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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0일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마태오 28,16-20
선교의 기본이자 시작: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 말하기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며 선교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선교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강이 불어난 곳의 다리를 집에서 창문으로 보다가 다리가 끊기게 될 것 같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재빨리 나가 차량을 통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차량이 반대쪽에서 오자 손을 엑스자로 그리며 차를 막아섰고 그 차가 멈추었을 때 바로 그 앞에서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람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었다면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직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직의 끝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직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가수가 공연하는데 사람들이 야유하며 다 떠나버린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더는 가수가 아닐 것입니다.
사제가 강론이 두려워 미사를 꺼린다면 주님께 사제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 네브래스카주 한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 소년 ‘로건’이 휴스턴에 있는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해서 진행자인 마이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년은 울먹였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송아지가 몸이 약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화한 것은 그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자신이 아끼던 송아지를 데려가셨는지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로건은 누구든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항상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 체험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한 번쯤 나가게 만드는 마중물에 불과합니다.
지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체험을 전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개신교에서 전교로 유명한 분 중의 하나가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가 목사가 되기 전에 아내와 딸이 주일에 교회 가지 못하게 하고 스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크게 났고 불교 신자였지만,
하느님께 기도하여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전도 연습으로 끌려 나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고구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고구마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란 그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찔러 보는 것이라는 것.
그는 “예수 믿으십니까?”, “그래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면 참 좋아요.”,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네 마디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으십니까?”입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와야 그다음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라고 하십니다.
저도 한 선교왕을 아는데, 그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을 합니다.
그런데도 1년에 30명씩 성당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선교하지 못해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찬미 예수님!”은 강론 전이나 어머니와 통화할 때 정도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게 할 결심을 해 봅니다.
신자들과 길거리 선교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저 “찬미 예수님!”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입에서 누구 앞에서건 예수님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시작일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복음: 마태 28,16-20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교합시다!
오늘 전교 주일입니다.
면소재지에서도 한참 들어오는 이 한적한 어촌에 살면서 어떻게 이웃 전교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봅니다.
초고령화된 지역에다, 사람들 만나기도 하늘의 별따기인데...
그러던 중 그것도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니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택배 배달을 위해 오시는 분들, 솔향기길 걷다가 피정 센터를 지나가는 분들, 공사하러 오시는 분들, 버스 운전 기사님들 등등,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를 찾아오는 분들, 스쳐 지나가듯이 만나는 분들이 다 소중한 전교의 대상입니다.
한번은 저희 피정센터로 중고물품을 가득 싣고 오신 운전 기사님을 만났습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간식이며, 커피며, 생수를 챙겨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아쉬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즉시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하시려고 점심도 제대로 드시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라면이라도 끓여들일까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라면 두봉지에 계란 두 개, 파 송송 썰어넣어 푸짐하게 한 그릇 차려드렸습니다.
마침 찬밥까지 남아있길래 챙겨드렸더니, 배가 고프셨던지 싹 비우셨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살짝 감동 받으셨던 기사님은 이것 저것 천주교에 대해서 묻기도 하시더니
마침내, 당신도 나이가 들면서 종교를 하나 갖고 싶은데, 천주교가 좋겠다고 그러셨습니다.
너무나 반가웠던 저는 즉시 사시는 것 주소를 물어보고 가까운 본당 사무실 연락처를 알려드렸습니다.
조만간 사무실 찾아가겠노라고 하시며, 혹시 다음에 또 근처 배달 오면 라면 또 끓여줄 수 있냐고?
좋다고 언제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 사소한 언행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깨달음입니다.
전교 주일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전교는 삶을 통한 전교인 듯 합니다.
삶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악한 표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면서,
천주교 믿으세요, 성당 나오세요,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3년간의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한계, 무기력을 진하게 체험하며,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시기는 어찌보면 전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과제이자 가장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또한 어떤 성인의 표현대로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보속입니다.
기회가 좋으나 나쁘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전교를 생활화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각자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눈빛만 봐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존재 그 자체로, 우리 매일의 삶을 통한 복음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편안해하고 행복해합니까?
나를 보면 어떻게 해서든 함께 있고 싶어 붙잡고 늘어집니까?
전교 주일을 맞아 우리들의 삶에서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흔적과 자취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성당 가자, 세례 받아라, 하지 않아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따라 하느님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일 강론>(2024. 10. 20.)(마태 28,16-20)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우리가 복음 선포 활동을 하는 것은, 즉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고, 또 모든 사람이 함께 구원받기를 우리도 바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다음 말은,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잘 나타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40).”
사람들이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을 그 멸망에서 구하고 싶어서,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고, ‘살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활동입니다.
단순히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락한 세대’는 “죄 속에서 살다가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라는 말은, “여러분은 심판 때에 멸망당할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그들과 함께 멸망을 당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으십시오.”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살고 싶으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십시오.”입니다.>
이 말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이 곧 닥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날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 되지 않음을,
즉 점점 더 가까워졌음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2)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면, 나 자신이 먼저 복음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먼저 복음화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기의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믿음’이 자기의 ‘삶의 중심’이고 ‘삶의 기초’ 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만일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주님을 의심하는 모습을 드러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더라도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자신도 안 믿으면서, 또는 믿음이 부족한 상태로, 남에게 믿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구원의 길’을 알려 주고,
그 길로 인도하는 일이고, ‘함께’ 구원받자고 권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마치 전쟁을 하듯이, 또 적을 굴복시키듯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미움’이라는 방법으로 ‘사랑’을 전하려고 하는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즉 모든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선교활동은 형제에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사랑’은 신앙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그의 신앙은 거짓 신앙이고, 그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쳐 있으면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4) 세 번째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것’인데,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의 방향이 잘못되면, 인생 전체가 잘못된 곳으로 갑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