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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474장)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2023.07.02.늘찬양교회
작사자는 아일랜드 런던데리 태생의 치과 의사이며 교회 음악가인 헨리 레이크 길모어(H.L.Glimour;1837-1920)로서 그는 어려서 선원이 되었으나 그가 탄 배가 필라델피아에 정박한 것을 계기로 선원 생활을 청산하고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치과 개업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 집에서 교회를 개척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성가대 지휘자로 명성을 떨쳤고 찬양대를 창설하여 40년 동안 피트먼그로브(Pitman Grove) 캠프전도집회에 나가 찬양을 하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복음 성가와 16권의 성가집을 펴냈습니다.
찬송 곡은 19세기 중반에 뉴저지와 펜실베니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죠지 D. 무어(G.D.Moore;19C)가 작곡하였습니다. 곡명「안식의 하늘나라」'THE HEAVEN OF REST' 는 길모어와 스웨니, 그리고 커크패트릭과 함께 발간한「희망찬 노래」'Sunlit Songs, 1890' 1에 처음 실렸습니다. 같은 해에 조지 엘더킨(George D. Elderkin)이 편집하여 매카비출판사(McCabe & Co.)에서 발행한「가장 좋은 밀」'The Finest of the Wheat: Hymns New and Old, 1890' 50장에도 실렸습니다. 특히 후렴 곡조가 절의 곡조를 반복하는 단조로움이 있었는데 호프만(Elisha A. Hoffma)이 발행한「베스트 찬송가」'Best Hymns, 1894' 69장에 보면 지금과 같은 곡조로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호프만이 편곡한 것 으로 보입니다.
1절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1절,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모르는 날 오라 부르시니 참 평안히 쉬겠네.
사람은 누구나가 걱정과 근심, 염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염려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염려”라고 말하면서 인간과 근심, 염려는 떨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노오만 빈센트필 박사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 중에 40%는 과거에 대한 것이며, 50%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것이며, 10%만이 현재를 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속적인 근심이요, 두 번째는 거룩한 근심입니다.
거룩한 근심이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근심은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나 거룩한 근심은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첫째, 근심은 죄가 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무려 300번 이상이나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 우리 앞길을 인도한다고 하셨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어 친히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은 전깃줄과 같습니다. 전깃줄을 코드에 꽂지 않는다면 아무리 스위치를 틀어도 텔레비전이나 냉장고가 전혀 작동이 안 됩니다. 의심 때문에 하나님의 코드에 믿음의 줄을 연결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근심은 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내일 500만 원의 빚을 갚아야 할 터인데 돈이 없어 밤이 맞도록 자지 못하고 근심한다고 합시다. 한 시간 근심하니까 100만이 생기고, 두 시간 근심하니까 200만 원이 생깁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근심한다고 할지라도 단, 돈 1000원도 안 생깁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 문제로 고민하며, 염려합니다.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결코, 근심, 염려, 자살이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근심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하반 절에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근심과 염려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생활하다 보면 쓰레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 만일 쓰레기를 집안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기승을 부릴 것이요, 온갖 병균들이 창궐하여 마침내 식구들이 병들거나 심한 경우에 죽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계속 마음속에 근심이나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그것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쓰레기 되어서 마침내는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심과 염려 대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고 했습니다. 근심 대신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찬송가 1절에서도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라며 주님께로 나올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고, 시 37편 5절에서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했으며, 시 55편 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근심할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 일행의 숙식비를 위해서 매일 천막을 제작해야 했고, 몸이 너무 약하여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거기다가 많은 반대자가 테러 이상의 행패를 부리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모든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절에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결박이 오든, 환난이 오든, 심지어 생명의 위험이 오든지 간에 주님께 다 맡겨버리고 오직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단호한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갈 때 가는 곳마다 기적과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절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2절, 쉬는 날 없이 곤고함 속에 헤매는 날 사랑하시니 곧 평안히 쉬겠네.
하나님은 6일까지 창조사역을 감당하시고 제 칠일에는 그 모든 일을 쉬시고 안식 하셨습니
다(창 2:2).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쉰 것처럼 쉼
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개념에 대해 낯설어합니다. 하나님께서 휴식이 필요한 육체
를 가지신 것도 아닌데 왜 일곱째 날에 쉬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을 스스로 선택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휴식과 일의 조화를 창조세계에 심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과 휴식의 리듬을 찾아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안식 안에는 우리를 배려하시는 하나
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휴식은 사치가 아닙니다. 내면의 성장과 영적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동차 왕 포드는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자는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휴식을 여가나 오락으로 대
체 시킨 것입니다. 여가나 오락은 육체에 초점이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영혼의 초점
을 주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안식은 단순한 일의 중단이 아닙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얻는 휴식은 마치 헝겊으로 만든 과자를 입안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개인의 성취욕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세상 성취욕에 사로잡히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되고, 경쟁심으로 인간관계를 망치며 일 중독에 빠져 육신을 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안식을 회복하여 주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듣게 될 때 주님의 은혜가 아침이슬처럼 우리 심령을 적시게 될 줄 믿습니다.
한 번은 열두 제자가 파송을 받고 각처에서 전도한 다음에 돌아와서 주님께 보고를 드렸을 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막 6:31)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동안 너무 많이 고생하여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럴만한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병든 자, 상처 입은 자들이 고침을 받고자 들끓었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하였다고 했습니다.
휴식은 육체노동 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도 필요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영원의 빛 안에서 살아가기에, 매사의 삶에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의 부단한 공격과, 죄와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자 하는 끊임없는 투쟁에서, 우리들의 영혼은 피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기만 하면 얼마 동안의 휴가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휴가가 올바르고, 유용하게 사용된다면, 우리는 영혼의 상처와 피로한 심신을 회복하고, 전보다 더욱 왕성한 기력으로 선한 싸움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라도 참된 쉼과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찬송가 2절에 기록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은혜의 말씀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님께 나가므로 참된 쉼과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건져 주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3절, 죄악 된 일이 많고 죽을 일 쌓였지만 주 날 건지시니 곧 평안히 쉬겠네.
한 고등학생이 부모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도 말이 안 통하고 어머니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 안 통해!” 그러고는 후딱 집을 나가더니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출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 세월이 흘러갑니다. 10년 세월 동안 자기 나름대로 출세해 보겠다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도 넣고, 철가방을 들고 배달도 하고,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 그렇게 해서 그럴듯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돈도 꽤 벌어서 10년 후에 부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착한 아이입니까? 아니요. 그 사이에 부모 속은 다 썩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이미 병상에 누운 지 오랜 세월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앞으로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살더라도 어쩌면 회복하지 못할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던 바로 그 삶이 가장 악한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인 교회를 떠나서 살았던 그 삶이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한 것입니다. 개도 주인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의 말씀 뒤에 그 대상자들의 모습이 2절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 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3절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의 특징은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치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천년만년 부귀영화가 이어질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육체의 욕망(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잘 다스리며 관리하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얻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아버지 품에서 살아가게 되는 영생을 선물로 얻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4절과 5절에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8절에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선물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 들이기만 하면 찬송가 3절의 가사에 기록된 것처럼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여있어도 주 예수님 날 건져 주시므로 곧 평안과 쉼과 안식을” 얻게 되는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귀한 쉼과 안식 그리고 평안을 날마다 주님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말씀 관주
1절
근심된 일이 많은 세상 *욥 5:7,14:1-2,시 90:10,요 16:20,고후 7:9-10
부르시는 주 예수 *마 11:28-30,행 2:38-40,엡 4:1-4,딤후 1:9
2절
날 사랑하신 주 *요 13:34-35,갈 2:20,엡 5:2,요일 4:20-21
주가 주신 평안 *시 4:8,요 14:27,엡 2:14-18,살후 3:16
3절
죄악이 많은 세상 *창 6:5-8,시 14:2-3,렘 4:22,롬 5:12
죽을 일밖에 없음 *시 55:15,롬 3:23,골 2:13-15,요일 3:14
날 건져주신 주 *사 53:6,고후 1:9-10,엡 2:4-7,벧전 2:24
<후 렴>
구원의 은혜 *사 12:2,행 4:12,16:31,고후 6:2,엡 2:5
영원한 안식 *사 40:11,요 14:27,히 4:9-10,계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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