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십자가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항상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운지 가벼운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만큼인지 측량하거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지고 골고타 산으로 올라가신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그러하다면 내가 왜 이렇게 긴 십자가를 지고 지겹게 일생동안 살고 있는지 자신의 신세를 탓하는 사람들은 많을지언정 십자가의 길이가 짧아서 길이를 늘려달라고 조르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신’은 버려야 하는데, 잊어야 하는데 그 자신(自身)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떻게 버릴 것인지? 언제 버려야 할 것인지? 왜 버려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도 항상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내가 버려야 할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을 버리면 어떻게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사실 자신이 버려야 할 자신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성인이겠지요. 하느님의 특별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인들은 이 모두를 알 수 있었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로 생각되는데 그날은 서울 어느 성당에서 강의를 6시간이나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이 피곤하였습니다. 대전으로 오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는데 그 때의 무궁화호열차는 참으로 좋은 차였습니다. 내 좌석은 통로에 위치해 있었는데 앞에 의자를 돌려놓고 한 가족이 같이 여행하고 있는 듯 했는데 불청객처럼 나는 한 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내 맞은편에는 50이 넘은 듯한 신사가, 그 옆에는 그의 부인이, 그리고 내 옆에는 젊은 딸과 함께 가족이 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피곤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 작은 모래와 같은 것이 내 오른쪽 볼에 날라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지 모르고 그냥 눈을 감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이제는 왼편 볼에 또 무엇이 날라 와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눈을 뜨고 범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짐작하건데 범인은 바로 내 앞의 신사양반이었습니다. 그 분은 코딱지를 검지로 파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고 동그랗게 탄환을 만들어서 중지로 내게 쏜 것이었습니다. 나는 항의를 하려고 일어서려다가 문득 나도 그렇게 하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 하필 생각이 났는지 참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행하였다면 따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을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였다고 항의하였다면 생사람 잡는다고 오히려 야단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모르는 나까지 모두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자신은 교만함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 교만함도 버려야 하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무지, 편견, 아집도 버려야 합니다. 또한 나의 이기심, 형식적인 삶이나 체면치례, 허례와 허식, 그리고 세상에 대한 무한한 욕심, 그리고 자존심, 명예와 부귀와 영화까지는 몰라도 돈에 대한 헛된 바람이나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 기도할 줄 모르는 자기도취 등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마 일주일 내내 찾는다고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버린 다음에야 십자가를 질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내 생명과 맞바꾸는 것이라는 데서 우리는 긴장됩니다. 정말 그런 것들이 내 생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고 참기 힘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정말 내가 처한 모든 환경과 역경들을 모두 극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하나로 만드는 화합의 도구이며 사명이며, 가치이며,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았는지, 우리가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로 하느님과 이웃과 일치하는 사랑의 삶을 살았는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주님의 바람대로 우리의 행실을 바르게 하고 살았는지를 다그치는 오늘 말씀이 더욱 무섭게 다가옵니다.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 나훔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축일8월 5일 성 오스왈도 (Oswald)
신분 : 왕, 순교자
활동 지역 : 노섬브리아(Northumbria)
활동 연도 : 604?-641/2년
같은 이름 : 오스왈두스, 오스왈드
성 오스왈두스(Oswaldus, 또는 오스왈도)는 그의 부친 애설프리스(Ethelfrith)가 616년에 이스트 앵글스(East Angles)의 왕 레드왈드(Redwald)에게 피살되었을 때 노섬브리아에서 스코틀랜드로 강제로 끌려갔었다. 이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이오나(Iona)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의 외삼촌인 에드윈(Edwin) 왕마저 머시아(Mercia)의 왕 펜다(Penda)와 브리튼의 왕 카드왈라에 의하여 피살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카드왈라를 헥삼(Hexham) 교외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만약 이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그 승리를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에게 바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전투 전날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었다.
왕이 된 후 성 오스왈두스는 성 아이다누스(Aidanus, 8월 31일)에게 전국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도와주면서 린디스판(Lindisfarne) 섬을 기증하고 주교좌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을 많이 세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수도자를 이주시켜 자기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게 하였다. 또한 그는 웨식스(Wessex)의 첫 번째 그리스도인 왕인 치네질스(Cynegils)의 딸 치네부르가와 결혼했는데, 불과 몇 년 후에 메이서필드(Maserfield) 전투에서 펜다(Penda)에게 패해 사망하였다. 사망 후 그는 노섬브리아를 복음화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성인 왕으로 존경을 받았고, 이교도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순교자로서도 공경을 받았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오스왈도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