 완성한 다카한 여관을 찾아가면, 그가 설국을 완성했던 방에서 커다란 창으로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단다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나요”라고 말하던 고마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첫댓글 오죽하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끝낼까 ..
아주 보편적인 문장이 아름다운 시로 변한다니..............시의 묘미는 알수가 없어
지난 토요일 소백산에 갔었는데 길이 미끄러서 도중에 하산했다...그리하여 설국은 못보고 왔다는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