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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재(北韓文化財)
평양시(平壤市)
을밀대 -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란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이 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현무문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현무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과 을밀봉 사이에 있어 평양성 북방 방위의 요충이었다
평양성 - 평양시 중구역 , 평천구역
고구려는 427년 보다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고구려는 지난 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잇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정릉사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정릉사 8각9층탑
보광전
정릉사는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을 옮겨올 때에 그 앞에 지은 절이다
오래 전에 허물어져 모습을 감추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찾아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발굴할 때 여기에서는 18채의 건물터와 10개의 회랑터, 1개의 탑터, 그리고 물도랑이 드러났다.
東明王陵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무관상 : 부분노, 부위염, 무골, 묵거
문관상 : 오이, 재사, 송양왕
제당(전실 높이 10m, 제실높이 13m
제당(전실 높이 10m,제실높이 13m)
이 능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5세기에 재축조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동명왕(고주몽, 혹은 추모)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에 능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는데, 뜻을 같이 했던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명왕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외적들을 물리치면서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고 있다.
대동문 -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947년 중건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개성시(開城市)
왕건왕릉 - 개성시 해선리
고려 태조 왕건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는
송악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 위에 자리잡고 있다
943년에 창건된 것을 1994년에 개건하였다
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는 고려시대 후기의, 길이 8.35m, 너비 3.36m인 석조 다리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다리는 1216년 이전에 건설되었고 건설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후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된 때부터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난간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가 있는데 난간이 있는 다리가 선죽교이다.
이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 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선죽교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로 전한다
숭양서원 - 개성시 선죽동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1573년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고려의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고려시대 말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 1573년에 고쳐지어 문충당이라 부르다가 1575년에 사액을 받아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양서원에서는 정몽주 외 16세기의 철학가인 화담 서경덕과 17세기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잠곡 김육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추모하여 제사하였다
범사정 - 개성시 박연리
범사정은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1700년에 세운 조선시기 건물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옆에 끼고 대흥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길 중턱에 있는 정자이다.
'중경지'에는 1700년에 이 건물을 세우고 옛 이름대로 현판을 달았다고 쓰여있다
박연폭포 - 개성시 박연리
개성시 중심으로부터 26km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에 끼어 계곡에 있고 높이는 35m이다.
폭포위에 박연이라고 불리는 직경 8m의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고모담이라고 불리우는 직경 40m의 용추의 물가에, 큰 '용암'이 수상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용추의 동쪽언덕에 범사정이라는 절이 있다
옛날 어느 만월밤 박진사라는 청년이 불고 있는 피리소리에 홀려서, 이 호수의 용녀가 그에게 반해 호수속으로 유인해가 버렸다
.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슬픈나머지 폭포밑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에 호수를 박연이라하고, 폭포밑 담을 고모담이라고 부른다고한다.
옛날부터 조선 3대폭포 중 하나이다
폭포는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져 왔다.
공민왕릉 - 개성시 해선리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1365년~1374년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왕릉이다.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운 쌍릉형식으로,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서쪽)과 왕비(노국 공주)의 무덤 정릉(동쪽)으로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직접 지휘하였다
고려성균관 - 개성시 방직동
고려성균관은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시대(992년)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1602~161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 개경(오늘의 개성)에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여기에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1298년에 성균감으로, 1308년에 성균관으로 고쳐졌다.
개성성 내성 - 개성시
개성성 내성은 고려 수도성인 개성나성 안의 일부 구간을 막아 쌓은 성이다.
축성 공사는 고려시대 말(1391)부터 조선시대 초(1394)까지 진행되었다.
후릉 -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
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쌍릉이다.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왕후가 1412년에 먼저 죽고
1420년에 정종이 죽어 이 능에 묻혔다.
황해도(黃海道)
해주 석빙고 -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해주 석빙고는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내부길이 28.3m, 내부 높이 4.5m인 석조 건축물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함경도(咸鏡道)
鏡城邑城 南門 - 함경북도 鏡城邑勝岩
南門正面
동쪽 성벽
경성읍성은 1107년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1437년에 토성의 일부 구간을 석성벽으로 고쳤고, 현재의 성은 1616년부터 1822년까지 6년 6개월에 걸쳐 요고형 성벽으로 쌓은 것이다.
이때 성문, 성가퀴, 해자, 못, 우물 등이 갖추어졌다
남문은 1756년에 무지개문(홍예문)으로 개축하였고, 1838년에는 남문루를 고치고, 그후 수성문 현판을 달았다
성벽의 높이는 9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 사방에 각각 한 개씩의 성문을 내어, 정문인 남문은 수성문이라 하고, 동문은 용성문, 서문은 호위문, 북문은 현무문이라 불렸으나 일제시대에 파괴되고 현재 남문 만 남아 있다.
또한 성가퀴 510개를 4m에 1개씩 배치하여 새로운 공성무기에 대처토록 하였고, 이 성가퀴에 멀리 쏘는 구멍과 가까이 쏘는 구멍을 내었다.
성 안에서는 54개의 우물자리와 12개의 못자리, 수구문자리 등이 확인되었다
성 둘레에는 너비 34m, 깊이 4.5m의 해자가 돌려져 있었다.
경성읍성은 우리나라 동북방어의 중진으로, 이 성을 중심으로 위성방어체계, 중간방어 체계, 전연방어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성의 독특한 축성형식은 수원성 등 후세의 성들에 계승된다.
鏡城邑 정북사 - 함경북도 鏡城邑 勝岩
윤관의 화상
비각 (元帥臺에서 이곳에 옮겨옴)
정북사는 조선시대 건물로, 1437년에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은 1901년에 중수된 것이다.
정북사는 12세기 초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고려의 동북국경지대를 지키는데 공로를 세운 윤관을 추모하는 사묘로 세종 19년(1437년)에 세웠다.
윤관은 당시 우리나라 동북 국경지대에 침입한 여진족을 정벌하고 그들의 촌락 135개를 평정하였으며, 납치되어 갔던 백성들을 찾아옴으로써 북방방위에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정북사에는 그 내력을 자세히 새긴 비가 있어 도움이 된다.
鏡城 鄕校 - 함경북도 鏡城邑勝岩
바깥문
바깥문 2층내부
대성전
서무
경성향교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勝岩山의 동쪽 기슭에 동해 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남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북사가 있고, 남동쪽 약 1km되는 곳에는 옛 邑城이 있다. 다른 향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물들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지 않게 파괴되어 지금은 바깥문, 대성전, 서무만이 남아 있다.
이 세 건물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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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文里24개돌유적 - 함경북도 鏡城郡會文里
함경북도 鏡城郡 會門里에 위치한 발해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회문리 소재지에서 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밭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돈화시 소재지 교외나 관지, 해청방, 요전자 등에서 알려진 24개 돌유적들과 같은 성격의 특수한 기념건축물터이다.
유적의 기단은 남북 19.2m, 동서 13.5m의 장방형으로 생겼으며, 높이는 1m 정도이다.
기단 위에는 한 줄에 8개씩, 세 줄의 주춧돌이 놓였다.
주춧돌이 놓인 부분은 남북 10m, 동서 7.8m이며,
주춧돌 열 사이의 거리는 3.9m이다.
현무암을 대충 다듬어 만든 주춧돌은 길이, 너비, 높이가 각각 70-90cm 정도이며, 땅 속에 30cm 가량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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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군복 - 함경북도 화대군
이 군장복은 조선시대(19세기 말)의 유물로, 구한말의 정치가 이용익 (李容翊, 1854~1907) (普成學院 設立者)이 입었던 군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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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성읍성 - 함경북도 온성군 종성
이 읍성은 두만강 연안의 방비를 한창 강화하던 시기인 15세기 중엽에 처음 쌓고, 17세기 초엽(1608년)에 줄여
중성을 쌓았으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
수항루는 종성읍성을 개축하던 시기에 두만강 건너에서 우리나라를 노리는 외부 침략자들에게 대비하기 위하여 지은 3층 누정이다.
기둥은 흘림형으로 부정형의 주춧돌에 받들려 있고, 두공은 없이 지은 집이다.
누정에서는 우리나라에 침입한 적장을 잡아다가 항복을 받아낸 일이 있다.
그리하여 누정을 '수항루'라 부르게 되었다.
화성쌍계사 -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애월루
대웅전 두공렬과 처마
화성 쌍계사는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백록산에 있는 1684년의 조선시기 사찰이다.
쌍계사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북관지'에도 그 이름이 나오며, 대웅전 마루도리에서 나온 글에 1395년에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조선 초기의 절임이 확실하다.
현존 건물은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1684년에 지은 것이다.
개심사 - 함경북도 명천군 보촌리
개심사는 826년에 창건하고 1784년에 재건한 조선시대 사찰로, 함경북도 명천군 보촌리 칠보산에 자리하고 있다.
개심사는 "함북금강"으로 불리는 칠보산의 내칠보에서도 경치 좋기로 이름난 개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의해 이 사찰이 826년 대원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그후 1853년에 또한 대대적으로 재보수되었다.
함흥성 -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함흥성은 고려시기 북관을 개척하고 설치한 9개 성의 하나로서 1108년에 축성한 것이다
함흥 선화당 -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함흥 선화당은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에 있는 1416년의 조선시기 건물로 1764년에 재건한 함경도 관찰사(감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지방관청(감영)의 기본건물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매 도에 관찰사의 행정기관인 감영을, 그 아래 단위에는
원(부윤, 목사, 군수, 현령)들의 행정기관인 아사를 설치하였다.
함흥은 국방상 중요한 고장이었던 까닭에 역대 왕조에서 중요시하였다.
고려에서는 1108년 여기에 함주대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그 후 도호부를 폐지하였다가 1369년에 함주목으로 급을 높였다.
조선에서는 1416년에 종전의 영길도를 함길도로 고치면서 도 소재지를 영흥(금야)으로부터 함흥으로 옮기였으며, 그 때 관찰사 본영인 감영 건물들을 지었다.
평안도(平安道)
보현사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대웅전
만세루
기묘하고 수려하기로 이름 높은 묘향산에는 우리나라 5대 절의 하나인 보현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묘향산 보현사는 조선시대 중기에서 후기의 사찰로, 1042년에 창건한 것을 재건한 것이다.
보현사는 빼어난 주변경관과 함께 임진왜란때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사적이 있어 이름이 높은 곳이다.
1216년, 1634년, 1761년의 큰 화재를 맞는 등 여러 차례의 재난으로 보수와 중건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보현사에서 가장 뛰어난 건물은 대웅전(원래는 보광전)으로 1765년에 중창되었고, 묘향산 보현사 8만대장경의 보존고있어 불교도서관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만세루는 지난 6.25전쟁시기 폭격에 의하여 대웅전과 함께 불타 버렸으나, 1979년 대웅전과 함께 만세루는 옛 모습을 다시 갖췄다
안국사 -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이 건물은 1419년에 다시 지었고, 1594년과 1654년, 그리고 1785년에 각각 고쳐 지었다
백상루 - 평안북도 안주읍
백상루는 안주읍성 서북쪽에 서있는 장대이다.
안주는 고구려 때의 석성이다.
고려때 처음 세워진 백상루는 조선시기 1753년 읍성의 면모가 완성되면서 고쳐 지어지고, 관서8경의 하나로 "관서제일루"라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내려왔다.
백상루란 여기서 백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다 볼 수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충사 - 평안북도 피현군 성하리
현충사는 평안북도 피현군 성하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1708년에 건립하였다.
현충사는 백마산성을 거점으로 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공을 세운 고려시기의 강감찬 장군과 조선시기의 임경업 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의 애국명장들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이 산성의 내성 안에 세운 사당이다.
임경업 장군(1594-1646)은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즐겨 하는 한편 말타기와 활쏘기를 꾸준히 하여 무술을 익혔다.
그는 압록강 이북 정세에 대처하여 '2만 명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백마산성을 비롯한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수축하여
튼튼한 방어요새로 꾸몄다.
그리하여 1636년 12월 우리나라에 침입한 청나라 침략군은 이 성에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멀리 되돌아 갔던 것이다
통군정 - 평안북도 의주군 주읍 의주읍성
통군정은 의주성의 북쪽 장대로 세워진 누정이다.
통군정은 의주성에서 제일 높은 북쪽 삼각산 봉우리에 위치하여 그 밑의 압록강과 근방 일대를 내다보며 군사 지휘를 하기 좋게 되어 있다.
이 일대는 경치가 수려하여 관서8경의 하나로 통군정을 일러왔다
양화사 - 평안북도 태천군 상단리
양화사는 평안북도 태천군 상단리 향적산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에서 후기의 사찰로 872년에 창건된 절이다.
이 절은 서북지방에서 묘향산의 보현사에 이은 큰 절이다.
보국사라고도 부른다.
『양화사사적기』에서 그 창건연대를 872년으로 전하고 있어 발해시대의 절로 추정된다.
수충사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수충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건물로 지금의 모습은 1794년에 건립된 것이다.
수충사는 서산대사를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서산대사(1520~1604, 이름은 휴정, 호는 서산, 자는 청허)는 안주에서 태어나 18살에 승려가 되었다.
30대에 이미 선종의 승려학자로 이름을 얻었다.
1592년에 일본 침략에 의병투쟁으로 맞설 것을 승려들에게 호소하여 승병을 모았다.
당시 서산대사는 73살의 고령이었으나 직접 순안 법흥사에서 1,500여 명의 승병을 조직하여, 8도16종도총섭(총대장)으로 투쟁을 지휘한다
구주성 - 평안북도 구성시
구주성(구성)은 구성시 북쪽 이구산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쌓은 석성이다.
성은 994년에 축조되어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지켰던 성이다.
구주성에서의 전승업적으로 꼽힐 만한 것으로, 1011년 1월과 1019년 2월 거란 침략에 대항한 구주대승리, 1231년 몽골의 제1차 침략에 대한 5개월간에 걸친 구주성전투 등을 들 수 있다.
구성읍성 남문 -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은 고구려시대에 만년군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성을 쌓고 구주라 불리웠다.
그후 정원대도호부, 정주목이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정주목을 갈0라 구성군이 설치되었다.
구성읍성 남문은 구성읍성의 정남문이다.
994년에 처음 세운 것을 1836년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폭격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1979년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실학자의 대표격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름정약용(丁若鏞)출생1762년(영조 38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사망1836년(헌종 2년) 4월 7일(향년 73세),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본가본관나주 정씨(丁)직업학자, 정치인
다산시문집 제12권 / 서(序)
부령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로 부임하는 이종영(李鍾英)을 전송하는 서
[DCI]ITKC_BT_1260A_0120_070_0110_2000_005_XML DCI복사 URL복사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네 가지 두려워할 것이 있으니,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하고 위로는 대간(臺諫)을 두려워하고 더 위로는 조정을 두려워하고 더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목민관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상 대간과 조정뿐이고, 백성과 하늘은 때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간과 조정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먼 경우에는 천 리나 되고, 더욱 먼 경우에는 수천 리나 되니, 이목(耳目)으로 살피는 것이 혹 두루 상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성과 하늘은 바로 앞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임하고 몸으로 거느리고 호흡(呼吸)을 함께 하고 있으니, 그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가장 밀접한 것은 이 백성과 하늘인 것이다. 무릇 도를 아는 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부령부(富寧府)는 마천령(摩天嶺) 북쪽에 있으니 나라의 변방이다. 남쪽으로 포정사(布政司 조선 시대 감사가 집무하던 관청)가 천 리나 떨어져 있고 더 남쪽으로 서울이 2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겹겹이 싸인 산과 감돌아 흐르는 시내가 있어 지세가 막혀 험하다. 그래서 염찰사(廉察使)의 염탐은 소루함이 많고, 헌사(憲司)의 규핵(糾覈) 또한 너무 멀어서 미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이 부(府)를 다스리는 수령은 방자하고 마구 탐욕을 부려 법을 따르지 않고 오직 삼(蔘)ㆍ초피(貂皮)ㆍ수달피[獺皮]ㆍ청서피(靑鼠皮)ㆍ발내포(盋內布 사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고운 베) 등만 토색하고 착취해다가, 처자(妻子)나 돌보고 권귀(權貴)에게 아첨한다.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백성은 모두 하늘에 죄 없음을 호소하건만, 오직 수령은 어두워서 네 가지 두려워할 것[四畏]을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성은 더욱 쇠잔해지고 부(府)는 더욱 피폐해지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의 벗 약암(約菴)의 아들 이군 종영(李君鍾英)이 부령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가 되어 부임하는데, 내가 시골에 있어서 친히 전송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백성을 두려워하고[畏民] 하늘을 두려워하는[畏天] 설로 그대를 위해 설명하려 하니 들어주겠는가.
부세(賦稅)가 고르지 않으면 백성은 원망하고, 부세가 아무리 고르더라도 그 힘이 미치지 못하면 백성은 원망하며,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고 창고에 곡식을 받아들일 적에 그 이익을 도둑질하면 백성은 곧 원망하고, 기거(起居)가 태만하고 술과 음악과 여색에 빠지면 백성은 원망하며, 은택을 베풀지 않고 형벌을 함부로 행하면 백성은 곧 원망하고, 뇌물을 받고 송사(訟事)를 부정하게 처결하면 백성은 원망하며, 무릇 삼(蔘)ㆍ돈피ㆍ수달피[獺皮]ㆍ청서피(靑鼠皮)ㆍ발내포(盋內布)를 때로 기회를 타서 훔치면 백성은 원망한다. 대체로 백성이 원망하는 것은 하늘도 원망하며, 하늘이 원망하는 경우에는 원대한 복이 내리지도 않고 벼슬도 현달하지 못하게 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호부사(都護府使)는 힘쓸지어다.
의(義)로써 겉을 바르게 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고, 경(敬)으로써 마음 곧게 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나는 또한 두려워한다. 네 가지 두려움이 구비된 뒤에야 목민관의 일이 완수되는 것이니, 내가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부령은 본디 북옥저(北沃沮)의 땅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에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였고, 고구려 태무신왕(太武神王)이 이를 취하여 자기 땅으로 삼았으며, 발해(渤海) 때에는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에 속하였다. 금(金) 나라 때에는 문수(門水) 이남을 옮겨 모두 내지(內地)로 삼았는데, 부령은 야라로(耶懶路)에 속하였다. 고려 강종(康宗) 때에 석적환(石適歡)이 갈라전(曷懶甸) 지금의 함흥(咸興). 과 알새(斡塞)를 순행(巡行)하고, 삼잔수(三潺水) 지금의 삼수(三水). 에 부(府)를 설립하였으니, 이 일을 증험할 수 있다. 이때 고려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였다가 곧 되돌려 주었다. 원(元) 나라 때에는 합란로(合蘭路)에 속하였으며, 우리 조선 초기에는 태조께서 영토를 개척하여 공주(孔州)ㆍ경성(鏡城) 등 7군을 두었는데, 부령은 경성군에 속하여 석막(石幕)의 땅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태종이 소다로(蘇多老) 땅에 경원부(慶源府)를 두었는데 그 뒤에 한흥부(韓興富)가 전사하고 곽승우(郭承祐)가 패전하였는데도 조정에서는 그래도 차마 그 땅을 버리지 못하여 부거참(富居站)에 책문(柵門)을 설치하였으니, 아마 간목하(幹木河)를 경계로 삼으려는 것이었으리라.
영릉(英陵 세종의 능, 즉 세종을 가리킴) 때에는 김종서(金宗瑞)가 간목하 연변을 개척하여 비로소 석막의 옛 땅에 영북진(寧北鎭)을 두었다가, 말년에 와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여 부령이라 부르고 육진(六鎭)의 하나로 삼았다. 목릉(穆陵 선조의 능, 즉 선조를 가리킴) 때에는 야인(野人) 마토(摩吐)가 귀화(歸化)하자 비로소 무산부(茂山府)를 두어 간목하 연변 육진의 하나로 삼았다. 부령은 하찮은 변읍(邊邑)으로 불리었지만, 그곳을 잘 다스린 사람은 승진시켜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니, 이는 전조(銓曹)의 격례(格例)이다.
도호부사는 그 부에 이르러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를 고증하고 열람해 보아야 한다. 만일 엉성하고 잘못된 것이 있거든 이와 같이 바로잡는 것도 목민관이 힘써야 할 일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