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미술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가옥구조에 첨가되는 장식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병풍은 이러한 생활미술품으로 웃풍이 센 우리네 한옥구조의 결함을 보완하거나 방 안의 자질구레한 물건을 가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살림세간 가운데 하나였다. 안을 치장하는 도구로서 항상 주인 가까이에 놓이는 실용품인 동시에 장식품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돌상과 혼례상을 병풍 앞에서 받았고 회갑연에서도 병풍 앞에 정좌하고 앉아 자손들의 하례인사를 받았으며, 생을 마치면 관에 담긴 시신을 병풍 뒤로 모셨다.사람의 일생이 병풍과 한께 시작하고 병풍과 함께 끝났던 것이다. 집안 잔치나 행사에는 반드시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이 있는 병풍을 둘러쳐서 분위기를 돋구었으므로 병풍은 행사의 형식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민화는 거의가 병풍에 편집되어 집 안에 간직 되었는데 병풍에 그린 민화는 그것을 둘러칠 장소나 행사의 내용
에 걸맞은 것이 선택되었다. 사랑방에는 책걸이나 문자도 혹은 주인이 호방한 성품이라면 수렵도나 호랑이 그림, 화사한 화훼도나 부귀를 상징하는 화조도, 또는 수많은 물고기가 노닐며 다산다복을 뜻하는 어해도 병풍이, 혼례의 신방에는 이러한 어해도 외에도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병풍 또는 탐스러운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화조도가 제격이었다.
수연이나 회혼례 때에는 주인의 일생을 다룬 평생도를 주문하여 장식했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그림으로 분위기를 한결 북돋았다. 그 외 문배그림이나 벽장식 그림에도 민화가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민화는 종이에만 그린 것이 아니다, 신부가 타는 꽃가마 덮개로 헝겊에 그린 호피도(虎皮圖)라는 민화를 사용했고 몸채에도 원앙이나 학을 조각했다. 이외에도 널판지, 대나무, 도자기, 가구, 문방구, 돗자리에 이르기까지 민화는 우리네 일상 생활공간 곳곳에 놓였으며 한국인이 살아가는 곳에는 민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민화는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민화의 특성으로는 실용성, 상징성, 예술성을 꼽을 수 있다. 순수미술은 예술성을 앞세운다, 이와 달리 민화에서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민화에는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그 때에 그려진 그림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징성은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민화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이 그려진 시대의 시대상을 읽어내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민화에는 장식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주술적 필요에 의한 것이든 많은 상징적인 도상들이 내포되어 있다. 더욱이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기 위해 표현방법이나 소재 해석을 늘 새로이 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민화는 더욱 독특하게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화의 상징성은 그 지방의 문화적인 환경이나 개인적 의사에 의해 자유롭게 변형되고 첨삭 되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롭고 흥미 있는 그림들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물고기의 생물학적 특징,즉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는다는 점과 떼지어 다닌다는 점은 어해도에 `다산'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였으며, 연못 속에 유유히 떠다니는 잉어는 출세와 부귀를,
폭포를 거슬러 뛰어 넘는 잉어그림인 약리도(躍鯉圖)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입신출세를 상징하게 되었다. 고사나 민담의 내용을 담은 이야기를 한 가지 또는 두세 가지의 사물로 축약하여 상징적인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메기의 그림에는 두 가지의 상징이 있을 수 있는데, 머리를 투구처럼 그린 것은 장수를 상징하지만 남근처럼 그린 것은 다산의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민화의 상징적 표현은 서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사소통의 바탕이 되는 공통의 세계관을 매개해 주는 역할도 한다. 가령 부귀다남(富貴多男) · 부귀공명(富貴功名) · 무병장수(無病長壽) 등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바램이 민화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민화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동경의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옛 사람들에게는 자손의 번영과 출세는 음양의 조화, 풍수의 조화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자리 잡혀 있었으므로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민화의 청룡백호도나 지도화에서 독특한 시점과 묘사법으로 나타난다.
민화의 지도화는 산과 집들을 화면의 한 중심에서 사방을 들러 본 것처럼 그린다. 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에 바탕을 둔 좌청룡(左靑龍) ) · 우백호(右白虎)나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물을 앞에, 산을 뒤로 한 바로 그 지점이 인간과 산신(山神)이 한 마당에서 어우러져 사는 공간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화는 단지 등축도법(等縮圖法)에 의한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개념화된 풍수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그림으로 볼 수 있으며 자연과 인간이 일체가 되는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지도화와 같은 독특한 그림을 낳게 한 것이다.민화에서 표현되는 이러한 상징성들은 사회 전체에 의해 공유되기도 하지만 특수한 사회부류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감수성에 의해 그 상징이 변질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성이 민화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이루게 하며 민화의 아름다움과 해학 역시 이러한 상징적 표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의 회화에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감상을 위한 것이든 교화를 위한 것이든 아니면 단순히 치레나 장식을 위한 것이든 그 필요성은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옛 그림이 지니고 있던 주요한 기능 중에서 오늘날의 기능과 다른 점은 그림이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지닌 매개체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들 그림이 가진 주술적 힘이 여러 가지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또 소원하는 바도 이루어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벽사구복(僻邪求福)의 사상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현세 복락주의와 벽사의 관념은 서민들에게 유구하고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샤머니즘 혹은 애니미즘의 일종이다. 이 원시적 형태의 종교가 불교나 도교 등과 융합을 거치면서 독특한 민간 신앙을 형성하였고 우리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음은 새삼 부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화 중에는 토착적인 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의해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있다. 이를 세화(歲畵)라 하며 매우 널리 그려졌다.
궁중은 물론이고 사대부들의 저택, 일반 서민의 집에서 입춘방처럼 축귀(逐鬼)나 구복의 상징으로 그린 세화를 정월 초하룻날 대문 또는 집안에 걸거나 붙이게 했다. 그 대표적 예가 호랑이 그림인데, 호랑이는 영물로서 악귀를 쫒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호랑이는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 그려진 것처럼 음양오행설로 따지자면 서쪽을 상징하는 금(金)에 해당하고, 털짐승의 우두머리이며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의 상징으로서 지상의 잡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영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로선 이것이 상식이고 사실이었으며 영적인 힘을 지닌 동물 그림을 집에 둠으로써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민화의 발생과 전파에 큰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를 지닌 벽사화로는 사신도, 사령도, 용그림, 산신도, 신장도 등이 대표적이다.
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장식이나 주술적 가치로 그린 그림은 곧 그들의 공통되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정통회화가 작가 개인의 예술성이 나 개성 혹은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에 비해 민화에는 일반 서민의 집단적인 미적 체험이나 세계관이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표현형태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는 민화를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으로 그렸다기 보다는 생활이 필요에 의해서 그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공통의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렸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의 회화를 감상화로 그렸을 경우에 거기에는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의도가 담긴다. 이러한 그림에 대한 감상에는 한 사람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세계관과 어는 정도 일치된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실용화로서의 민화도 크게 다를 바 없 다. 다만 민화의 경우에는 이러한 미적인 공감대가 개개인으로서의 작가와 감상자가 아니라 폭 넓은 대중을 상대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민화는 곧 일반 서민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공감과 공동소유에서 올 수 있는 쾌감을 바탕으로 그리고 감상하고 즐겼던 그림이다.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법도 없이 그리고 표현하고 사용해왔다. 여기서도 우리는 민화가 서민들의 생활과 함께 숨쉬면서 형성된 실용성과 대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민화는 그 주제와 표현의 원류에 있어서 문인화난 도화서 화공들의 그림을 철저히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담아내는 내용이나 표현기법은 다르다. 이는 민화가 속칭 뽄그림'이라고 하여 일정한 본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점차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특징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즉 본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조선시대 상류층과 왕권 중심으로 형성된 유교적인 세계관이 토속적이고 종교적인 민중들의 세계관으로 전이되었으며, 민화가 양산되고 보급되면서 점차 서민들이 지배층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화의 형성 과정에 담겨 있는 서민들의 미의식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자연환경에 대한 순박한 감상과 소박한 생활양식, 그리고 거짓 없는 진솔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표현기법에서의 독특함 그리고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은 바로 서민들에 의한 여타의 예술이 드러내고 있는 미적 특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