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기둥을 잃어버린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황폐를 치유하는 존재의 기록
서른 살의 오카다 도오루는
법률사무소를 다니다 퇴직한 후 주부로 지내는 남성이다.
가족은 아내 구미코와 고양이뿐. 소박하고 조용한 일상을 살던 오카다 부부였지만,
어느 날 고양이가 집을 나가고 기묘한 전화가 집에 걸려오면서 그 평화가 흔들린다.
도오루는 고양이를 찾아다니다 이웃집 소녀 가사하라 메이와 얽히고,
구미코는 도오루와 점술가 가노 마르타를 접촉시켜
고양이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구하려 한다.
어지러운 꿈이 도오루의 잠을 침범하고 수수께끼 같은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구미코가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춘다.
망연자실한 도오루에게 구미코가 그동안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책이 출간된 직후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1970년대 이후 정신적 기둥이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2차 세계대전 중의 중국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시도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말대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 중 가장 실제 역사에 천착한 작품이다.
도오루는 아내의 가출을 계기로 불가사의한 인물들과 얽히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과오, 역사의 무자비에 손상된 이들의 고통,
기둥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황폐한 내면과
공허하고 기만적인 미디어 및 정치 세계로 말려 들어간다.
마침내 ‘태엽 감는 새’로서 심안을 갖게 된 도오루는
세계의 일부를 치유하는 동시에 구미코를 공허로부터 구출해 되찾으려 한다.
작가 자신이 개고했고 완전히 새로운 번역으로 거듭난 완전판
이것이 바로 진정한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이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1994년 1, 2부가, 1995년 3부(두 권으로 분권)가
국내에서 출간된 바 있다.
번역은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김난주가 맡아,
복잡하게 얽힌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세계를 최대한 작가의 의도에 가깝게 풀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생동하는 인물들도
김난주의 번역을 통해 더욱 실재감 뚜렷한 존재가 되었다.
구미코의 모호하면서 고뇌가 담긴 말투,
가사하라 메이의 당돌한 말투, 반은 과거에 속한 존재인
마미야 중위의 정중하고 고풍스러운 말투 등이 생생한 한국어로 옮겨졌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일종의 영매로서 거듭나는
오카다 도오루의 혼란도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전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국내외에서 청춘을 그리는 작가,
팝 음악과 영화 등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는 작가로 인지되고 있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성공으로
비로소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진지한’ 비평이 쏟아졌고,
『1Q84』, 『기사단장 죽이기』 등의 후속작들이 세계 현대 문학의 중요한 성취로 받아들여졌다.
그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전/이후로 나눌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파리 리뷰]와 가진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는 이 세상이 얼마나 이상한 곳인지에 대해 정직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기묘함으로 가득한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세계는
그가 얼마나 충실한 관찰자인지 입증하는 사례이다.
이 세계를 빠져나오는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친 독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처음으로 소설을 쓴 것은 29살때였다.
첫 소설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는데,
197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히로시마 카프와의 경기를
도쿄 진구구장에서 보던 중,
외국인 선수였던 데이브 힐튼 선수가 2루타를 치는 순간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949년 일본 교토부 교토시에서 태어나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자랐다.
국어교사이자 다독가였던 양친의 영향으로
많은 책을 읽고 일본 고전문학에 대해 들으며 자랐으나,
일본적인 것보다는 서구문학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중학교 시절에
러시아문학과 재즈에 탐닉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 손에 사전을 들고
커트 보너거트나 리차드 브라우티건과 같은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1968년 와세다대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해
격렬한 60년대 전공투 세대로서 학원분쟁을 체험한다.
1971년 학생 신분으로 같은 학부의 요코(陽子)와 결혼,
1974년 째즈 다방 '피터 캣'을 고쿠분지에 연다.
「미국영화에 있어서의 여행의 사상」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7년간 다녔던 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했으며
이 작품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2년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제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고,
전혀 다른 두 편의 이야기를 장마다 번갈아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1985년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7년 『노르웨이의 숲』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문학사에 굵은 한 획을 긋게 된다.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들의 한없는 상실과 재생을 애절함과 감동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전 세계 누적 1000만 부 이상을 기록하며 '무라카미 붐'을 일으켰다.
또한 1997년에는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취재한
특이한 르포집 『언더그라운드』를 발표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평론집이 일본에서만 수십권에 이르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단정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을 통틀어
그는 현대사회의 소외된 군상들의 고독을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집요하게 파헤쳐왔다.
또한 하루키에 대한 평론에서 그치지 않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받고 자란,
이른바 ‘하루키 칠드런Haruki Children’이라 불리는 작가들이 등장,
하루키 리믹스 붐을 일으키고 있어
그의 문학이 가지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있다.
리믹스 소설이란,
다른 작가의 원작 소설을
작가 자신만의 개성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혼합, 변형, 재창조한 소설을 일컫는다.
모토기 후미오의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 REMIX』,
이누카이 교코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REMIX』 등이 있다.
하루키는 어렸을때부터 일본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문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일본적인 것들이란
단지 등장하는 여러가지 일본어로 된 지명과 이름들 뿐이다.
그래서 일본의 일상과 이야기를 작품에서 다루고 있으면서
전혀 일본에 국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슬픈 외국어'에서
의미없는 하나의 언어에 의존하여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일이
슬프다는 얘기를 꺼낸 바 있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언어로 결코 표현될 수 없는
개개인의 심리묘사와 의식세계를 탁월한 그만의 문체로 묘사해준다.
또한 언제나 작품의 끝에서 던져주는 여운들과
미완성인 듯한 느낌을 주는 스토리 구조는
더 없는 감동으로 독자들을 다음 작품으로 안내한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세계 40여 개국에서 번역,출판되었는데
특히 미국과 유럽 쪽은 ‘하루키 전집’이 발행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어,
그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이미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2005년 [뉴욕타임스]는 아시아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해변의 카프카』를 ‘올해의 책’에 선정했다.
또 2006년에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해럴드 핀터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바 있는 체코의 ‘프란츠카프카 상’을,
2009년에는 이스라엘 최고의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2011년에는 카탈루니아 국제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빵가게 재습격』, 『댄스 댄스 댄스』, 『태엽감는 새』, 『언더그라운드』, 『
스푸트니크의 연인』,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어둠의 저편』, 『도쿄기담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Q84』,『더 스크랩』,『중국행 슬로보트』,『이상한 도서관』 등
수많은 장·단편 소설, 번역물, 에세이, 평론, 여행기 등을 발표했다.
1981년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영화화 되었다.
2005년에는 이치가와 준 감독이 『토니 타키타니』를,
2010년에는 트란 안 훙 감독이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을 영화화 했다.
- 민음사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