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만 의 이야기 “결국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게 된 놀라운 이유…” 개그맨 김병만이 최근 조카를 데리고 살며 부모를 잃은 눈물겨운 이야기가 알려졌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살아생전 효도 한 번 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잘해드릴 걸 후회하며 사는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와 관련해 옛날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조선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한양을 떠나 개성에 방문하게 되자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내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서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소원이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뵙고 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들은 임금님이 오는 그날만 기다렸다가, 50리 길을 어머니를 업고 그 먼 길을 찾아가서 임금님이 지나갈 때 잘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아들을 불러 “너는 효자다”라며 상으로 금 백 냥과 쌀 한 섬을 주었고,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동네의 한 불효자가 돈을 벌기 위해 원치도 않는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가 그대로 따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고 있던 신하가 임금님에게 이러한 사실을 낱낱이 고하며 불효자에게는 상이 아니라 벌을 줄 것을 간청했으나, 그런데 임금님은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니, 똑같은 상을 주라’라고 하자, 그 불효자도 결국 효자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의 주인공 김병만도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무려 몇 년간은 말을 하지 않다가, 하지만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에게만큼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라며 최선을 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마저 지난 2022년 갯벌에서 조개를 줍다가 밀물에 고립돼 세상을 등져버리자, ‘정글의 법칙 아일랜드’ 편을 마지막으로 모든 방송을 하차해야 했던 김병만. 그의 눈물 나는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75년 전북 완주군 산골 마을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병만은 어린 시절 온 동네 유명한 말썽쟁이었습니다. 불장난으로 산을 홀랑 태워버려 동네 어르신들의 속까지 까맣게 태웠고, 또한 벌집 쑤시고 도망 다니기도 선수로 이처럼 동네 사건 사고는 꼬마 김병만이 전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유난스럽던 호기심은 온갖 말썽으로 이어졌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즐거워하는 걸 좋아해 춤을 추면 엄마가 박수를 쳐주고, 나무 위에 올라가면 친구들이 좋다며 박수 치고 웃어주자, 그것만큼 만족스러운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김병만에게 가난이라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는데, 원래는 꽤 부유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지만, 아버지가 그 돈으로 ‘집 짓는다. 양장점 하겠다’라며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쉽게 말해 모두 다 날리고 말았죠.
그러다 아버지가 최후의 보루로 영농자금을 빌려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려다 이마저도 태풍으로 망치면서, 이후부터는 완전히 집안이 기울어 온 집안이 빚더미에 올라 비참할 정도로 가난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후부터는 가난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누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봉제공장에 다녀야 했고, 그 역시도 도끼질에 망치질에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농촌에서 안 태어나겠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온 식구가 빚에 짓눌려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게 되는데, 그래서 그도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남들 다 가는 대학은 고사하고, 오로지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 건설 현장 막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하루는 일을 끝내고 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는데,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라이벌처럼 친구들을 웃겼던 한 친구가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아니, 쟤는 어떻게 tv에 나오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먹던 숟가락을 바로 놓게 됩니다.
당시 그 친구가 출연했던 프로는 ‘스타 예감’이라고 해서 지금으로 치면 ‘미스터 트롯’ 같은 오디션 프로였고, 그렇게 한때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친구가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본인이 학력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막일을 평생 한다고 한 듯, ‘과연 집안의 빚은 다 갚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저 친구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끈 치솟아,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도 희극인이 되겠다고 말을 한 뒤, 돈 30만 원과 연기학원 전화번호가 적힌 신문 광고 쪼가리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연기를 배워보겠다고 도전한 서울예대는 6년을 내리 떨어지고, 개그맨이 되겠다고 도전한 개그맨 시험은 무려 여덟 번이나 떨어지며, 상경 이후 고난의 시기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낙방도 낙방이지만 워낙에 돈이 없다 보니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라면 하나를 사골이나 죽처럼 불러서 먹고 노숙은 밥 먹듯이 하며 그야말로 고생 그 자체였는데, 이와 관련해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한참 어렵게 살던 때의 얘기 중 하나로 당시 옥탑방 생활을 하다가 그 돈조차 마련하지 못해 방을 빼야 했고, 그래서 아는 형이 아는 무술 체육관에 기거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는데, 그런데 이곳에는 샤워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학생들이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뒹굴던 매트에서 잠을 자야 했고, 그러다 하루는 너무 더워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무도 없겠지 하고는 아래층 공중 화장실에 가서 세면기에 물을 받아 놓고 목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장실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관리인 아저씨가 들어왔고, 그러면서 ‘여기서 뭐 하는 거야’로 시작된 꾸중이 무려 10분간이나 이어지게 되는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발가 벗은 채로 10분 동안 혼났던 그때가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견디기 힘들었던 암담한 생활이 계속되자 하루는 술김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왜 이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게 했냐”라며 따지자, 그의 주정을 다 들은 어머니는 뜻밖에도 “미안하다”라고 하시자, 그때 술이 번쩍 깨면서 차라리 욕이라도 했다면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당시 어머니께 너무 미안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꿈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대학은 6년 떨어지고, 개그맨 오디션은 7번이나 떨어지며 7년간 아무런 성과가 없자 하루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 “이제 그만해라 집에 빚이 너무 쌓인다. 너도 해볼 만큼 해봤으니까, 그만 내려와서 빚 좀 갚아라”라며 집에 돌아올 것을 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그가 아버지에게 “제가 신문지 덮고 자는데 어떻게 아버지에게 효도를 합니까. 저는 어떤 말씀도 못 드리니까, 아버지도 저한테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라고 냉정하게 얘기한 후 이후 몇 년간은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때는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좌절하고 그만하려 해도 뒤돌아보면 너무 먼 길을 온 거라 포기하기에도 이미 늦어버렸고, 또한 당시 친구들한테도 ‘절대 안 내려간다’라고 떵떵거리며 말했는데 속으로는 ‘이제 오갈 데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하며 벼랑 끝에 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겁이 나면서 ‘이런 정신으로 뭔들 못하겠냐’라는 생각이 들어, ‘두고 보자’라며 이를 갈며 다시 일어섰고, 그런 와중에 이수근을 만나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2001년 kbs 공채 시험을 봤는데, 또 떨어지면서 총 여덟 번이나 낙방하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내가 방송국 공채만 8번 떨어졌는데, 마지막으로 떨어졌을 때가 2001년 kbs 공채다. 당시 수근이도 같이 떨어졌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수근이랑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다” “사실 수근이랑은 당시 대방역 근처 옥탑방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때 우리가 소주 한 병에 치킨 한 마리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이수근이 하는 토크쇼에 코미디언 김병만이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날까지 열심히 하자고’ “그런데 둘 다 떨어지자 수근이는 ‘더 이상은 못하겠다’라며 생계를 위해서 원래 하던 수련원 강사를 한다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급전이 필요해서 계약금을 미리 받았나 보더라,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게 너무 서운하고 안타까움이 폭발해 전화기를 든 채로 펑펑 울면서 “너 다시는 안 본다”라며 윽박지르고 절교까지 선언했다”
“그러다 1년을 더 준비해서 마침내 9번 도전 끝에 내가 kbs 공채 17기 개그맨이 되었고, 그리고 합격 이후 제일 먼저 한 게 수근이 생각이 나서 곧장 찾아가 꼭 다시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이때 수근이를 꼬시려고 내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비싼 외제차까지 렌트해서 찾아갔는데, 아무튼 결국 나의 설득 끝에 수근이가 나보다 한 기수 아래인 kbs 18기에 합격해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토록 바라던 코미디언이 된 그는 이후 개그 콘서트에서 ‘달인’이라는 코너를 통해 일학 스타가 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빚도 조금씩 정리해 드리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효도를 하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그래서 목돈이 생기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아버지께 집을 지어 드리기로 약속을 하고,. 대출까지 받아 서둘러 땅을 샀고, 하지만 구입과 동시에 아버지의 대장암 판정과 더불어 당시 가족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치매까지 발견되게 됩니다.
당시 가족들이 아버지의 치매를 전혀 몰랐던 이유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어머니는 일을 나가시고, 누나는 시집가고, 동생들도 다 돈 벌러 나가면서 누구도 아버지의 상태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아버지가 외로우셨는지 매일 술만 드셨고, 결국 이후 서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10년 전부터 치매가 진행되었다가 암이 걸려 수술을 앞두고, 그제야 아버지의 상태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 후에는 치매가 급격히 진행될 것”이라고 했고, 그러자 진짜로 수술 후에는 당시 항암 치료를 해야 되는데, 무조건 바늘을 뽑아버리고 가족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아버지한테 지금도 제일 죄송한 게 과거 몇 년간 말을 하지 않다가, 내가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푼돈 정도 집에 보낼 무렵, 아버지와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때 동네에 앉아서 ‘아버지 그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대신 저기 건너편에다가 땅을 사서 나중에 멋진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별말씀은 안 하시고 ‘그래 좋지’ 이 한마디만 하시더라”
“하지만 이후 아버지가 치매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 번은 내 친구와 함께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에 갔는데, 친구의 말에는 대답을 하시고 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더라. 아마 그때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던 그 몇 년간의 불효가 혹시 서운한 감정으로 남아서 이러시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그리고 이 무렵 동네 사람들이 내가 개그맨이 되고 성공하니까 변했다면서 하는 말이 “아들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보러 내려와 보지도 않는다. 김병만은 아들도 아니다”라며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런데 솔직히 진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아버지의 병원비도 대야 되고, 내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집간 누나는 월세방에 살 정도로 가난했고, 동생도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이 불행해 당시 조카마저도 내가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효도라는 걸 뭔가 내가 성공한 뒤에 모아서 근사하게 해드리려고 했던 게 그게 잘못된 것 같다. 효도라는 건 큰 선물이 아니라 보잘것없던 때라도 그때그때 조금씩 효도를 해드렸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게 가장 후회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아버지는 김병만이 ‘달인’이라는 코너로 코미디언으로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2011년, 끝내 하늘로 떠나게 됩니다. 한편 이 무렵 마흔이 코앞인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노총각으로 살던 그가 돌연 7살 연상에, 키도 본인보다 8cm나 더 큰 여자친구와 결혼 발표를 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가 그의 결혼을 결사반대하기도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초혼인 아들과 다르게 며느리가 애 딸린 연상의 재혼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내가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대가 왜 없었겠나. 순탄치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초혼인 아들이 애 딸린 연상의 재혼녀를 흔쾌히 받아들이겠나.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끝내는 내 선택을 존중해 주셔서 지금은 다 풀린 상태다. 그리고 사실 아내는 원래 나의 열렬한 팬이었고, 7개월간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이 무렵 내가 너무 일정이 바빠 데이트할 시간이 안 됐었는데, 그런데 그런 부분을 다 이해해 주고 감싸주더라.
힘들고 지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징징대거나 투정 부리면 감당하기 힘든데, 아내는 연상이라 그런지 마음 씀씀이가 달랐다” “재미있는 건 처음엔 누나 동생으로 지내면서 마치 나에게 좋은 여자를 소개해 줄 것처럼 하더니, 결국 그게 자기였던 거다. 그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혼 초반에는 딸이 워낙 말이 없어서 내가 싫어서 그런가 하고 오해했었다”
“그런데 정말 말수가 적은 거더라. 그래도 ‘아빠’라는 호칭은 당연하고, 나도 ‘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애교가 많진 않지만, 정 많고 속 깊은 아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비록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또한 아버지께 못해드렸던 효도를 어머니에게 마음껏 해드리며 마침내 김병만 그에게도 따뜻한 꽃길이 펼쳐지게 됩니다.
특히 어머니께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본인의 명의로 된 집을 처음으로 선물해 드리자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우셨고, 이후 아들이 마련해 준 집에서 조그마한 정원을 가꾸며 무척 행복해하자, 이를 지켜보는 김병만 역시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코미디언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모든 것이 탄탄대로 꽃길이 펼쳐지던 때,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정말 안타깝게도 2022년 5월 뉴스에서는 그의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이 보도되게 됩니다. 당시 뉴스에 따르면 ‘전북 부안의 한 갯벌에서 조개를 잡던 70대 여성이 밀물에 고립돼 생을 마감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라며 보도가 나갔었는데, 하필 그 여성이 김병만의 어머니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어머니는 4시간여 동안 조개 등을 채취하다가 물이 들어오는 때를 뒤늦게 인지하고, 육지로 빠져나오지 못해 사고를 당하면서 하늘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병만 그가 고백하길 “고백한 건데, 사실 나는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 이유로는 누이들이 모두 결혼 생활이 순탄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손위 누이는 이혼 후 아이 셋을 키우며 혼자 생활하고 있고, 막내인 여동생 역시 이혼해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그나마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바로 아래 동생도 형편이 넉넉지는 않다. 이처럼 온 가족이 모두 힘들게 살았는데, 그중 특히 어머니가 제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굉장히 가난하게 사셨는데, 소학교 시절에는 남의 집 자갈을 몰래 훔쳐 가져다주고 공책으로 바꿨었다고 하실 정도였다” “어머니의 처녀 때 사진을 보면 허름한 집 앞에 검정 고무신 신고 서 있는 모습이 정말 없이 살았구나 싶더라. 사실 우리 할머니가 무당이신데, 여기저기 침 놓아주러 다니다가 어머니를 본 거다. 그때 어머니 나이가 스물. 할머니가 데리고 와서 며느리 삼으셨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는 동네에서 세 번째로 잘 살았고, 그렇게 어머니는 있는 집으로 시집을 오긴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쭉 고생길이었던 거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안 들으면서 남의 얘기에는 귀가 얇았다. 큰아버지들이 하는 말에 혹해서 땅 판 돈 다 말아먹고, 결국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쫓겨가다시피 해서 살아야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어머니는 식당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며 상경했고, 나도 코미디를 하겠다고 서울로 온 거다. 그렇게 수십 년을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며 생활을 꾸리셨는데, 손톱이 다 달아 없어질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 내가 코미디언으로서 큰돈을 벌게 되자, 어머니의 명의로 된 집을 선물해 드렸더니 한 평생 처음 있는 일이라 그런지 아무 말 없이 우시더라. 사실 낡은 한옥집인데도 귀하다 하면서 조심조심 생활하셨다”
“그리고 집에는 조그만 정원이 있는데 거기에 과일이며 채소며 다 심어놓고 매일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내주시기도 하는데,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렸을 때는 철없는 소리도 많이 했고, 힘겨웠던 좌절의 순간도 많았다. 한때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이 서러워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속에 없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는 나의 철 없는 소리를 들으시고, 화를 내시는 게 아니라 미안하다고 하셨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몸은 굉장히 단련됐는데, 마음은 나약해져서 부모님 생각만 하면 감정이 자꾸 울컥한다. 이제는 작은 키조차 감사할 만큼 모든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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