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9일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사진>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세기 동안 영국 패션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그는 '펑크(punk) 패션의 대모' '영국 패션의 여왕'이란 별칭을 가졌는데요. 실제 영국 왕실로부터 여성 기사 작위를 받아 '경(卿)'에 해당하는 '데임(Dame)'으로 불리며 많은 이의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1941년 태어난 웨스트우드의 첫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그러다 맬컴 맥라렌이란 남자를 만나면서 진로가 완전히 바뀌었죠. 맥라렌의 권유로 런던 킹스로드에서 함께 옷 가게를 운영하게 됐거든요. 1970년대 영국은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실업률이 나날이 치솟는 어두운 미래 앞에 젊은이들은 좌절과 분노를 느끼면서 기존 체제에 반감을 보였어요. 펑크는 '양아치'를 뜻하는 은어였는데요. 자신을 펑크족이라 칭하는 젊은이들은 삐죽거리는 염색 머리에 너절한 옷을 입으며 반체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죠. 웨스트우드의 가게는 옷을 찢고 금속 장식을 덕지덕지 붙인 후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나를 죽여라' 등의 문구를 새겨 팔았습니다. 웨스트우드는 연인 맥라렌이 매니저를 맡은 록그룹에게 가죽이나 고무 재질에 지퍼·사슬을 장식한 옷을 입히며 펑크 패션의 상징이 됐습니다.
웨스트우드는 1980년대 들어 펑크에서 빠져나온 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합니다. 영국·프랑스의 복식을 철저히 연구하고 이국적인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서구 복식의 오랜 규범을 깨뜨리는 데 앞장섰어요. 브래지어를 티셔츠 위에 덧입혀 겉옷과 속옷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등 기존 통념을 깨버렸죠. 영국 전통을 삐딱한 눈으로 해석하며 영국 패션에 생기를 불어넣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왕의 대관식 망토를 저렴한 인조 모피로 바꾸고, 천 조각을 기워 여왕의 왕관을 만들면서 근엄한 상징물을 조롱하는 식이었죠.
그 이면에는 영국 전통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 신사복에 주로 사용하는 트위드,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에 자주 나오는 타탄을 비롯해 영국에서 개발된 개버딘·니트 소재 등 영국적 복식문화를 의도적으로 가볍게 해석하며 젊고 낯선 이미지를 부여했어요. 이런 특징은 브랜드 로고에서 잘 나타나는데요. 왕실 대관식에 쓰이는, 십자가를 붙인 화려한 구체(球體)를 간략화하고 여기에 큰 띠를 두른 로고는 '전통을 살려 미래로 나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실제 그의 옷들은 세계 최고의 복식사 박물관인 V&A 박물관에 다수 소장되며 예술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웨스트우드는 디자이너를 넘어 오피니언 리더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반전·환경·동물보호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죠. 패션쇼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남기며 지속적으로 이슈를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했고요. 지난 2015년에는 영국 캐머런 총리 관저 앞으로 탱크를 직접 몰고 가 정부의 셰일가스 개발 허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