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립유공자이고 민족주의 사학자입니다. 1880년 현재의 대전에서 태어나서 1936년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바로 오늘 (2월 21일)이 선생이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올해로 선생이 숨진지 88년이 됩니다. 선생의 인생 56년동안 그는 민족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열혈 독립운동가입니다. 단재 신채호선생의 업적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우리의 고대사를 되찾게 했다는 대단한 업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재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나)와 비아 (非我/ 내가 아님)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를 집필하여 개항기와 독립운동기 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체성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만주땅이 한민족의 땅임을,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지금 우리 역사학회가 발해와 만주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할 그 근거를 단재 선생은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한국 역사를 볼때 단재 신채호 선생이야 말로 선구자요 관련 역사에 대한 앞길을 열어준 대단한 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좀 배웠다는 학자들 상당수가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할 때 단재 선생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그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단재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듭니다. <황성신문>에서는 기자로 <대한매일신보> 등에서는 주필로 활동했습니다. 선생은 초기에는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의 주체와 동력은 바로 영웅이라고 판단했으며 뛰어난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영웅사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외적과 맞서 싸운 군사적 영웅들의 평전 저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중의 힘을 자각합니다. 3.1운동의 진정한 의미중 하나가 바로 민중의 재발견이라는 것입니다. 선생은 영웅에서 민중에게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3.1운동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지만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재선출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이후 재선출에서도 이승만이 당선되자 선생은 퇴장해 버립니다. 이승만과는 철저하게 대립을 하면서 그의 행적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입니다. 후에 독립된 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지만 박정희 정권때까지도 가족과 후손들이 고생을 많이 겪었는데 그이유는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승만을 끔찍이 싫어했고 그런 사실을 박정희정권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일제의 그 어느 것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관련한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일 수 없다고 해서 세수도 꼿꼿하게 선 자세로 행해 항상 옷이 물에 젖어 있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이런 대쪽같은 선생의 행적이 일본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선생은 결국 일제에 체포 구금당합니다. 1928년의 일입니다. 선생은 대만 지룽에서 일제 순사에 체포되어 중국 대련의 뤼순감독에 수감됐습니다.선생은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된지 8년만인 1936년 2월 18일 옥중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3일간 방치되어 있다가 21일 오후 4시 20분경 사망하고 맙니다. 뇌일혈이라고는 하지만 고문당한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생활로 인한 영양 실조와 동상에 걸려 건강상태가 매우 악화된 것이 사망의 결정적 이유로 보입니다.
일제는 선생이 옥사하면 반일 감정이 더욱 심해져 힘들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보호자만 있다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선생은 그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조선일보>의 취재와 연재 요청도 능력부족을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이 죽거든 왜놈들의 발에 시체가 채이지 않게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겼지만 주변인들 대다수가 시신을 국내로 운구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조부 대까지 살았던 충북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 안장됐습니다. 그의 묘소옆에는 모과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어린 시절에 <자치통감>을 독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생의 할아버지가 심은 모과나무입니다. 모과나무는 선생이 묻힌지 88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의 묘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선생은 한국사 연구의 선구자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대쪽같은 생각과 행동은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을 지녔습니다. 그의 56년 생애는 오직 민족과 조국의 독립과 발전 그리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바쳐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생이 떠난지 88년이 지난 한국의 현실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재 일본을 찾는 관광객의 1위가 한국인이며 이제는 일왕의 생일날 한국의 수도 서울 생일축하 파티장에서 버젓이 일본 국가가 불려지는 이런 현실을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지 가슴이 아파옵니다. 선생이 숨진지 88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선생의 명복을 빌고 후대 사람으로 제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잘못을 무릎꿇고 사죄드립니다.
2024년 2월 2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