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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 *부채를 든 여인. 1908년작 |
1. 첫 번째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1881-1966년) *동거기간: (1904-1912년)
피카소는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웠던 발로세로나 보다 자기 자신의 세계를 찾아 1900년 10월에 파리의
몽마르트로 왔다. 그는 불어도 한마디 할 수 없지만 파리 그 차체가 너무도 아름다웠고 황홀하였다고 한다.
피카소의 화풍으로 1901년부터 그려오던 청색시대를 마감하던 해인 1904년에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비에
흠뻑 젖은 옷차림의 아가씨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올리비에는 검붉은 머리에 키도 크고 야성미가 넘치는
육감적인 여인으로 피카소는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만다. 이 때부터 그들은 사랑하게 되고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24살의 동갑으로 올리비에는 유부녀였다. 그들은 곧 결혼하여 결혼 초기에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올리비에의
헌신적인 내조와 불같은 피카소의 열렬한 사랑으로 그녀를 모델로 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1905년부터
따스한 분홍색으로 그린 장밋빛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1906년에 한 화상이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의 그림을 몽땅
사주는 바람에 피카소의 생활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07년에 입체주의<Cubism> 미술의 시초가 된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하여 20세기 미술의 새장을
열게 되었고 피카소의 명성도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피카소의 지저분하게 사는 버릇 때문에 쾌활한 성격의 올리비에도 힘이 너무 들었고, 1912년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다. 올리비에는 9년간의 피카소와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청산하였다.
<청색시대-장밋빛 시대 *입체주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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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리스트, 1903년작 청색시대 | *광대 1905년작 장미빛 시대 |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년작 |
1901-1904년초 사회적으로 소외된 우울하고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청색을 위주로 그린 시기를 ‘청색시대’라 한다. | 1905-1906년까지 어두운 청색시대를 벗어나 따스하고 긍정적인소재에 분홍을 주조색의 그림을 ‘장미빛 시대’라 한다. | 입체주의(cubism)미술 피카소는 파리 박물관에 가서 본 아프리카 조각품들의 흑인 마스크와 대상에 대한 입체적 관심으로 르네상스이후의 전통기법인 단일 시점을 무시하고,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관찰하고 분석하여 한 화면에 재구성하여 표현하였다. |
⒉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마르셀 앙베르), (1885-1915년) *동거기간(1912-1915년)
피카소가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헤어지자 입체주의와 멀어지게 되며. 종합입체주의 ‘파피에 콜레‘에
접근한다.
그리고 그는 에바를 만났다. 청순하고 가련한 마르셀(에바의 본명)은 22살이며 피카소는 32살이었다.
1912년 그들은 결혼을 하고 마르셀에 대한 사랑과 함께 에바가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자
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마르셀을 에바 라고 불렀다. 피카소는 에바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비뇽의 인근 시골지방으로 갔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고 에바와 함께 하는 생활속에 대단한 행복을 느끼며사랑하는 에바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
으며 그림 위에 “나는 에바를 사랑한다.”라는 글을 썼다.
이 시기에 1914년 8월 1일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선포되었으며 입체파 동료화가 ‘브라크(1882-
1963년)와 드랭(1880-1954년)은 군대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나버렸다.
1915년 겨울에 에바에게 병이 찾아왔고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끔직스러운 고통을 겪은 후 결핵으로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피카소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웠던 분위기에 견디지 못해 시골의 별장
을 떠나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 종합적 입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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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구엘 | ‘옷을 벗은 에바’ 1912년작 | *‘만들린과 클라넷’ (콜라주 1913년) 종합입체주의 | |
◈<종합적 입체주의> 1913년경에 나타난 종합적 큐비즘 단계에서는 화면에 물체의 감각과 색감을 살리기 위해 , 실재로 신문지나 잡지, 천, 나무를 그림에 직접 도입하여 콜라쥬나 파피에 콜레 기법을 이용하여 기존의 미술이 갖고 있던 평면적 입체감에서 완전히 탈피한 종합적 단계까지 발전되었다. |
⒊ 세 번째 연인,
올가 코흐로바(1891-1955년) *동거1917-1924년
셋째 연인 올가 코흐로바는 러시아 장군의 딸이며 러시아 디아길레프 무용단의 무용수였다. 시인 장
콕토는 피카소집을 방문하여 1917년 발표될 발래극을 위한 무대장식과 의상들을 디자인해 볼 것을
제안했다. 피카소는 제안을 거부하다가 받아들여 1917년 2월에 로마로 갔다. 무용에 매료된 피카소는
디아길레프 무용단의 무용수인 올가 코흐로바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다.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으로 1918년 7월 12일 한 러시아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피카소는 36살
이고, 올가는 25살이었다. 결혼 후 피카소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역에 살게 되며, 일상생활도 크게
달라진다.
1921년 파울로 피카소는 첫아들 파울로가 태어났다. 아들을 몹시 귀여워했으며, 올가를 사랑했다. 이때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실주의적 표현의 그림들로 피카소 자신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담았던 ‘올가의 초상’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올가와 결혼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이미 마리 테레즈라는 여인은 피카소의 아이를 가졌
던 것이다.
1935년 6월엔 올가는 아들 파울을 데리고 피카소의 곁을 떠났다. 올가는 1963년에 죽을 때까지 이혼을
하지 않았다.
피카소의 맏아들 파울로는 일평생 직업도 야심도 없이 아버지의 운전사로 살다가 결국 가망 없이 알콜
중독자로 전락하다가 1973년 아버지 장레식에 참석하려 갔다가 아버지의 일곱째 연인 자클린 로크의
거절로 참석치 못하고 권총자살을 하였다.
<고전적인 구상의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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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코호로프 사진 |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의 초상 .1917년작. *고전적인 표현* | *세 사람의 댄스. 1925년. 올가가 발레리나였던 관계로 춤의 연습을 종종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이 그림을 피카소의 첫 번째 초현실주의적 작품이라고 한다. |
⒋ 넷 번째 연인, :
마리 테레즈. ( 1924-1935년) *동거 1924-1935
천진난만하고 순정에 가득찬 청순한 여인 마리 테레즈를 46살의 피카소가 만난 것은 1927년 1월의
몹시 추웠던 날에 겔러리 라파에트 근처의 어느 길목에서였다.
17세의 아름다운 아가씨 마리 테레즈를 피카소는 6개월이나 뒤쫓아 다녔다. 마리 테레즈가 18살인 해에
동거하기 시작하여 22살에 딸 마이아를 낳았다
테레즈의 모든 것은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불러 일어 켰으며, 그녀의 얼굴과 육체, 그녀에
대한 사랑은, 아름답고 충만한 형태의 거침없이 뚜렷한 윤곽을 통해 그의 그림과 조각들 속에 표현되었다.
피카소는 큐비즘, 초현실주의 등 미적 실험을 통해 지금까지 그녀의 초상화는 한 10여 작품이나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래전부터 피카소는 마이 테래즈 몰래 프랑스 사진작가 도라 마아르 여인과 만나고
사랑을 했던것이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와 헤어지면서 이혼도 하지 많고 지내다가 1973년 피카소가
죽자 따라가서 보살펴야한다면서 자살을 하였다.
<초현실주의적 사조에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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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테레즈 | ,*마리 테레즈 발데르 .1937년 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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⒌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아르,( 1907-1997년) *동거1936-1943년
1936년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 프랑스여인과 동거하면서도 도라 마아르라는 사진작가와 염문을 뿌렸다.
도라 마아르를 한 카페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여자 친구를 피카소
에게 소개하는데 이 아가씨는 깊고 열정적인 눈동자를 가진 진지한 여자였다. 그때 피카소의 나이는
55세이며 25세 연하인 도라 마아르는 30살이었다.
그녀는 지적이고 교양을 갖춘 지성미가 돋보인 여성인 도라 마아르는 현대미술에 열중했으며. 스페인
어가 유창하여 오랜 동안 피카소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그녀는 피카소의 그림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도라 마아르는 게르니카를 그리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피카소는 도라를 모델로 한 ‘우는 여자’를
그렸으며 피카소의걸작 중에 하나다.
도라 마아르는 피카소가 프랑스아즈 질로에게 빠져 그녀를 버렸을 때 신경 쇠약증에 걸렸다
<게르니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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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마아르, 1941년 | *우는여자 1937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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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1937년작> 스페인 내전 중에 프랑코 장군측을 지지하던 나치독일 공군은 1937년 4월 26일에 게르니카마을을 폭격, 주민 5백-1천명을 학살했다.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학살사실은 스페인 출신 화가 피카소의 작품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6. 여섯 번째 연인,:
프랑스와즈 질로 (1921- )*동거: 1943--1953년
피카소가 일생 중에서 그의 후반부를 장식한 프랑스와즈 질로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1943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피카소는 62세였고, 40살 연하인 질로는 22세, 아름다운 미술학도로
한창 피어나는 젊음이었다.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하는데도 질로는 몰래 집을 나와 피카소의 아틀리에
들어 갔다.
남 프랑스 지방으로 와서 다시금 행복을 느꼈으며, 끔찍스러웠든 전쟁과 더불어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창조적인 자유가 되 돌아 왔던 것이다.
프랑스와 질로는 1946년에 아들 크로드와 1949년 봄에 딸 팔로마가 태어났다. 46살의 피카소는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하였으며, 세 가족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그의 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완벽주의적이고 독점력이 강한 질로는 피카소가 친구 주니에프와 비정상적인 애정 행각으로 피카소와의
부부 생활을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피카소의 불륜을 참을 수 없어, 두 남매 만을 데리고 1953년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녀는 그 후 1964년에 「피카소와 함께한 날들」이라는 회고록을 썼다. 이것 때문에 피카소의 아이들
과 피카소와의 관계를 자클린이 단절시켰다. 오랜 법정투쟁 끝에 아들과 딸을 피카소의 호적에 입적시
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질로는 피카소가 죽자 5만 여점의 어마어마한 유작을 상속 받았다.
<목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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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앞의 여인 1937년작 |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 1937년작> 프랑스와즈 질로를 모델로 한 작품 | |
*프랑스와즈 질로. ⇧ |
7. 일곱 번째
연인 자클린 로크. (1927-1986년) *동거 1954-1973년
자클린 로크와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스물일곱 살의 이혼녀였고 피카소는 일흔 두 살이었다.
피카소의 별장 ‘켈리포니아’는 20세기 초엽의 건축양식으로 커다란 유리 창문으로 환하게 밝혀져 늘
신선하고 늘 빛이 가득했다. 피카소가 자클린 로크와 1961년3월 2일 발로리스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
렸다. 자클린은 남편을 숭배했다.
반면 피카소의 아이들과 친구들은 자클린이 자기들과 피카소와의 관계를 단절시킨 장본인이라고 불평
했다. 사실 그렇게 한 것은 피카소 자신이었다.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 사후에 반 정신이상자가 되어
마침내 1986년 권총 자살했다.
파카소는 1960년대 후반까지 매우 건강하였으며, 그는 경탄할만큼 놀라운 삶의 의지로 91년 4개월을
살다가, 1973년 4월 8일에 심부전증으로 마침내 세상을 떠고 말았다. 그에게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피카소는 그림 1,900점, 도자기 3200점, 드로잉 7000점, 조각
1200점, 삽화 3만 여점을 남겼다.
<,만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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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클린 로크 사진 ⇧ |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 초상. 1955년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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