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의 원동력인 양심
행22:30~23:5
바울이 연설하던 중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로마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여 영내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기 위해 다음날 제사장들과 공회원들을 소집했습니다.
이스라엘 공회는 입법권과 사법권을 모두 쥐고 있는 막강한 권력기관입니다. 예수님도 이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집행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한 말이 행23:1에 나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사도 바울이 “양심”에 대해 말했습니다. 오늘은 양심이 뭔지 양심에 대해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일나무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곳은 나무 꼭대기입니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햇볕을 받기 때문에 당도가 제일 높습니다. 그래서 새들은 단내가 많이 나는 꼭대기 과일만 쪼아 먹습니다. 하나만 쪼아 먹으면 좋을 텐데 그러질 않고 이거 쪼아 먹고, 저거 쪽아 먹고 그러면서 꼭대기의 과일들을 다 망쳐놓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의 과일 농사를 망쳐놓고는 둥지로 돌아가서 “아이고~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러면서 괴로워하는 새가 있을까요? 그런 새는 없습니다. 그러면 새는 왜 괴로워하지 않을까요? 양심이 없어서 그래요. 멧돼지도 남의 농작물을 다 망쳐놓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잠만 잘 잡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가 난 이후에 전철의 의자를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의자에 파란색 융이 깔려 있었는데 화재에 너무 취약한 거예요. 그래서 융이 없는 의자로 모두 교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자의 융을 보면서 번쩍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야~ 이걸 뜯어서 구두닦이 천으로 사용하면 끝내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칼로 필요한 만큼 융을 잘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융으로 구두를 닦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은 거예요. 왜 편치 않았을까요?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훗날 편지에 사연을 써서 100만원과 함께 지하철공사로 보냈습니다. 그게 신문 기사로 났습니다.
양심은 헬라어로 수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라고 하는데 순(σύν 함께)과 에이도(ἐίδω 보다)의 합성어로 “함께 본다”는 뜻입니다. 누구와 함께 보는 것일까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法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일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세상 사람들은 法에서 어긋난 일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곳에는 法이 없기 때문에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무인도에서 살지라도 양심이 작동합니다. 무인도에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먹고 놀기만 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제일 용감한 사람이 누굴까요? 요일3:21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양심의 가책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양심이 가책을 느낄 게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담대함”을 얻은 사람은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양심이 클린해야 합니다. 사람이 약해지는 이유는 양심에 걸리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장수가 나타났을 때 사울 왕과 이스라엘 장수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골리앗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외치면서 돌팔매를 들고 골리앗 앞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양심이 클린하니까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거예요.
그다음 기록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칼이 없는 사람이 칼을 가진 자를 이겼습니다. 얼마나 담대한 사람입니까?
로마 박해시대에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당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화형당하고,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겁니다. 양심에 꺼릴 게 없으니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은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배교했습니다.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마귀가 시험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 세 가지로 시험했는데 첫 번째는 먹을 것으로 시험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먹을 것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결과는 서민들을 배고프게 만들었던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공산혁명, 역시 먹을 것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황제 리콜라스 2세는 총살당했습니다. 노동투쟁, 임금문제 즉 먹을 것 때문에 일어납니다.
마귀의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은 세상 부귀·영광으로 시험했습니다. 부귀·영광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사람들은 평생을 부귀·영광을 얻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안 넘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세 가지 시험을 다 물리치셨습니다. 능히 그리할 수 있던 비결은 “하나님과 함께” 마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하나님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양심이 클린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그 담대함으로 이 세상에서 극복하지 못할 고난과 시험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