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이기철
마흔몇 해를 낙동강 가에 살면서 나는 낙동강을 한번도 노래하지 못했다.
아카시아 그루터기같이 가시만 성성한
내 여름 몸살 같은 낙동강
내 송곳니 빼어서 던지며 예쁜 새이 나 달라고 물살 세던 낙동강
댕기머리 내 누님 삼베옷 빨아 말려 입던 낙동강
지금은, 뒤웅박이 쌀 팔아 내 중학등록금, 검정운동화 사주시던
어머니 무덤만 황혼 속에 잠들어 있는 낙동강
낙동강이여, 부르면 벌써 추억인 낙동강
거기서 스탠다드 영어책 배우고 페니시린 주사 맞아 말라리아 쫓아내고
거기서 쇠똥종이 공책 찢어 싸리꽃 같은 순이한테 편지 쓰던 낙동강
노을이여, 아무리 아름답게 걸려도, 그 드리운 치마폭엔 절로 한숨이 배어 있는 낙동강 노을이여
왜 피 같은 거, 죽음 같은 거, 왜 못 견디게 그리운 것들만 네 곁에 서면 도라지꽃으로 피어오르는지
서른아홉 해 전의 소련제 장총과 함경도 방언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왜 너는 말하지 않느냐
아직도 탄피 묻힌 골짜기엔 원추리꽃 피고
네 곁에 공장 짓고 학교를 세우는 사람들도,
너의 맨살 베고 잠들고 너를 가로질러 한 달에 한 번 월급 받는 나도
장롱 속의 담요로 내 아이 덮어주듯 네 추운 강자락 덮어주지 못했다
부디 너는 손톱 밑에 흙 넣지 말고 살거래이, 제발 너는 애비처럼
손등이 누룽지가 되지는 말거래이, 어머니 소원이던 나는 지금
흙 대신 분필을 만지는 선생이 되어 끝없는 회의의 교실을 오고가지만
복도를 오가면서 저 스무살들의 남방과 블라우스 속에 감춰진 꿈과 분노가 무엇인지를
그들 분노의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면서도 그들의 연못 속에 발을 꽂진 못했다
강원도의 물줄기를 불러모아, 봉화 청송을 마음 급해 쫓아오다가 돌밭에 가슴 찢긴 낙동강
금호강 남강 그 옷고름 같은 지류들도 다독거리며
물으면 울음 터질까 봐 입 다물고 흘러가는 낙동강
남원 거창 합천을 쓸어 모아 남해로 달려갈 때
네 물결에 발을 씻고 잠드는 농부 있거든
낙동강이여, 보슬날에 다친 그들의 발목 아물게 하라
네 흐르는 물소리 속에 첫밤을 맞는 신부 있거든 그녀에게
해 같은 첫 아일 갖게 하라
내 낙동강이라 부르지 않을 땐 이 땅의 것 아닌 낙동강이여
내 낙동강이라 부르면 어느새 달려와 소나무 껍질 같은 내 삼촌의 목소리 되는 낙동강이여
마흔이 되어서도 겁 많은 사내 하나를 질타하라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는 사내 하나의 녹슨 심장을 난타하라
욕망에 눈먼 사람들이 네 위에 열번 나라를 허물고 세워도
천년을 길 바꾸지 않는, 천년을 낙동강일 뿐인
댕기풀과 다람쥐와 내 맨발의 무덤일 낙동강.
* 시집 미수록시 : 창비 1989년 발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