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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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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12) - 예수를 죽이려는 이들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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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마가복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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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너 이제 죽었어!', '죽여 버릴 거야!',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하는 목숨에 대한 위협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해의 위협을 느끼기 보다는, 기분 나쁜 협박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기보다는 무언가 행동이 위축되는 기분 나쁜 느낌을 받는 정도입니다. 더러는 또래끼리의 세(勢)를 과시하기 위한 기선 제압용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 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실제 강력한 협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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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의 위협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그 음모가 무서운 것은 거의 종교적으로 합법을 가장해 죽이려는 것이기에 집요했고, 언제라도 실천에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살해 위협은 기억도 나지 않고 느낌도 없던 어린 시절이었고, 부모의 품에서 '애굽'으로 피하여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 때는 '헤롯'왕의 살해 명령에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쫒기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부터는 실제 종교적 이유로 죽일 수 있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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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위협을 당한 때는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신 다음, 회당에서 그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신 척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그의 생애가 끝날 때쯤까지 예수님이 성전에 나가 가르치시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만나면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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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 38년 된 병자의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묻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는데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라고 알려주고,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자,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며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다고 유대인들이 더욱 죽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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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을 아시는 주님은 나사로와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터라,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며 베다니에 찾아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신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이고, 수건에 얼굴을 싼 채 나오는 모습은 충격적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고, 이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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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렸다.” 고 합니다. 그들이 대제사장들과 의논합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그냥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면서, 이 날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그러니까 '헤롯'도 그를 죽이려 하고, '유대인'들도 죽이려 하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바리새인들'도, 백성의 '장로들'까지 모두 예수님을 죽이려 모두 적(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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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는 말씀을 마치자, 바리새인들이 와서 "여기를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일러줍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서 저 여우에게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헤롯 왕도 죽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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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천국의 비유' 마지막에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던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의 설교를 마친 다음, 제자들에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고 하시는데, 그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민란이 날까 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고 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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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잡아온 이튿날 새벽,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묶어서 끌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함하고 담합하여 결국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살려고 하면 여전히 대적하는 이가 많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는 대적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따라 산다는 길은 위험한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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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8월 16일(주일) 아침에 오랜만에 따가운 햇볕이 비치기에 예배당 정면에서 한번 찍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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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학
칼럼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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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13) - 손을 안 씻는다고 시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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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마가복음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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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형식'과 '내용'입니다. 식탁으로 말하면 형식은 그릇이고 내용은 음식인데 둘의 조화는 서로를 절대시해서도 안 되지만 무시해도 안 됩니다. 어제 '신은경' 교수님이 올리신 '마이크로 바이옴'식탁을 보았습니다. 다양한 과일들을 썰어서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아 놓았는데 보기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걸 먹고 나면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아름다워질 것 같은 매혹적인 모습입니다. 과연 누가 그걸 날름 입에 넣을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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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때 선물 받은 장식용 웨딩 접시라며 그동안 장식으로만 보다가 잘 씻고 접시의 뒷면을 보니, '레녹스'에서 만든 결혼 기념 축하용으로 접시랍니다. 이 의미 있는 접시에다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아름다운 과일들을 올려 놓았습니다. “가지, 양파, 호박, 마늘, 버섯, 토마토와 빨강/노랑 파프리카는 죽염과 후추를 넣고 올리브기름에 볶았다. 이외에도 오이, 단호박, 당근, 패션푸루트, 달걀, 한여름 볼 빨간 첫 사과, 잣, 아몬드, 호두, 말린 체리를 올렸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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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그 싱그럽고 촉촉한 향이 그대로 살아있는 열일곱 가지 과일과 견과류를 냉면 그릇에 수북히 담아 놓았다면 손이 갈까? 반대로 그 기막힌 접시 위에 온갖 과일들을 깍두기 썰듯 썰어서 담아놓았다면 먹고 싶은 마음과 식감을 살려낼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식에 맞는 그릇, 그릇에 맞는 음식이 서로를 빛내 주는 조화로움이 있어야 행복한 식탁 완벽한 상차림이 되지요. 어느 하나 가벼이 보거나 절대화하지 않고, 그릇도, 음식도, 코디도 모두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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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는 여러 유전(遺傳)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이란 공동체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습관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입니다. 물론 종교적 의미보다 위생적 권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깥에 돌아다니며 거리의 먼지며 사람들, 사물들, 기구들과 가장 가까이 완전히 노출된 채 접촉한 신체입니다. '코로나' 예방 수칙 중에 ‘손 씻기'에 보니, 손이 제일 더럽답니다, 손으로 코와 귀 후비고 머리 긁고 닿는 모든 것을 만지는 지체가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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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으로 빵을 떼어 먹고 포도주를 먹는 식탁에서 손이야 말로 정결 우선순위 0순위가 되어야겠지요. 더군다나 스푼이나 포크 같은 도구 없이 맨손으로 빵을 찢어 먹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청결예식은 굉장히 중요했고 누구든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관례요, 전통예절이며 거의 종교적 습관 즉 장로의 유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물론 잘한 일은 아니었으나 시비를 당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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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풍습을 설명하기를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시비 거리를 찾지 못하던 주린 늑대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 그 때 주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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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구나.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구나."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했고 또 '부모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부모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현대어 성경)'라고 말하면 된다고 하면서 부모에게는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게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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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의 내용을 묻자 "너희도 깨달음이 없느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모르느냐?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 정작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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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배 인도자의 가운에는 신경을 쓰면서 예배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나서 술을 한 모금도 입에도 안 댔다."면서 온갖 더러운 생각, 판단, 정죄, 탐욕, 모함, 음해 등을 다반사로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음주나 흡연, 도박 등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문제라면 음해, 모함, 시기, 질투, 비방, 탐욕 등은 그보다 천 배는 무거운 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겉모습이나 삶에서 누가 봐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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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신은경 교수님이 포스팅한 '마이크로 바이옴' 식탁의 모습입니다. 허락을 받고 빌려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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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학
칼럼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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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14) - 아버지께서 십자가를 지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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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로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을 나누시고,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신 후에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 오셔서 머무실 때면 늘 올라와 기도하시던 동산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나와 서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면 펼쳐지는 이 산을 '올리브' 산이라고 불렀고, 그 중에 비교적 평평하여 엎드려 기도하기에 안전하고 야트막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예수님에게는 늘 아버지와 교류하는 지성소였으며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영적 충전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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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어린 올리브나무부터 중간 크기의 나무에 가지가 찢어질 만큼 열리는 나무부터 크고 작은 올리브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산이요, 더러는 숱한 세월 올리브를 생산해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열매를 제공하고 기름을 주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 주고 이제는고목이 된 채 서있는, 남두들이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에 오실 때면 늘 이곳에 오셔서 기도하시던 낯익은 곳이었습니다. 제자들도 항상 같이 오던 곳입니다. 그 산은 아버지의 품처럼 아늑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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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중에 낮고 높낮이가 고른 곳을 '겟세마네 동산' 이라고 불렀는데, '겟세마네'란 '기름틀/Oil-press'의 뜻이 있습니다. 그 산에 많은 올리브나무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생산된 올리브로 기름을 짜기 위한 기름틀이 있었고, 여기서 생산되는 올리브를 이곳에서 기름을 짰습니다. 올리브 열매를 기름틀에 넣고 짓눌러 보통 네 번의 기름을 짜내는 동안, 올리브는 만신창이가 되고 탱글탱글하던 올리브는 기름을 한 번씩 짤 때마다 으깨져서 마지막은 찌꺼기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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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 앞에 한걸음 바짝 다가온 십자가 죽음을 놓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러 올라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저녁을 먹은 아홉 명의 제자들을 동산 아래 머물게 하시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당신이 기도하실 자리까지 같이 올라 가셨습니다. 동산에 도착하신 주님은 세 제자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당신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기도와는 먼 믿음이어도 세 제자는 기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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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전에 높은 산, '변화산'에 올라가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직접보고 하늘에서 주시는 음성을 들었던 이들이고, 또 숨이 끊어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려 죽음이 그를 토해내던 기적의 현장에도 함께했던 이들입니다. 그 때 그 산에서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들리던 소리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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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 동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깨어있을 것을 당부하시고 돌 던질 만큼의 거리쯤 가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합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이미 그에게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잔은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너무 참혹한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라 그렇게 기도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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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십자가를 비켜가게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인류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 이미 하나님이 결심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아버지 앞에 와서 울고 가는 것입니다. 그가 흘린 통곡과 눈물, 간구와 소원은 결코 주님의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십자가를 놓고 온 몸을 기름짜듯 한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아래 있는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근거리까지 따라온 세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제자들을 보시는 주님은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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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뜻대로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대로 기도를 들으셨으면 세상은 진즉 초토화되고 인류는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고, 미운 사람을 죽이려고 드린 기도를 모두 들으셨다면 서로 죽여서, 땅에 남아있는 이들이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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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도 기도의 산에 오릅니다. 때로 사업이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미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도 기도하겠지요. 목숨걸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사업은 망하고, 건강은 악화되어 목숨을 거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무엇을 해주셔서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잔이 비켜가기를 구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셨으나 하나님 아버지로 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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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점점 예배가 위축되어 가는 중에, 오늘 아침 예배당 옆 '엘리야실'에서 얼굴이 얼마나 어두운가 한 번 찍어 봤습니다.)
칼럼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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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15) -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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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마가복음 14: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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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언제였겠습니까? 공생애를 지나면서 굴욕적인 사건도 많고, 수모도 많이 겪고, 죽음의 위기도 많이 당했습니다. 앞으로 만날 심문, 재판, 처형 과정에 그가 경험하게 될 치욕적인 순간, 십자가의 고통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제자인 '가룟 유다'의 배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에서 나서 뼈가 굵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열두 명의 제사 중에 오직 '유다'만 '가룟'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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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예수님의 신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다'에게는 다른 제자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수식이 하나 있는데 곧 '가룟 사람', 혹은 '가룟 유다'라는 표현입니다. '가룟'이란 남부 유대의 지명(地名)인데, 이 말은 '암살자', '가짜', '위선자', '거짓말쟁이' 등의 의미도 갖고 있기에, 그의 악하고 더러운 이미지를 위해 성경의 저자들이 붙여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들인데, 유독 그만 '가룟'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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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그를 '예수를 팔 자'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배신을 멈추도록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권에 맡겼지만, 그래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던 '벳새다' 광야에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71절에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그가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예수를 넘겨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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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4절에도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 그분을 넘겨줄 가룟 사람 유다"라고 했고, 13장 2절에는 "만찬 때에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사람 유다의 마음에 주님을 넘겨줄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26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빵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바로 그 자다." 며 빵 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마비된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아 '그가 빵 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했고, 주님은 "네가 할 일을 어서 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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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곧 일어날 일은 전혀 모른 채 올라가신 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부 알고 계시시는 예수님은 자기의 운명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슬픔과 고통을 삭인 가슴을 안고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서 자주 모이셨으므로, 예수님을 넘겨줄 유다도 그 장소를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 평상시에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와서 기도하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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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도는 쉽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마셔야 하는 죽음의 잔을 옮겨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지만, 이미 잔은 자신의 몫인 것을 알고 있었고, "이렇게 잠시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고 책망하며 잠자는 제자들을 몇 번 깨워보았지만 제자들은 깨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오신 주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이때 유다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검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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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느냐?" 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0절에 "친구여, 어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그를 '친구'라고 부르시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붙잡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에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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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다는 자기를 '친구'로 '제자'로 불러주신 잊을 수 없는 스승 예수님을 밀고하여 배신했고, 그래도 주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황망한 일을 보고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하며 그 중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쳐 오른쪽 귀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잡지 않고, 이렇게 강도 잡듯이 잡느냐?"며 그들을 책망하시며 붙잡혀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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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람들 중에 "내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이는 못 만났고, 모두들 배신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수많은 배신을 당하고 삽니다. 목회하는 분들끼리 만나면 자기 교인 누구에게 배신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잘 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안 믿는 알콜 중독자를 전도하고 세례주고 집사 만들고 장로를 세웠더니 뒤통수를 쳤다."고 분해합니다. "목사님이 주신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겁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일과 무관하게 우리는 우리의 일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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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애월에 있는 쌩텀 펜션의 일부입니다.)
페목 칼럼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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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예수님 (16) -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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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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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제일 힘든 때는 외로울 때입니다. 그 외로움이 극대화 될 때 극단의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다가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았을 때입니다. 저는 혼자 있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여럿이 있는 것보다는 혼자 조용히 책도 보고 기도도 하고 글도 쓰고 하는 이 시대 '독거노인'을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있으나 특별한 시간에 혼자 있는 것이 성격상 좋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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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주변에 일가친척 혈육들이 모두 나를 멀리하고,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 교인들도 다 떠나서 어쩔 수 없이 혼자만 남아 있다면 이는 힘든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라다니던 이들이 때로는 사천 명도 되고 오천 명도 되었습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떡과 생선으로 주린 배를 채우던 때, 이들은 예수님을 모셔다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수많은 이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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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그에게 병을 고치고자 몰려왔고 얼마나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용신(容身)할 틈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달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온갖 병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근읍에서 허다하게 몰려와 고침을 받고, 그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바닷가에 모일 때는 배를 띄우고 말씀을 전할만큼 되었고 사람들은 호숫가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 영광스럽고 분주한 생을 마감하고 십자기를 지기 직전에 마지막 기도하시러 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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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저녁을 드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놀란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의하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그의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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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 갈 준비도, 죽을 각오도 되었습니다." 고 장담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다시 자신 있게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힘들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죽을 지경'이라고 한 것은 이 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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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스승을 팔고, 50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51절에는 심지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있기에 복음서를 쓴 '마가'일 것이라고 하지만, 이 익명(匿名)의 도망자는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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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잡혀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자, 상황을 보려던 베드로가 아래 뜰에 있는데, 여종 하나가 불 쬐고 있는 그에게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합니다. "나는 네 말이 무엇인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다."며 앞뜰로 나가자, 여종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이 사람이 같은 패라!"고 합니다. 그는 또 부인했고, 조금 후에 다른 사람들이 "너도 참으로 갈릴리 사람이 맞다."고 하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모른다."고 합니다. 그 때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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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날 밤 그동안 따라다니던 수많은 무리들, 열두 명의 제자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중에 신임하고 중책을 맡겼던 '유다'의 배신, 스승인 자기를 밀고하고 소에게 받쳐죽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인 은 30을 받고 떠난 배신을 경험하고, 제일 측근으로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제자, 감옥에 가든 죽음이 오든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는 그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던 때 그의 눈이 주님과 딱 마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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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 61절을 '현대인의 성경'에는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 그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한없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3년간 같이 있던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아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동안 "네가 나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할 이들이 있어도, 그 일을 가슴에 묻고 우리 길을 가야 합니다.
목회 낙수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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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말리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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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은 글이 물이 흘러가듯 술술 나옵니다." 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글이 줄줄 나옵니다."라고 댓글에 쓰셨습니다. 모두 같은 뜻일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고맙습니다. 우선 좋은 뜻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글을 힘이 하나도 안 들게 쓰십니다." 이 또한 읽기 좋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거나 "깊이 생각해야 이해가 갑니다."라고 하는 것 보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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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흔히 하는 말로 '국어 국문학'이나 '문예 창작'같이, 글을 배우고 쓰고 다듬는 쪽의 학문은 근처에도 못 가보았습니다. 그렇다고 글과 관련된 시나 소설, 수필 등 작품을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책을 사두면 언젠가는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과 또 사면 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책은 좀 사 둔 편입니다. 그렇다고 많은 것은 아니고, 도서관이나 다른 이에게 빌리지 않고도, 주로 제가 하는 설교 준비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자료는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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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글 쓰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페목-페이스 북 목사'로 칭하면서 페이스 북의 특성상 쓰고 읽는 것이 일이다 보니, 지금까지 몸 글을 쓰고 댓글과 답글을 달면서 저절로 '글 쓰는 목사'가 된 듯합니다. 실제 글 쓰시는 분들이 모욕감을 느끼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입으로 '작가'라거나, 등단은 했지만 따로 '시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아니 보통 이하의 작은 교회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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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이다 보니 매주 서너 번 하는 설교를 준비해야 하고, 설교문 준비가 글쓰기이고, 그렇게 쓴 설교문이나 성경연구 교재, 소그룹 지침서나 신앙훈련 교재, 또는 영성 개발서 등을 책으로 낸 적이 몇 번 있으니, 또 지금도 매일 글 쓰는 일을 하니 글 쓰는 목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실 저는 '글 쓰는 목사'라기 보다 '글씨 쓰는 목사'입니다. 또 그렇게 줄줄 혹은 술술 막힘없이 쓰는 건 아닙니다. 이 한 편을 쓰는데도 얼마나 애를 쓰고 쓰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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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도구도 전화기에 '노트' 앱을 하나 깔고 씁니다. 물론 개인적인 성격상 하나를 접하고 나면 그것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는 쓰다만 원고도 수십 개, 쓰려는 내용이나 제목을 메모한 것도 수십 개 있습니다. 계속 전화기를 들고 쓰니 팔이 아파 한 달 전쯤인가 목걸이를 사서 걸고 쓰니 아주 편리합니다. 그 위에 터치펜으로 쓰는 거니까 펜은 수십 자루 있습니다. 한 자루에 천원인데 책상 위나 옆 책상 컴퓨터 앞에, 또 침대 머리맡에 널려있는 게 터치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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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쓴 원고를 페북에 올려 원고의 길이를 단락별로 확인하고 단의 개수를 점검합니다. '페목 칼럼'이란 이름의 글은 사실은 칼럼이 아니라 '성경 묵상'입니다. 그리고 '목회 낙수'란 이름의 글이 칼럼입니다. 목회 낙수는 요즘은 5,7,9 단락 세 가지로 쓰고, 더러 시간이 지난 사진을 정리할 때는 세 단락으로 씁니다. 그러나 페목 칼럼이란 이름으로 쓰는 성경 묵상은 모두 아홉 단락입니다. 길이를 줄이려 해도 잘 안 되는 나쁜 습관이 이미 몇 해 동안 손에 붙은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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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다시 한글 프로그램에 불러서 오탈자를 검색하고 '카카오 스토리'에 싣고 그곳에서 글자 수를 조정해서 '카스'의 편집 형태에 맞는 8행을 만듭니다. 이 때 단어나 문장을 조정하면서 길이가 줄어듭니다. 이렇게 인위적인 문장 정리는 조금 세련된 문장을 다듬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 곳에서 8행으로 정리되면, 그걸 페북으로 옮겨 두 계정 모두에 싣습니다. 이때 '페목 칼럼'은 처음 계정을 모 계정으로, '목회 낙수'는 나중 계정을 모계정으로 삼아 서로 태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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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페목 칼럼은 매일 새벽과 아침에 인도하는 기도회 원고이기 때문에 이 원고로 예배를 인도하면서 느끼는 새로운 생각들은 예배 후에 서재에 들어와서 추가하거나 수정합니다. 그리고 이 '문어체'의 글을 '구어체'로 전하면서 어색한 부분은 수정하지만, 페북의 글에서만 하고 카스에는 그대로 둡니다. 카스의 독자들도, 페북에 중복된 계정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곳에 올리는 다섯 단락에서 아홉 단락에 이르는 페북의 원고는 탄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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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느 목사님이나 장로님처럼 그냥 자판기 앞에 앉으면 누에고치에서 실이 뽑히듯 술술 나오는 게 아니라, 진땀을 흘리며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면서 씁니다. 사용 가능한 어휘는 불과 몇 개의 단어로 의사소통하는 어린아이처럼 빈약하고, 사고는 단세포 동물처럼 좁지요. 그렇다보니 글이 때로는 건조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진부하지요. 그래도 이 글들은 최소한 제가 이 안에서 전화기에서 컴을 오가며 열 번 정도는 손을 본 것이니 정성을 보아 읽어 주섰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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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제(7/10) 한라산 중턱에 올라갔다가 찍은 것으로 몸글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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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