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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완득이
연도 : 2011
국가 : 한국
감독 : 이 한
배우 : 김윤석(동주선생 역), 유아인(완득이 역), 박수영(아버지 역), 이 쟈스민(엄마 역)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란 완득이가 본 세상은 자기 키만한 곱사등의 아버지와 그 아비가 밥줄을 위해 몸을 부렸던 춤이다. 어린시절 녀석의 놀이터는 서울 주변부 변두리의 한물 간 캬바레였다. 그리고 친구는 반짝이 옷을 입고 냅다 스탭을 밟아대는 곱추 아비와 그의 수제자인 지적 장애자이자 피 한방울 안섞인 민구 삼촌이다. 이들은 친구이고 하늘과 가까운 달동네,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옥탑방에서 살을 부비며 사는 가족이다. 가난 때문에 필리핀 어미마저도 떠난 해체된 가족이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정부 수급품 햇반을 챙겨 먹는 배고픈 가족이다. 가난을 달고 사는 가족이다.
신자유주의 세상에 있어서 가난은 더 이상 이상한 나라의 괴물이 아니다. 새마을 종소리와 녹슨 확성기에서 터져나오는 파찰음 가락이 어스름을 뚫으며 횃닭을 깨우고, 도도한 녹색 깃발의 펄럭임에 결연한 의지의 팔뚝을 불태웠던 유신시대, 그 동토에다 땀방울을 심었던 '가난 박멸'의 시절 때나 가난이 죄였다.
세기말을 훌쩍 넘어 금융 쓰나미를 두 번이나 겪은 지금, 가난은 더 이상 죄도, 경멸과 타부의 대상도, 부끄러움도, 청소년 가출의 필요조건도 아니다. 가난은 이제 전 인류적으로 친숙한 벗이자 이웃이 되었으므로 더불어 사는 동반자로 여길 일이다.
2009년 통계청은 국민평균 월소득이 150만원이고, 2012년에는 (잔업, 특근에 년월차 반납하고) 월수 200만원 미만인 사람들이 56%라고 한다. 비정규직이 56% 이고 자영업자의 월소득이 150만원이 안되는 세상이라고 한다. 국민 1인당 빚이 750만원 정도이고 이자만도 110만원씩 내야한다고 한다. 뭣 빠지게 일한들 가난의 악순환과 그 늪에서 빠져 나오는 건 하늘의 별따기이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일이다.
최근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위대한 숫자 이면에는 상위 5%가 나머지 하위 95%들에게 베푸는 너그러운 통계적 환상이 있다는 씁쓸한 맛을 분명히 알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이미 글로벌화된 보편성이다. 자본은 넘어선 거대 자본의 금융 논리가 전 세계에 강물처럼 넘쳐 흐르고 있으니까.
이렇게 가난은 한국 사회를 넘어 국제적, 전 인류적 문제이며 그 배후에는 금융자본주의가 있다. 자수성가? 그건 70년대나 가능한 일이다. 무한 증식의 자본축적과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깃발이 전 인류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교육의 불평등은 이미 벗어날 수 없는 늪이 되었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아등바등 핏똥싸며 싸워도 승자독식의 사회체제와 그 권력자들은 이 달콤하고 매혹적인 밥그릇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한편 창조적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4.0이라는 이 멋진 신세계의 비전을 떠드는 자들은 진정 누구인가? 매년초 세계 각 국 상위 5%들만 모여 세계 금융시장을 안정되게 유지, 독식하자는 그들만의 축제 다보스 포럼에서, 2008년 미국 상위 5%의 빌 게이츠가 열창한 노래가 창조적 자본주의이다. (참고로 똑똑하고 착한?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가 만든 '재단은 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마비 등 각종 백신의 연구개발에 그동안 2억 180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질병 퇴치에 앞장서고 있지만 4억 2300만 달러를 액슨모빌과 셰브론, 로열 더치 셸과 같은 석유회사 등 각종 공해배출 산업에 투자해 이득을 취하고 있다. 또 코노코필립스, 다우케이칼, 타이코인터내셔널 등 미국과 캐나다의 최대 공해물질 배출회사와 환자들이 살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에이즈 약을 고가로 책정하는 제약회사들에도 투자하고 있다.' - 2007년 1월 7일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또한 이에 동조해 부자세를 더 내야한다고 목에 핏대 세우고, 부자들 한테 기부금을 걷기 위해 낡은 구두를 끌며 햄버거로 끼니를 떼우는 지혜로운? 현인 워렌 버핏이 그러하다. 그리고 서양의 새로운 경제 이론을 숭배하고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한국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언론재벌과 그에 결탁한 학자들이 새로운 돌파구로 찬양하는 것이 자본주의 4.0이다.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하는 창조적 자본주의가, 승자의 양보와 그들이 쥐고 있는 국가 권력의 조정 하에 상생과 공생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대체 패러다임으로써의 자본주의 4.0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혹여 하위 95%를 위한 떡고물은 아닌지?
월가를 점령하지 말고, 폭동을 일으키지 말고, 깃발 들지 말고, 촛불 켜지 말라는, 그런 건 하위 95%나 하는 거라는 썩은 미소를 머금은 불안한 리액션이 아닌지? 혹은 쥐죽은 듯이 살라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해준다는, (내) 밥상 엎지 말라는, 까불지 말라는 준엄하고 친절한 선전포고는 아닌지?
좋다. 떡고물이든, 선전포고든, 상생의 하모니든. 그런 걸 떠드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뿐, 서민들은, 가난을 정서적 공감대로 절실히 느끼고 있는 이 땅의 95% 백성들은, 아니 전세계의 95% 무리들은 그딴 게 별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하루 하루가 버겁고, 치열하고, 처절하고, 고단하므로.
가난은 더 이상 개인의 노력이나, 로또 당첨 같은 운이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이제 엄연히 사회 구조적 문제가 되었고 거대 담론으로 확립되었다. 가난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게을러서, 내가 못 배워서, 내가 못났기 때문이 아니다. 하루 8시간 열심히 주5일간 일해도 법적으로 88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코피 쏟아가며 서울대에 들어가고 또 죽어라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받아도 4명 중 1명은 백수이기 때문이다.
가난...그 놈 참 어렵다! 힘들다!
암튼 그렇다 치고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부자를 꿈꾸지 않는다. 가난을 먹으며 산다. 불편하고 모자라지만 가난을 먹고 희망을 키운다. 또한 이 영화는 관계의 소중함과 그것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순수하고 바른 의도를 갖고 사람을 대할 때 관계는 건전하고 희망을 품으며 나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서로에게 딴지걸고, 볼멘소리하고, 마뜩쟎게 쳐다봐도 동주와 완득이라는 사제지간의 의리와 믿음과 사랑은 순도 100%이다. 그래서 완득이와 동주 선생의 관계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를 위한 철옹성이며 용광로 만큼 뜨겁다.
또한 말등인 완득이와 일등인 윤아와의 풋풋한 로맨스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고 우리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와 연인이라는 외줄을 타고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옥신각신하는 장면들은 우리의 가슴을 살랑살랑 간지럽힌다. 때묻지 않은 청춘남녀의 사랑에서 사과향이 난다.
완득이는 쪽팔리고, 배고프고, 가난해도 캔디처럼 울지않고 하니처럼 달린다. 까무잡잡한 필리핀 어미가 말한대로 완득이는 고맙도록 잘 자라 있다. 그리고 그는 등은 굽었지만 춤을 예술이라고 믿는 마음 착한 아비와 그 착한 마음 때문에 결혼한 어미와 항상 완득이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민구 삼촌이 있다. 그래서 완득이는 외로워도 슬퍼도 하루 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친구없이 언제나 혼자 다니는 완득이는 이 시대 가난하고 평범한 고딩의 아이콘이다. 교실 뒷자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엎어져 잠이나 자든지, 먼 산만 멍때리고 보든지, 쪼다같은 놈들을 한 방으로 눈알깔게 한다는지, 마음에 드는 여학생 때문에 밤마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든지, 야자(야간자율학습) 땡까기는 필수라든지, 괴롭고 힘들어 가출을 꿈꿔도 불쌍한 아비 때문에 눈물을 삼키는 완득이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질풍노도와 혼돈의 시기를 온 몸으로 뚫으며 나아가는 완득이의 모습은 우리 과거의 청춘이자 현재 청소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완득이와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미워할 수 없는 멘토는 뭐니뭐니 해도 건달같은 괴짜 담임인 동주이리라. 겉으로만 불량학생이고 학급 주먹 넘버원인 완득이를 속 깊게 위하는 인물이 동주 아닌가?
맨날 "얌마, 도완득!"이라고 부르며 갈구는, '얌마'라는 호를 완득이에게 달아준 동주. 사랑의 매를 야무지게 날리고 B급 언어를 융단폭격처럼 쏟아붓는는 동주. 화장실에서 남의 불알이나 힐끔거리고, 이웃집 여류 무협작가의 속살이나 훔쳐본는 응큼한 동주. 남의 집 식량이 제 것인 양 햇반이나 던지라고 호령하는 동주. 얻어먹는 주제에 흑미 햇반에 호박죽 타령이나 하는 동주. 완득이네 집에서 제자와 맥주 그라스에다 소주나 까는 동주. 완득이와 싸우고 욕하고 얻어터져 갈비뼈가 부러져도 암퍅한 성질머리를 꼿꼿이 세우는 동주. 생면부지의 엄마가 필리핀 불법이주 노동자임을 알려주고, 은근짜 만나게 해주면서 사람 복장 후벼파는 동주. 집안 일과 킥복싱 훈련이 있을 때마다 야자(동주는 '야간자율학습'을 '야간강제자율학습'이라 부른다.)를 빼주는 대가로 뭐 해줄거냐며 조건 거는 동주. 말이 선생이지 깡패에 가깝고 개차반 같은 왈패인 동주. 완득이의 철천지 원수인 동주. 완득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어주기만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인물이 동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미 물씬 넘치고 사람 사는 법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 시대 진짜 선생이 동주 아닌가?
시험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것만 가르치고, 막스와 베버를 비교하며 생산수단의 사유화로 인한 불평등을 말로만 떠들지 않는 동주. 그는 가난이나 불평등과는 거리가 먼 자본가 집안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 재산 물려받고 호의호식하며 살아도 되는 인물이면서도 굳이 왜 박봉의 선생 노릇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쪽방촌 옥탑방에 혼자 살며 불법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일까?
불법이주 노동자들의 피땀을 착취하고, 재해를 입어도 치료는 고사하고 강제출국을 시키는 고약한 아버지에 대한 환멸의 저항일까?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하고푼 자식된 도리로써의 효심일까? 아니면 그 역시도 완득이 처럼, 완득이 아버지와 엄마처럼, 옆집 사는 실존주의 무협작가 월홍과 그녀의 정신나간 욕쟁이 오빠처럼 마음만은 착한 순둥이일까?
암튼 투박한 남자 동주의 삶의 방식은 팍팍하고 매정하게 살아가는 우리네에게 날 것의 인간애를 느끼게 해준다. 완득이 역시 그런 동주 선생이 100% 싫지만은 않지만 그렇다고 내색은 결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다. 겉만 거칠거나 거친 척하고 속은 여리고 무른 인간형이랄까?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완득이와 동주는 그래서 닮은 꼴이다.
한편 동주의 인간애는 개인 개인의 디딤돌을 넘어 공동체의 주춧돌로 승화한다. 완득이가 개인의 질곡을 이겨나아가는 희망 버스라면, 동주는 집단의 아픔을 다독이고 어루만지는 사랑의 유람선이다.
동주는 재산을 털어 교회를 인수하고 그 교회에 다문화센터를 만든다. 지역과 이웃을 위한 나눔터를 마련하고 재능기부의 십시일반을 모아 희망과 사랑의 씨앗을 심는다. 이런 동주를 보면서, 더불어 나누는 이들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의 가슴은 이내 정화가 된다.
감상하는 내내 가슴이 축축해지고 깊은 날숨과 함께 영혼이 맑아지는 이 영화의 치유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씬들이 감독의 세심한 연출력 속에 적절히 버무려져 있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완득이가 자신을 버린 엄마의 낡아빠진 신발을 보고 시장통에서 싸구려 구두를 사주는 장면은 가희 심장에 맷돌을 올려놓는 감동이다. 그리고 버스 터미널 의자에 앉아 아들이 사준 검정 구두에 먼지라도 묻을 새라 닦고 또 닦는 엄마의 심정을 느끼는 대목에선 다듬잇돌이 더해지는 심정이 된다. 이어서 그런 아들에게 잘 커줘서 고맙다며, 안아봐도 돼냐며 함께 포옹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집채만한 바위가 또 얹어진다. 숨이 막힐 지경이고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찢어질 듯한 최대의 힐링 포인트이다.
힐링 포인튼 또 있다. 라면은 친한 사람과 먹는 거라며 학급 넘버투에게 핀잔을 줬던 완득이가 옥탑방에서 낯선 엄마를 위해 라면을 끓이고, 김치 쪼가리 하나 없는 밥상머리에서 함께 나눠먹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의 촌철살인은 짧은 대사이다.
완득 : (엄마에게 라면을 떠주며) 김치는 없어요.
엄마 : (측은하게 말없이 바라만 보다가).......매일 이렇게 먹어요.?
완득 : (라면을 먹으며 애써 가볍게 웃으며) 저 라면 좋아해요.
그렇다. 엄마만 있다면,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자신을 버렸더라도, 언젠가 돌아와 늦은 밥상머리에 마주 앉을 수 있다면, 어색하고 밉고 야속한 엄마라도 금방 친한 사람이 돼서 함께 김나는 라면을 먹을 수 있으리라.
라면을 주식 삼는 완득이를 위해 조용히 도시락을 갖다놓고 가는 엄마의 따스함도 빼 놓을 수 없는 힐링 포인트 중 하나이다. 아버지 입맛처럼 완득이도 짜게 먹을 거란 엄마의 짐작으로 반찬을 짜게 만들지만 그 짐작은 아들을 위한 배려이자 사랑임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랑의 도시락과 함께 아들에게 구하는 용서의 편지는 짧지만 절절하다. 잘못했다는, 결코 잊지 않았다는 회한의 눈물이 뚝뚝 묻어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완득이의 대답은 나지막한 톤으로 음식이 좀 짜다는 게 전부다.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라는, 잊지 않은 것만도 고맙다는, 이제 만났으니 다 괜찮다는 말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구차하지 않은 데 있다. 구구절절히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리얼하다. 가족끼리 무슨 일이 벌어지면 시시콜콜 뭐가 어땠네 저땠네 하면서 일장 떠들어대지 않기 때문이다. 눈빛으로, 한 두 마디로 통하지 않는가? 그게 속살 보며 산 가족이 아닌가 말이다.
이렇듯 압축과 생략으로 사실적 공감대를 구축하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살아있는 연기가 곳곳에 살아있다. 그래서 감동의 물결이 일고 우리는 그 물결에 무장해제 당하는 정화의 기쁨을 얻기에 충분하다.
내 곁에 누군가 있다면, 나의 버팀목이 있다면 당당해진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저절로 자신감이 생기고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해체된 가족이 다시 관계의 끈을 잇게 될 때 구성원들은 힘이 생긴다. 완득이네 가족이 다시 힘이 생기는 장면 역시 중요한 힐링 포인트이다.
엄마에게 구두를 사주는 장면에서 조선족 점원이 이상한 눈초리로 둘과의 관계를 의뭉하게 흘려 말할 때 당당히 '어머니예요!'라고 말하는 완득이를 볼 수 있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투가 남달라도 떳떳하고 자신있게 자기 어머니라고 말하는 대목은 훌쩍 큰 완득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다음은 완득이를 통해 아내와 재회한 아빠가 아내가 일하는 식당에 찾아왔을 때이다. 식당 종업원이 식사하고 있는 완득이 아빠를 보고 '지금도 저런 곱추가 있네.'라며 놀림반 딱함반으로 말했을 때 '내 남편이예요!'라고 말하는 엄마의 모습이 또한 그렇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가 완득이의 등에 엎혀 집으로 갈 때, '멋있는 아들, 멋있는 아들'하며 궁시렁대는 장면이 그렇고, 손바닥만한 방구석에서 동네사람들이 모여 삼계탕 파티할 때, '노계는 씹을 수록 맛이 난다.'는 장면이 또한 그렇다. 사실 폐닭인 노계는 값이 싸고, 여럿이 먹을려면 어쩔 수 없고, 그렇다고 면구스런 내색은 하고 싶지 않고, 생색은 내고 싶은 가장의 당당함 또한 그렇다.
가난은 혼자 있을 때 더 비참해지지만 더불어 있을 때는 힘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열악하고 부적응적 환경에서 자라도 자녀를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건강하게 자란다는 카우아이 섬 연구가 있다.
50년대부터 40여 년 동안 하와이 제도의 카우아이 섬에 사는 극빈자, 별거, 이혼 등 사회부적응 환경에서 자란 자녀를 추적 조사를 했는데, 그 중 1/3이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물론 2/3는 룸펜으로 살아갔지만. 암튼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인을 조사해보니 편모나 편부든, 할머니나 할아버지든, 또는 친구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잘 살아 갔다는 연구 결과이다.
이 연구 결과처럼 완득이에게도 사랑과 관심의 물꼬를 터주는 인간들이 있다. 가족은 물론이고 애증관계로 똘똘뭉친 동주 선생. 대가리는 1등급이지만 싸가지가 바가지인, 킥복싱 매니저를 자처하는 같은 반 여자 친구 윤하. 가난한 교회에 얹혀 사는 불법이주 노동자 핫산. 무식하게 훈련시키는 킥복싱 도장의 사부. 그리고 겉으론 껄렁해도 마음만은 착하고 효심깊은 또 다른 내면 자아의 완득이가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가난, 장애인, 이주 결혼 여성, 결손 및 다문화 가정, 외국인 이주노동자, 공교육 현실 등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밝고, 경쾌하고, 착하게 풀고 있어서 보낸 내내 가슴이 훈훈해진다. 가난을 벗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하지만 뚜벅뿌벅 걸어가는 모습이 우리네 삶을 닮아 있다. 이 영화에서의 가난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가난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진솔한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훈훈하게 가슴이 먹먹해지고 나와 우리, 그리고 심신이 고단하고 가난한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완득이. 우리를 지혜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나침반 완득이. 보양제이자 원기회복제 완득이. 우리 모두 가슴 속에 완득이 하나 키우며 살자!
가난한 사람끼리의 삶은 닮음을 너머 동체이고 피보다 진하다.
사이토 다카시는 그의 책 <가난의 힘>에서 말한다. 가난의 경험을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힘을 기르자고. 바로 완득이를 보고 한 말인 것 같다. 순간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가 떠오른다.
해 저문 어느 오후
집으로 향한 걸음 뒤에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그리 좋진 않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녔어
석양도 없는 저녁
내일 하루도 흐리겠지
힘든 일도 있지
드넓은 세상 살다보면
하지만 앞으로 나가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내일은 더 낫겠지
그런 작은 희망 하나로
사랑할 수 있다면
힘든 일년도 버틸거야
일어나 앞으로 나가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살아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고개 들어 하늘을 봐
창공을 가르는 새들
너에 어깨에 잠자고 있는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라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 힐링 포인트
1. 시골 장터를 떠도는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신문 배달로 번 돈으로 엄마에게 구 두를 사주는 장면
그리고 이어서 버스 터미널 대합실에서 포옹하는 장면
2. 완득이가 옥탑방에서 낯선 엄마를 위해 라면을 끓이고, 김치 쪼가리 하나 없는 밥상머리 에서 함께 나눠먹는 장면
3. 완득이가 거나하게 취한 채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를 업고 비탈길을 오르는 장면
4. 완득이가 상대 킥복싱 선수한테 맞고 정신을 잃은 뒤 깨어나 허탈하게 웃는 장면
5. 완득이에게 수급품을 타가라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던지는 동주의 말
"가난한 게 족팔린 게 아니라 굶어 죽는 게 쪽팔린 거다."
* 덤으로 볼 추천 영화
파수꾼, 바람, 눈물, 돼지의 왕, 시간을 달리는 소녀, 키즈 리턴,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참새들의 합창,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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