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전쟁사]
<31>카운터페이터(Die Falscher, The Counterfeiter), 2007
 
“영국 하늘에 가짜 돈을 뿌려라"
세계 경제 붕괴 계획한 히틀러
 
감독: 스테판 루조비츠키/출연: 카를 마르코빅스, 오거스 디엘
나치, 2차 대전 당시 위조 지폐범·은행원 등 유대인 140명 동원
영국 국고 4배인 1억3100만 파운드 위조지폐 제작
작전은 실패했지만 인플레이션 겪은 영국, 1944년 신권 교체
영화, 나치장교와 유대인의 대립 통해 ‘전쟁 허무주의’ 강조
천재 위조전문가 살로몬 소로비치는 전쟁이 나고 강제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는 남다른 미술과 위조 실력으로 ‘베른하르트 작전’의 중요 멤버로 차출된다. |
2차 대전 중이던 1942~1945년, 독일은 적국인 영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를 흔들기 위해 최대 규모의 위조지폐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 상공에서 파운드 위조지폐를 뿌린다는 ‘베른하르트 작전(Operation Bernhard)’을 마련했다. 작전명은 당시 작전을 수립한 나치 친위대의 베른하르트 크루거 소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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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베른하르트 작전’
작전엔 위조지폐범·은행가·화가 등 140명의 유대인들이 동원됐는데, 800만 장, 약 1억3100만 파운드, 당시 영국 국고의 4배에 달하는 돈을 위조했다. 비록 폭격기로 가짜 파운드화를 하늘에서 뿌린다는 작전은 실패했지만 워낙 정교하게 위조돼 전쟁용 자금으로 널리 통용됐다. 영국은 5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겪자 결국 1944년 파운드화를 신권으로 교체했다.
천재 위조전문가의 실화 재구성
영화 ‘카운터페이터’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수용소에서 나치 주도하에 진행된 위조지폐 대량 생산 작전에 가담한 천재 위조전문가 살로몬 소로비치의 실제 이야기다. 영화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직접 고발하기보다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절박함을 그려내고 있다. 같은 죽음의 수용소이지만 한쪽은 가스실과 총살로 죽어가고, 다른 한쪽은 안락한 침대와 식사 등의 대접을 받는, 전쟁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위조지폐 작전에 투입됐던 이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아돌프 브루거(2016년 사망)의 자서전 『악마의 공장(The Devil’s Workshop): 작센 하우젠 위조지폐 공작소』를 기본으로 한 영화는 종전 후, 위폐 전문가 살로몬 소로비치(카를 마르코빅스)가 해변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 전부터 소로비치는 그 독보적인 화폐 위조 기술을 이용,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다 위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다. 전쟁이 나고 유대인인 그는 강제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는 남다른 미술과 위조 실력으로 나치 장교들의 호감을 사 ‘베른하르트 작전’의 중요 멤버로 차출된다. 그는 다른 막사의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하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원치 않지만 위조지폐를 만들어 간다. 마침내 실패의 원인이 종이의 재질에 있다는 것을 안 그는 파운드화의 완벽한 위조에 성공한다. 하지만 “나치를 위해 돈을 찍을 수 없다”는 동료 브루거(오거스트 디엘)와 대립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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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전쟁 속 인간의 갈등 그려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를 고발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과는 결이 다르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보여지는 인간 개인의 내적 갈등과 휴머니즘을 그린 점은 같아 보이나 극한 상황에 대처해 가는 방식과 사고 차이에서 연유한 등장 인물 간의 가치관 충돌은 전쟁 역사의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담장 하나를 두고 한쪽 유대인은 가스실로 끌려가 죽어가지만 위조지폐를 만드는 또 다른 한쪽은 탱고 음악이 흐르는 작업장에서 일하고, 포근한 잠자리에 담배, 탁구까지 즐긴다. 하지만 위폐 제조 작전에 가담한 이들 역시 한시적인 안락함일 뿐 작전이 실패하면 처형당하는 시한부 인생이다. 게다가 다른 유대인 동료들로부터 나치를 돕는 부역자라는 비난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작전의 총책임자인 친위대 베른하르트 소령의 명령에 따라 실질적으로 위폐 제작 작업을 이끌고 있는 소로비치는 “오늘 총살되느니 내일 가스실을 가겠어. 하루가 어디야?”라는 현실론자다. 하지만 동료 브루거는 “아내와 아우슈비츠에서 반나치 삐라를 찍은 나다. 나치를 위한 돈은 못 찍는다”라고 맞서는 인물이다. 소로비치가 “우린 살아있어. 뭘 더 바라?”라고 하면 브루거는 “구차한 인생을 연명하자고?”라고 반문한다. 그러면 소로비치는 다시 “구차한 인생밖에 없으니까”라며 일을 진행해 간다.
2008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
주인공 소로비치 역을 맡은 작은 체구의 독일 연기파 배우 카를 마르코빅스의 강렬한 눈빛과 내면 연기가 인상적이다. 감독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스테판 루조비츠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공동 제작한 영화는 나치를 비판한 대개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나치 장교와 유대인 간의 대립, 심지어 사적인 교류 및 거래를 부각하면서 전쟁의 허무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2008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영국 파운드의 위조 성공에 이어 미국 달러까지 위조하려 했던 나치는 패전 직전 위조지폐를 오스트리아 토플리츠 호수에 던져 버렸다. 작전에 가담했던 유대인도 전원 사살하려 했으나 폭동으로 실패했다. 종전 후 유대인들의 행방은 여러 소문만 무성할 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1980년대 오스트리아 해군은 토플리츠 호수를 수색해 파운드 위조지폐와 동판으로 가득한 철제함과 폭탄 등을 찾아냈다. 소로비치는 1960년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아르헨티나에서 사망했다. 브루거는 2006년 자서전을 내고, 2016년 프라하에서 99세 나이로 사망했다.
<김병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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