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를 찾아서
오랜만에 퇴직 교사 모임으로 청도를 찾았다. 청도 하면 떠오른 것이 감의 고장이며 소싸움의 본거지이다. 그런데 생소한 레일바이크를 타러 갔다. 왕복 5km로 40여 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레일 위를 자전거처럼 밟아야 차체가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세 사람씩 나뉘어 두 대에 타고 왕복으로 오갔다. 근면과 협동을 발휘해야 잘 갈 수 있었다. 마치 칠십 연대 새마을 운동 정신을 연상케 했다.
가는 길 왼쪽에는 냇물이 흐르고 감나무가 즐비하며, 다른 쪽에는 메타세콰이어와 백일홍이 도열하고 있었다. 레일 오르막길에는 자동으로 기계장치가 되어 있어 끌어서 오르게 했다, 반환점에서 차를 갈아타야 하나 싶었는데 차체를 회전판에 올려놓고 회전시켜 방향을 되돌렸다. 마지막 길에는 소나기가 한줄기 내려 더위를 식혀 주었다.
다음은 새마을 운도 발상지를 둘러보러 갔다. 그곳은 청도읍에서 5km 정도 떨어진 신도 마을이었다. 당시는 육이오를 겪고 암울했던 오륙십 연대! 피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시절에 그곳 마을은 스스로 잘살아보자며 지붕을 고치고 마을 길을 넓이며 마을 공동의 협동 정신을 도모하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마을의 면모를 개량하고 개선하였다.
1969년 태풍이 강타하여 전국을 휩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해가 심한 경남지방을 둘러보고 상경길에 올랐다. 청도의 신도 마을을 지나면서 창밖을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방과 길을 복구하는 모습을 보고 열차를 세웠다. 마을 사람들의 자조와 협동 정신을 치하하고 상경하였다. 대통령은 시골 마을 공동체의 자조 자립과 협동을 바탕으로 새마을 운동을 구상하였다.
이듬해인 1970년 4월에 박 대통령께서 새마을 운동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 구상의 아이디어는 청도의 신도 마을에서 비롯하였다. 각 시도에서 청도의 신도 마을을 찾아 그들이 하는 일을 보고 듣고 배워서 새마을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보고 배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마다 농로를 만들고 지붕과 부엌, 담장이 개량되는 등 마을 면모가 하나하나 가꾸어져 변모되어 갔다.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가 마을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소리에 너도나도 깨어서 일터로 나갔다. 당시의 구호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였으며 국민소득 100불이 목표였으니 아시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새마을 운동 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를 내걸고 피땀 흘리며 일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설되고 포항제철공장이 들어서는 등 급속도로 발전되어갔다. 불과 삼십 년 만에 국민소득 만 불 시대를 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오늘이 있기까지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비롯하여 전 국민이 한결같이 대동단결하여 합심했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과거의 새마을 운동을 되뇌게 되었다. 오늘 하루 청도 기행은 즐겁고 유익한 여정으로 삶의 힘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