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백제의 성왕이 고대 한일 관계 역사상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부터 살펴야만 할 것 같다.
성왕은 백제본국왕으로서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포교한 사람이다.
이 사실은 ‘일본서기’등 일본의 옛 문헌들이 상세하게 전한다. 불교 관계 전적(典籍)에서는 백제국 성왕의 업적이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포교한 것은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다)의 일이다.
‘일본서기’와 ‘부상략기’에 따르면 “그해 10월13일에 백제국의 성왕이 킨메이천황에게 금동석가상과 불경 등을 보내주었다.
성왕은 ‘불교가 이 세상의 모든 법(法) 중에 으뜸가는 것이므로 불교를 믿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금동석가상은 당시 왜나라의 최고위 대신이었던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5~570년)이 킨메이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아 그의 저택에 모셨다.
소가노 이나메 대신은 백제국에서 포교된 불교를 돈독하게 믿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저택을 불전으로 개축해서 코겐지(向原寺)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사찰이 왜나라 최초의 절이다.
이와 같이 왜나라 킨메이천황에게 최초로 불교를 공전(公傳)시킨 백제국의 성왕(聖王)이 뒷날 왜(倭)에 건너가서 왜왕이 된 킨메이천황(欽明天皇) 바로 그 사람이라니, 어찌된 까닭일까.
고대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그의 저서(‘二つの顔の大王’ 大藝春秋社 1991)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성왕 18년(서기 540년)에 고구려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다 패전한 성왕은 즉각 왜국(倭國)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왜국의 가나사시노미야(金刺宮)에 거처를 삼고, 왜국왕(倭國王)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일본으로 망명한 서기 540년이, 킨메이 원년(欽明元年)이 되는 것이다.”
가나사시노미야라고 일컫는 궁의 위치는 지금의 나라현 사쿠라이시 가네야(櫻井市 金屋) 부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백제국 성왕이 “성왕 18년(서기 540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해서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또한 백제 성왕이 붕어한 시기는 그 후 14년 뒤인 554년으로 기록돼 있다. 즉 “성왕 32년(서기 554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서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밤중에 구천(狗川)에 도달했다.
그러나 신라의 복병(伏兵)이 달려들어서 난전이 벌어졌고, 왕은 부상당해 승하했다”는 것이 ‘백제본기’의 기사다.
한편 같은 시기에 관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원왕(安原王) 10년(540년)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왕은 정예 기병 5000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해서 도주케 했다.”
이처럼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를 보면, 서기 540년에 백제국 성왕이 고구려국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패전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백제본기’에서 540년에 성왕이 왜국으로 망명했다는 기사는 없다.
더구나 그는 14년 후인 554년에 신라에 기습 작전을 감행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539년 12월5일에 킨메이천황이 등극하고, 서기 540년을 원년(元年)으로 삼아 1월에 정비(正妃)를 정하게 된다. 그런데 원년 2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2월에 백제사람 기지부(己知部, 코치후)가 건너왔다. 그를 왜국의 소후노카미코호리(添上郡)의 야마무라(山村, 현재의 나라시 터전)에 살게 했다. 그는 지금(서기 720년경)의 야마무라의 코치후(己知部)의 선조다.”
즉 이 당시 백제인들이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 건너와 고관으로 활약한 사항들이 기록돼 있는 것이다
. 또한 ‘일본서기’에는 같은해 7월에, “왕도(王都)를 시키시마(磯城山島, 지금의 나라현 사쿠라이시 가네야)에 천도했다.
그리하여 왕궁의 호칭을 시키시마의 가나사시노미야(金刺宮)로 부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고바야시의 주장에 따른다면 고구려에 패해서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의 성왕은 이 금자궁을 새로운 왕궁으로 삼고, 서기 540년 7월에 킨메이천황으로서 왜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목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국왕인 킨메이천황이 실제로는 백제국 무령왕(武寧王, 501~523년 재위)의 조카(생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백제 성왕은 무령왕의 친아들이며, 무령왕이 승하하여 성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 성왕이 서기 540년에 일본에 건너와 킨메이천황이 되어, 나라땅 금자궁에서 왜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고바야시의 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즉 백제 성왕이 무령왕의 왕자인 것만은 틀림 없는데, 그 성왕이 왜나라 쪽에서는 무령왕의 생질이 되는 킨메이천황이기 때문이다.
왜나라 킨메이천황이 백제 무령왕의 생질(조카)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앞으로 본고(本稿)를 통해서 상세하게 그 계보를 밝히기로 하겠다.
소가노 가문<11>
흥미로운 점은 이 소가노 가문도 백제인이라는 사실이다.
소가노 우마코의 고조부는 백제 개로왕 때의 대신이었던 목리만치(木力力力滿致)다.
목리만치 대신은 백제에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사들에게 살해당하자 개로왕의 왕자인 문주왕(文周王, 475~477년 재위)을 등극시킨 뒤에 왜나라로 건너와서 왜나라 조정에서 조신이 되었던 인물이다.
목리만치는 백제왕족들이 살던 백제강(百濟川) 일대의 이시카와(石川)에 자리를 잡고 성씨를 소가(蘇我)로 바꾸었다고 가토와키 테이지교수는 밝히고 있다.
아무튼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정부군은 고전 끝에 승리했다. 모노노베노의 동조자들은 완전히 소탕됐다. 서기 587년 7월의 일이었다.
8월에는 승하한 요메이천황의 후계자로 하쓰세베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가시키 야히메 황후가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하쓰세베왕자, 즉 스슌(崇峻, 587~592년 재위) 천황이 등극했다.
어째서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조카딸 가시키야히메 황후를 왕위에 올리지 않았던 것일까.
슬기로운 가시키야히메가 소가노 우마코의 천거를 일단 거절했을 것이라는 게 사가들의 견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슌천황이 된 하쓰세베왕자는 소가노 우마코와 가시키야히메가 제거한 아나호베왕자와 야카베왕자의 친동생이었다.
하필이면 왜 반역자들의 동생을 옹립한 것일까.
살해당한 아나호베왕자의 생모를 위안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는 게 사가들의 견해다.
즉 죽은 두 왕자의 생모인 오아네키미(小姉君)왕비는 아나호베왕자가 반역에 가담했다가 살해당한 것을 매우 비통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아네키미왕비, 그녀는 실은 가시키야히메 황후의 이모였다.
즉 오아네키미왕비는 기타시히메왕비 (가시키야히메황후의 생모)의 친여동생이었다. 킨메이천황은 두 자매를 나란히 왕후로 삼았던 것이다.
꽃피우는 백제불교 <12>
스슌천황이 등극한 이후. 왜나라의 백제인 왕실은 백제 불교의 재건에 활기를 띠게 됐다.
이제 배불파가 완전하게 제거되었으므로 백제 불교가 나라의 아스카 땅으로 대거 진출해오게 된 것이다.
스슌천황 원년인 서기 587년에 7당가람인 호코지(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했다.
왜나라 최초의 대가람 건설을 위해서 이 해에, 백제의 사신과 승려와 사원 건축가들이 대거 아스카땅으로 건너왔다.
그 사실은 ‘일본서기’와 ‘부상략기’ 등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해(587년)에 백제국의 사신을 비롯해서 승려 혜총(惠總)·영근(令斤)·혜식(惠 ) 등이 왔으며 부처님 사리도 보내주었다.
백제국의 은솔(恩率) 벼슬의 수신(首信)·덕솔(德率) 개문(蓋文)·나솔(那率) 복부미신(複富味身) 등 사신과 부처님 사리, 승려 영조율사(聆照律師)·영위(令威)·혜중(惠衆)·혜숙(惠宿)· 도엄(道嚴)·영개(令開) 등과, 사찰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문가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 (金盧盤博士)인 장덕(將德)벼슬의 백미순(白味淳)·기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 능귀문( 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화공(畵工)인 백가(白加)를 보냈다.
”
이 사람들이 백제왕부인 아스카땅에 본격적으로 건너옴으로써 호코지(법흥사)라는 7당가람의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 대가람의 건설은 장장 8년이 걸려 서기 596년 11월에 준공을 보게 된다.
이 당시에 왜나라에 건너왔던 사신인 은솔 수신은 백제로 귀국하는 길에,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불법을 전수시켜 달라고 간청한 젠신 등 3명의 비구니 수도생을 데리고 백제에 건너갔다.
그후 2년이 지난 589년 3월에 젠신 등이 백제에서 수계(受戒)하고 왜나라 아스카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서기 592년 11월3일이었다.
호코지 건설 공사가 5년째 계속되고 있던 시기에 왜나라 왕실에서는 끔찍한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스스로가 옹립했던 스슌천황을 부하를 시켜 암살한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해 10월4일에 있었다.
10월4일에 신하가 스슌천황에게 사냥해온 멧돼지를 바쳤다. 스슌천황은 그 멧돼지를 손가락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쯤에야 이 멧돼지의 목을 자르듯이, 과인이 미워하는 자의 목을 칠 것이런가.”(‘일본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