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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知其眞(도지기진)
都:모두(도읍) 도, 知:알지, 其:그 기, 眞:참 진.
어의: 누구나 일고 있는 그것이 진리이다. 즉 진리는 평범한 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세수를 할 때 코를 만지
는 것만큼 쉽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다.
문헌: 선운사(禪雲寺) 주지승전승(住持僧傳承)
주지(住持)스님에게 한 불자(佛子)가 찾아와 물었다.
“진리(眞理)란 도대체 뭡니까?”
“자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그게 무슨 소린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스님은 눈을 감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으음! 진리는 말로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유된 인식과 외계의 존재, 혹은 현실이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는 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지. 그러나 자네가 그토록 간절히 청하니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하겠네.
딸만 셋을 둔 홀어머니가 있었다네. 모녀는 늘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사정이 통하게 되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심정이 통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지 툭 터놓고 서슴없이 나누는 아주 돈독한 모녀(母女) 사이였던 게야.
그러던 어느 해에 딸의 나이가 차 시집을 가게 되자 어머니가 딸을 앉혀놓고 다짐을 했어.
‘시집을 가거든 무슨 일이든지 기탄없이 이 에미에게 말해야 한다.’
‘예, 아무렴요. 어머니께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그 후 딸이 혼인을 하여 사위와 함께 신행을 왔는데 어머니가 딸을 골방에 불러 놓고 물었다네.
‘얘야, 첫날밤을 치르는데 남편이 어떻게 했는지 말해 주렴.’
그러자 딸이 약속한대로 대답했다네.
‘맨 처음 머리에 쓴 족두리와 비녀를 빼고…….‘
‘그다음은?’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다음은?’
‘치마끈을 풀고…….‘
‘그 다음은?’
‘남편과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요.’
‘다음은?’
‘그리고 남편이…… 에이 어머니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거야, 어머니도 더 이상은 물을 수 없는 처지라 마찬가지고……. 그 어머니는 새 딸을 두었는데 똑같이 이 대목에서 말을 맺곤 했다네. 진리란 바로 이와 같은 거라네. 말할 필요가 없고,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都知. 도지), 그런 거 말일세(其眞.기진)_.”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圖版女儿(도판여인)
圖:그림 도, 版:널 판, 女:여자 여, 儿:어진사람 인.
어의: 지도를 그리는 여인(女儿)이라는 말로, 조선 말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의 딸을 이르는 말이다. 효성이
지극한 딸, 또는 어떤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딸을 뜻한다.
문헌: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 한국의 인간상(人間像)
조선 말의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4)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기 위해 30여 년간 조선 팔도를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1861년, 마침내 <대동여지도>2집을 완성했다. 또 <여지승람(與地勝覽)>의 잘못된 곳을 정정하기 위하여 32권 15책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했으며, <지구도(地球圖)>도 제작했다.
김정호의 이런 업적 뒤에는 지도를 그리고 판각을 하면서 그와 함께 고생을 한 딸의 효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정호가 최초로 지도를 보게 된 것은 같은 서당에 다니던 친구 김용희로부터 읍도(邑圖)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야, 이거 정말 신기하구나, 이것만 있으면 이 마을 전체를 앉아서 꿰뚫어 볼 수 있잖아.”
지도에는 산과 내, 그리고 마을의 위치와 가구 수가 적혀 있었다.
김정호는 지도를 들고 현장을 답사해 보았다. 그러나 강 왼쪽에 있다는 산이 오른쪽에 있는가 하면, 마을 앞으로 굽이쳐 흐르는 내가 뒤로 흐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등 잘못된 곳이 많았다.
“뭐야? 사실과 너무 다르잖아, 이런 지도를 어떻게 믿어, 좀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없을까?”
세월은 흘러 어느덧 그의 나이 스물이 되었다. 청년 김정호는 지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손바닥 보듯이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내 일생을 걸겠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김정호는 괴나리봇짐 하나만을 등에 진 채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20년, 때로는 사람 사는 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꼬박 밤을 새워야 했고, 때로는 눈 속에 파묻혀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가다가 사냥꾼에 의해 간신히 구출되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 심한 설사 때문에 잠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의 집 방아품으로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던 아내는 몇 해 만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 딸 순녀만이 다 해진 버선발로 달려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도가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집 내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싸돌아다니는 거요? 나랏님이 그 일을 하랍니까? 아니면 벼슬을 내려준답디까?”
아내가 매섭게 투정부터 해대자, 딸 순녀는 어머니에게 그만하라고 말리며 아버지를 방으로 모신 후 큰절을 올렸다.
지치고 굶주린 데다가 병까지 얻은 김정호는 그날 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이윽고 헛소리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는 그제야 남편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간호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식구 굶기고, 본인 병들어 죽게 되는 고생을 무엇하러 사서 하는지…….’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순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나타났다.
“어머니. 여기 아버지 약 지어 왔어요. 어서 달여 드리세요.”
“갑자기 네가 무슨 수로 ……?”
김정호의 아내는 무심코 딸을 돌아보다 짧게 잘려진 머리카락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여보! 순녀가 제 머리카락을 팔아 약을 지어 왔소. 효녀를 둔 덕분에 살아난 줄이나 아시우.”
김정호는 딸의 까까머리를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혼잣말로 되뇌었다.
“순녀야, 고맙다. 내 지도를 꼭 완성해서 보답해 주마.”
몸이 회복되자 김정호는 울며불며 붙잡는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고 세 번 째 답사에 나섰다.
그리고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시집을 갔던 딸 순녀는 남편을 여의고 돌아와 홀로 친정집을 지키고 있었다.
김정호는 돌아오자마자 조사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지도 작성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여 도본을 완성했으나 목판 새기는 일이 문제였다. 목판 조각가를 구할 돈이 없던 김정호는 딸에게 목판 파는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순녀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김정호의 훌륭한 조수가 되었다.
순녀는 자신의 신세는 까마득히 잊고 목판을 새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아버지를 돕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목판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철종 12년인 1861년, 김정호는 처음으로 종이에 지도를 찍어 내었다. 그 감격은 아버지와 딸의 가슴을 울렸다. 김정호는 지도 이름을 ‘대동여지도’라고 붙였다.
김정호는 본관이 청도(淸道)이고, 황해도 출신인데 어려서 한양으로 올라와 공부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지도 만드는 일에 뜻을 품고 오직 지도 만드는 일에만 나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처럼 32권 15책의 <대동여지도>를 딸과 함께 그리고 판각하여 이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바쳤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대신들은 지도의 정밀함에 놀라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刻板)을 불태우고 김정호를 구금해 마침내 옥사하게 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된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讀如取食(독여취식)
讀:읽을 독, 如:같을 여, 取:취할 취, 食:밥 식.
어의: 책을 읽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독서의 중요성과 유익함을 강조한 말이다. 밥은 몸의 양식이지만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한국인물고(韓國人物考)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때 학자 조위한(趙緯韓.1567~1649)이 홍문관에서 숙직을 하고 있는데 한 학동(學童)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갑자기 책을 내던지며 말했다.
“책을 덮기만 하면 읽었던 내용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달아나 버리니, 이래 가지고야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그러자 조위한이 그 학동을 조용히 깨우쳐 주었다.
“그것은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밥이 항상 뱃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삭아서 똥이 되어 빠져나가 버리고, 그 영양분만 남아서 신체를 윤택하게 하는 이치와 같은 거라네. 따라서 당장은 그 내용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엇인가 저절로 습득되는 것이 있는 법이야. 그러니 책 읽기를 쉽게 포기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네.”
조위한은 1624년 이괄의 난을 토벌하였으며 직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그는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어려운 민생을 그린 <유민탄>이라는 작품을 썼으나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
東:동녘 동, 家:집 가, 食:밥 식, 西:서녘 서. 宿:묵을 숙.
어의: 동쪽에서 밥 먹고, 서쪽에서 잠잔다. 즉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고려의 정권 밑에서 녹을
받아먹던 신하들이 지조 없이 조선의 태조 밑에 들어가 다시 녹을 먹는다는 비아냥에서 연유했다.
문헌: 고사성어사전(故事成語事典).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고려 말 송헌(松軒)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자춘(李子春)의 아들로 영흥(永興) 출신이다. 그는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으나 그의 의사가 묵살되고 도리어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되어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최영(崔瑩)을 숙청하고, 우왕(禑王)을 폐위한 뒤 창왕(昌王)을 옹립한 다음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에는 다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후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구세력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전제(田制)를 개혁했다.
1392년에는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하고 마침내 태조(太祖)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칭하고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이렇게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국한 후 공신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문무백관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고려 왕조의 대신들이었다.
그런 자리에는 으레 기생들도 참석했는데 마침 명기 설매(雪梅)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흥에 겨워지자 한 정승이 술에 취하여 설매에게 수작을 걸었다.
“내 듣자하니 너는 동쪽 집에서 아침을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던데 나하고도 한번 놀아보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설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지요! 저도 나으리 말씀대로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몸이요, 대감께서도 왕씨를 섬겼다가 다시 이씨를 섬기는 몸이니, 같은 사람끼리 노는 것도 격에 맞는 일이겠지요.”
그러자 그 정승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물론이고 곁에서 듣던 다른 대신들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은 흔히 할 일 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건달, 놈팽이들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同穴之友(동혈지우)
同:한가지 동, 穴;굴 혈, 之:어조사 지, 友:벗 우.
어의: 같은 굴에 사는 친구라는 말로, 부부를 뜻한다. 한 수도자가 여인을 흠모하여 꿈에 그 여인과 살았다는
내용으로, 사찰 정토사가 세워지게 된 설화에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 때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에서 토지 관리인으로 조신(調信)스님을 임명했다. 그런데 조신은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깊이 사랑하여 낙산사(洛山寺)의 관음보살에게 그 여자와 혼인하게 해줄 것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다른 배필이 생겨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결혼하고자 했던 낭자가 반가이 웃으며 다가왔다.
“저는 일찍이 스님을 잠깐 보고 속으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의 명령에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함께 무덤에 들어갈 동혈지우가 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조신은 자기가 바라던 여자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뻐 함께 고향으로 갔다. 그리고 사십여 년을 같이 살며 아들딸을 다섯이나 두었으나 집이라곤 벽뿐이요,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 겨우 구걸하여 연명을 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명주 해현령(蟹縣嶺)에서 열다섯 살 된 큰아이가 굶어 죽어 나머지 네 자녀를 데리고 다시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 띠풀로 집을 짓고 살았다.
세월은 흘러 그는 늙고 병들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딸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려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와 눕자 부인이 흐느껴 울며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의복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산 지 사십 년이 되어 정도 깊게 들고, 숨은 사랑도 굳어졌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쇠약해져 병이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를 짊어지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미처 돌보지 못하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어여쁜 얼굴과 웃음도 풀 위의 이슬처럼 사라져버렸고, 아름다운 난곡 같은 백년가약도 한 조각 구름이 바람에 날아가듯 없어져 버렸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이 되니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가슴만 아픕니다. 역경을 당하면 버리고, 순경에 있으면 가까이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일이지만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명이니, 우리 이제 헤어집시다.”
조신 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맞는 말이라 생각하여 각기 아이 둘씩을 나눠서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시오.”
막 헤어져 길을 떠나려 할 때 깜짝 꿈을 깨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조신 스님은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어져 몰골이 한평생 고생을 격은 것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그리고 탐염(貪染)의 마음도 얼음 녹듯 사라져 버려 마음 깊이 참회해 마지않았다.
해현(蟹縣)에 찾아가 꿈에 묻었던 아이를 파 보니 둥그런 돌부처가 나왔다. 그는 사찰의 토지를 관리하는 일을 그만두고 전 재산을 쏟아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쌓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杜門之義(두문지의)
杜:막을 두, 門:문 문, 之:의(어조사) 지, 義:옳을 의.
어의: 문을 막아 의로움을 지킨다는 말로,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조선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고사리만을 캐 먹고 산 데서 유래했다.
문헌: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고금청담(古今淸談)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1392년)을 건국하니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모든 영화와 명예를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골짜기에 들어가 고사리를 따다 연명하며 끝까지 고려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때 고려 충신들이 몸을 씻은 샘을 세신정(洗身井)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머물었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고, 그들의 충의를 두문지의(杜門之義)라 했다.
기록에 나와 있는 그대의 충신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장성 사람 서중보(徐仲輔)를 비롯하여 우헌(迂軒) 허옹(許邕), 김해 사람인 허기(許麒) 등을 두문동 72현으로 꼽는다.
둘째. 개별적인 기록으로는 부평 사람 이의(李倚), 개성 사람 고천우(高天佑), 김해 사람 김진문(金振門), 인천 사람 채귀하(蔡貴河), 변숙(邊肅), 성산 사람 전신(全信), 파평 사람 김인기(金仁奇), 청송 사람 심원부(沈元符), 진주 사람 강회중(姜淮仲) 부자 등 10인과 신규申珪(), 신혼(申琿), 조희생(趙羲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등이 있었다.
셋째. 태학생(太學生. 성균관 소속의 생원, 진사의 총칭) 69명이 분신자살했거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굶어 죽었다.
넷째. 무신(武臣) 48인이 있으며, 조선에 충성하지 않아 끝내 몰살당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을 위해 제21대 영조(英祖) 때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配享)하였다.
다섯째. 두문동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궁녀동(宮女洞)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고려의 궁녀들이 의롭게 죽었다.
이상의 인원 수만 해도 199명, 궁녀를 합하면 200명이 훨씬 넘는 숫자다. 기록에 빠진 것을 감안하면 이 외의 수는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또 두문동이 아닌 명산대천을 헤매다가 죽거나, 벼슬하지 않고 의(義)를 지켰던 숨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 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豆粥侍中(두죽시중)
豆:콩 두, 粥:죽 죽, 侍:모실 시, 中:가운데 중.
어의: 콩죽만 먹는 시중이라는 말로, 고려 말에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던 문하시중이 조선 초에 태종 이방원의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콩죽만 먹으며 지조를 지킨 고사에서 유래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조가 굳
은 사람을 이른다.
문헌: 고려사(高麗史). 고금청담(古今淸談)
고려 말에 좌시중(左侍中) 우현보(禹玄寶. 1333~1400)는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에서 피살된 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곳으로 가기를 꺼리자 천마산의 스님을 시켜 장사를 지내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의 건국 주역 태종(太宗)과는 매우 친한 벗이었다. 태종이 우현보를 청백리에 봉하고 나라의 중책을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망국지신임을 내세워 극력 사양했다. 또한 조선에서 주는 녹미는 안 먹겠다는 결벽으로 그의 의복은 언제나 철에 맞지 않았고, 조석의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항상 콩을 맷돌에 갈아서 나물과 함께 죽을 끓여 먹었으므로 사람들은 우왕 때 시중을 지냈다 하여 그를 두죽시중(豆粥侍中)이라고 불렀다.
그는 쓰러져 가는 고려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자신의 무덤조차 선영에 쓰지 않고 따로이 쓰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頭懸上梁(두현상량)
頭:머리 두, 懸:매달 현, 上:윗 상, 梁:들보 량.
어의: 머리를 상량에 매단다는 말로, 수양하는 사람이 스스로 육체적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
한다는 뜻이다. 신라 자장법사에게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교대사전(佛敎大辭典)
신라의 대덕 자장(慈藏)의 속명은 김선종(金善宗)으로 그의 아버지 소판(蘇判) 무림(茂林)은 진한의 진골(眞骨)로서 관리직을 맡고 있었는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관음보살에게 자식 하나만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만약 아들을 낳게 해주시면 불법에 귀의케 하겠습니다.”
그 후 아내가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았는데, 석가세존과 생일이 같은 날이었다. 그래서 선종(善宗)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선종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렵게 결혼했으나 세속의 번거로움이 싫어져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세운 후 입산했다. 그리고 깊고 함한 산속에서 독실하게 불법을 수행했다.
그는 수행할 때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주위에 가시덤불을 둘러치고, 맨몸으로 들어앉아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가 찌르도록 하고, 머리카락을 들보에 매달아 졸음을 막았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재상의 자리가 비게 되자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칙령을 내렸다.
“명령에 불응하면 목을 베어버리리라.”
그러자 자장이 여왕에게 말했다.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어기고 백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의 단호한 뜻이 조정에 알려지자 왕도 더 이상 속세로 돌아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비바람을 피해서 바위 사이에 틀어박혀 수도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상한 새가 곡식을 물어다 주어 그것으로 공양을 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하늘 사람이 와서 다섯 가지 계(戒)를 주었다. 꿈을 깬 그는 비로소 골짜기를 나오니 마을의 부녀자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그 후 더 깊은 불법을 연구하고자 636년에 승실(僧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唐)나라의 청량산으로 갔다. 그 산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에 의하면 제석천(帝釋天. 불법을 지키는 신)이 장인(匠人)을 데리고 와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건데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범게(梵偈)를 주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처음 보는 스님이 와서 해석해 주며 말했다.
“비록 만 가지 교(敎)를 배운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이오.”
말을 마친 스님은 자기가 지니고 있던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는 사라졌다. 자장은 불경과 불상이 없었으므로 대장경 1부와 번당(幡幢)・화개(花蓋. 불당을 장식하는 깃발) 등 불교를 알릴 수 있는 자료들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당태종(唐太宗)에게 청해서 모두 가져왔다.
그가 신라에 되돌아오자 조정에서도 뜻을 같이 하여 의논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주관하고 받드는 규범이 없으니 이를 통괄해서 관장할 필요가 있다.”
논의가 이에 이르자 칙령을 내려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고, 불교의 일체 규범을 주관하도록 했다. 자장은 중책의 소임을 느끼고 궁중과 황룡사(皇龍寺)에서 대승론(大乘論)을 활발하게 펴 불교를 포교했다. 그래서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이가 열 집 중에 여덟, 아홉 집이나 되었고, 스님이 되기를 청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세워 스님 지망자들을 받아들였다. 또 자기 집에 세웠던 원녕사를 고쳐 짓고 낙성회를 열어 잡화(雜花. 화엄경)를 강했다.
자장은 황룡사9층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고,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했으며, 10여 개의 사탑(寺塔)도 건립했다. 또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하고, 그들의 의관제도를 도입하여 정리하니 외관상으로 신분을 구분 짓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자장은 말년에 태백산에 정암사(淨巖寺)를 세운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