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水原 華城 (2-2)
(19) 西北角樓
角樓는 城郭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서 周邊을 觀測하고, 휴식할 수 있으며, 非常時에는 各方面의 軍事指揮所 역할을 하는 곳이다. 西北角樓는 華城의 4개 角樓중의 하나로, 熟知山(△124m)자락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서 華西門일대의 軍士를 지휘하는 곳으로, 1층은 宿直하는 軍士를 위해 온돌을 깔았다. (*郭: 둘레 곽 *熟: 익을 숙)
(20) 水原 華西門 -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華城의 西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東쪽의 蒼龍門과 거의 같은 구조이며, 네모반듯한 큰 돌을 높게 쌓아 만든 築臺위의 1층 樓閣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축대의 가운데에 홍예문과 문 앞쪽에는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甕城에는 女牆이 있다. 甕城의 북쪽에는 空心墩이 성벽을 따라 연결되어 있으며, 韓國의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 구조도 특이하다. 虹霓門 左側 石壁에는 城門工事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工事實名板이 있다. (*蒼: 푸를 창 *墩: 돈대 돈 *牆: 담 장 *甕: 독 옹)
(21) 水原 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空心墩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哨所역할을 하던 곳이다. 正祖 20년(1796)에 건립한 西北空心墩은 華城 西北側城壁을 突出시켜 南側面의 일부만 城壁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구조로 下部雉城은 方形의 石材로, 1∙2층 外壁과 3층 下部는 塼돌로 쌓았다. 1∙2층 各面에는 6개의 銃眼이 있으며, 3층에는 女墻을 쌓고 4개의 총안을 설치했다. 3층 鋪樓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箭眼을 설치했다. 雉城의 北側面과 西側面에는 각각 2개소의 懸眼을 두어 접근하는 敵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下部는 성벽의 石材를 오목하게 ‘∪’形으로 架工해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했다. 水原 西北空心墩은 現存 城郭에서는 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柔軟性과 機能性이 우수하며, 雉城의 石材쌓기 技法과 上部 空心墩의 塼돌 築造技法, 懸眼과 銃眼, 箭眼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造形美를 갖추고 있다. (*墩: 돈대 돈 *墻: 담 장 *雉: 성가퀴 치 *塼: 벽돌 전 *鋪: 펼 포 *箭: 활 전 *懸: 달 현) 1797년 1월 華城에 왔던 正祖는 城을 巡行하면서 臣下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空心墩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하며 滿足해했던 시설이다. *懸眼: 성벽의 위에서 아래로 군데군데 낸 홈. 성벽을 기어오르는 敵兵에게 끓는 물을 쏟아 붓기 위해 만들었다.
(22) 北西砲樓 水原華城의 5개 砲樓의 하나로, 華西門과 長安門사이에 있는 北西砲樓는 正祖 20년(1796) 完工했다. 砲樓는 敵의 城壁接近을 방지하기 위해 火砲射擊施設로 雉城의 發展된 형태이다. 지붕을 이은 모양이 特異해 城안쪽은 맞배지붕, 바깥쪽은 우진각지붕이다. (*樓: 다락 루)
(23) 紅夷砲 -길이 215cm, 口徑 10cm, 重量 1,800kg
紅夷砲는 中國 明나라末부터 淸나라때까지 사용한 유럽식 火砲로, 砲口쪽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해 發射하는 砲口裝塡式火砲이다. 射程距離 700m에 이르는 威力的인 火器로, 城郭이나 砲樓등에 배치하거나 城郭攻擊用으로 사용했다. (*夷: 오랑캐 이 *塡: 메울 전)
(24) 長安門 華城의 北門으로 건립한 重層樓門으로, 虹霓門위에 정면 5칸∙측면 2칸의 2층 樓閣을 올리고 바깥쪽은 半圓形甕城을 갖추었다. 長安門은 朝鮮時代의 일반적인 城門形態로, 規模나 構造는 서울 崇禮門과 매우 비슷하며, 새로운 것은 甕城, 敵臺와 같은 防禦施設을 갖추었다. 1920年代 水原市 市街地計劃事業으로 左右城壁이 헐리고, 6·25戰爭때 樓閣이 燒失되어 1978년 門樓를 復元했다. (*甕: 독 옹)
(25) 華城의 北水門, 華虹門 水原市 八達區 梅香洞에는 水原川이 南北으로 흐르는데 華城의 연결부분에는 水門을 설치해 북쪽에는 北水門, 남쪽에는 南水門을 두었다. 正祖 19년(1795) 完工한 北水門에는 [華虹門]이라는 扁額을 걸었는데, ‘華’는 華城을, ‘虹’은 수문이 무지개처럼 생겼다고 붙은 이름이며, 壯快한 물보라가 水門으로 넘쳐나는 모습을 ‘華虹觀漲’으로 水原八景의 하나이다. 華虹門은 7개의 무지개모양 水門을 설치했는데 7개 수문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 가운데 水門이 左右의 水門보다 넓고 크게 설치해 降雨量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華虹門동쪽 언덕에는 화려한 建築美를 자랑하는 訪華隨柳亭이 있다. (*虹: 무지개 홍 *漲: 넘칠 장 *隨: 따를 수)
(26) 水原川 水原 廣敎山에서 發源해 廣敎貯水池를 거쳐 水原市 남쪽都心을 가로질러 黃口池川으로 흘러 드는 地方二級河川이다. 길이 2.72km이며 1996년부터 河川 生態系復元事業으로 自然河川으로 많이 탈바꿈했다.
(27) 水原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 正祖 18년(1794) 建立한 華城의 東北角樓인 訪花隨柳亭은 戰時用建物이나 亭子의 機能을 고려해 石材, 木材, 塼돌을 적절하게 사용해 造成한 건물이다. 水原 방화수류정은 宋나라 程明道의 詩 ‘雲淡風輕近午天(운담풍경근오천)/訪花隨柳過前川(방화수류과전천)’에서 따왔으며, 扁額은 朝鮮後期의 文臣∙ 書藝家인 松下 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平面은 “ㄱ”字形을 基本으로 북쪽과 동쪽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造營해 四方을 볼 수 있게 했으며, 獻宗 14년(1848) 重修, 日帝强占期이후 여러차례 부분적으로 修理했다. 朝鮮時代 亭子建築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독특한 平面과 지붕형태의 特異性등을 토대로 18세기의 뛰어난 建築技術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隨: 따를 수 *塼: 벽돌 전 *程: 길 정 *淡: 맑을 담 *獻: 드릴 헌)
(28) 龍淵(龍池) 訪花隨柳亭밖 주변의 아름다운 景觀을 살려 연못을 파고 ‘天圓地方’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남쪽언덕 위의 訪花隨柳亭과 용머리바위, 섬의 꽃과 나무사이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水面위로 비추는 아름다운 情趣를 ‘龍池待月’이라고 하며 水原八景의 하나로 꼽았다. 龍淵은 예전에 가뭄이 들면 祈雨祭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水原八景: 一景 光橋積雪, 二景 北池賞蓮, 三景 華虹觀漲, 四景 龍池待月, 五景 南堤長柳, 六景 八達晴嵐, 七景 西湖落照, 八景 華山杜鵑. (*虹: 무지개 홍 *漲: 넘칠 창 *堤: 둑 제 *嵐: 남기 람 *照: 비칠 조 *杜: 막을 두 *鵑: 두견이 견)
(29)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보물 제14호 彰聖寺터에 있는 眞覺國師의 行跡을 알리는 塔碑로, 碑文을 새긴 碑身은 磨滅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碑文에는 眞覺國師가 13세에 入門해 여러 절을 다니며 修行하고, 榮州 浮石寺를 重修하는등 小白山에서 76세에 入寂하기까지의 행적읗 실었다. 入寂 다음 해인 祐王 12년(1386) 廣敎山 彰聖寺 境內에 碑를 세웠다. 簡略化된 高麗後期 石碑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漆谷 僊鳳寺 大覺國師碑(보물 제251호)와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보물 제229호),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高麗前期의 힘있는 風貌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高麗後期의 글씨가 退步했음을 보여준다. 碑文은 牧隱 李穡이 짓고 僧侶인 惠岑이 刻字했다. (*彰: 드러날 창 *跡: 발자취 적 *磨: 갈 마 *寂: 고요할 적 *祐: 복 우 *漆: 옻 칠 *僊: 춤출 선 *勒: 굴레 륵 *貌: 모양 모 *隱: 숨을 은 *穡: 거둘 색 *岑: 봉우리 잠)
(30) 華城 東暗門 正祖 20년(1796)에 完工한 東暗門은 東將臺의 서쪽 116步에 있으며, 구조는 門위에 벽돌을 깔고 五星池와 커다란 둥근 담장을 설치했다.
(31) 華城 東將臺(鍊武臺) 華城의 동쪽 東暗門과 東北空心墩 사이에 있는 將臺로 武藝를 修鍊해 ‘鍊武臺’라고도 한다, 地形이 높은 곳은 아니지만 四方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丘陵인 仙巖山의 要地이다. 3층의 臺에서는 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했다. 建物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 지붕이며, 주변에는 터를 넓게 잡아 東西 80보, 南北 240보의 操鍊場을 만들었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弩臺는 쇠뇌를 쏘는 군사인 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墩: 돈대 돈 *操: 잡을 조 *弩: 쇠뇌 노)
(32) 영롱담[玲瓏墻] 기와로 꽃무늬를 새긴 담장으로, ‘마치 구슬이 울릴 듯한 꽃무늬의 담’이라고 ‘영롱담[玲瓏墻]’이라고 한다. 높이 165cm로 鍊武臺의 王을 保護하기위한 뒷담장에 밑부분을 紋石臺로 築臺를 쌓고, 위에 영롱담을 쌓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玲: 옥소리 영 *瓏: 옥소리 롱 *墻: 담 장 *紋: 무늬 문)
(33) 東北空心墩 공심돈은 敵의 動向을 살피기 위한 望樓와 같은 것으로 水原華城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華城에는 西·南·東北空心墩이 있다. 東北空心墩은 正祖 20년(1796) 높이 5.42m, 둘레 38m로 건립했으나 6∙25戰爭때 파괴되어 1975년에 復元했다. 형태는 커다란 둥근 圓모습으로 華城에서 가장 특징 있는 건물의 하나이다. 동북공심돈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螺旋形의 벽돌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 부른다. 最上層에서는 華城 전체모습을 眺望할 수 있다. (*螺: 소라 나 *旋: 돌 선 *眺: 바라볼 조)
(34) 華城 烽墩 일반적인 烽燧臺가 주변을 山頂上에 별도의 施設로 만든 것과 다르게 華城烽墩은 城壁과 맞물려 벽돌로 만든 우리나라 城郭樣式에서는 보기 드문 施設로 外觀이 마치 藝術作品처럼 精巧하고 壯麗하게 건립한 水原華城의 代表的인 施設의 하나이다. 華城烽墩은 四方警戒와 偵察任務를 수행하며, 낮에는 煙氣, 밤에는 횃불로 信號를 보내면, 龍仁의 石城山烽火와 西海岸의 興天臺烽火가 應答한다. 興天臺烽火는 華城烽墩과 너무 멀어 正祖 20년(1796) 華城의 서쪽 30리의 棲鳳山에 間烽을 두어 전달하도록 했다. (*烽: 봉화 봉 *巧: 공교할 교 *墩: 돈대 돈 *棲: 깃들일 서) *烽火信號體系 烽燧는 밤에는 횃불, 낮에는 煙氣로 전하는 軍事信號體系로, 다섯 개의 횃불구멍을 통해 狀況을 전달하는데 남쪽 첫 번째 횃불구멍부터 平常時에는 밤낮으로 烽燧 1개, 적이 國境近處에 나타나면 봉수 2개, 國境線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侵犯하면 봉수 4개, 적과 戰鬪가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올렸다. (*燧: 부싯돌 수) *烽燧路線 世宗 5년(1423) 漢陽 木覓山(南山)에 5개소의 烽火臺를 설치해 各地에서 오는 봉수를 받았다. (*覓: 찾을 멱) = 第一路; 咸鏡道 慶興 西水羅 牛巖烽燧~咸鏡道∼江原道∼楊州 峨 嵯山烽燧 (*峨: 높을 아 *嵯: 우뚝 솟을 차) = 第二路; 釜山 多大浦 應峰烽燧~慶尙道∼忠淸道∼廣州 天臨山烽燧 = 第三路; 平安道 江界 滿浦鎭 餘屯臺烽燧~平安道∼黃海道∼毋岳 東烽燧 (*毋: 말 무) = 第四路; 平安道 義州 古靜州烽燧~平安道海岸∼黃海道海岸∼毋岳西烽燧 (*靜: 고요할 정) = 第五路; 全羅道 麗水防踏鎭 突山島烽燧~全羅道∼忠淸道∼陽川 開 花山烽燧 (*突: 갑자기 돌)
(35) 城神祠 城神祠는 華城을 지켜주는 華城城神의 位牌를 모신 祠堂으로, 正祖 20년(1796) 正祖의 命으로 건립했으며, 華城 城役이 완료되는 時點에 특별지시를 내려 城神祠를 설치하고,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말게 하소서.”라며, 華城과 華城百姓들을 사랑하는 뜻을 담은 祝文을 지어 내렸다. 城神祠는 五樑架 三칸으로, 祠堂前面에는 三門을 세우고, 門 左右로 5칸의 行閣을 연결했다. 祭祀는 매년 봄과 가을 孟朔(季節이 시작되는 봄은 陰曆 正月, 가을은 七月)의 초하룻날에 제사 지냈다. 日帝强占期에 훼손되어 2009년 重建했으며, 華城行宮에서 西將臺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祠: 사당 사 *牌: 패 패 *朔: 초하루 삭) - (16-3) 水原 華城行宮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