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과 비검(1974.10-1978.6) 대학부가 처음 형성된 것은 1974년 10월이었다. 1973년 당시 고둥학교를 졸업하고 청년회에 들어간 이성주를 비롯한 몇몇 형제, 자매들이 전통적 교회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년회에 부족함을 느끼고 이종현 둥과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그러다가 대학부의 필요성을 느껴 당회장 신복윤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정식 부서로 인정되지 않아 목회자가 시무하거‘ 나 당회의 재정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16명의 회원으로 대학부‘ 역사는 시작 되었다. 하지만 대학부는 네비게이토 원리를 도입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 사람을 양육하고 일꾼을 만들어야 한다는 형제들의 신념 속에서 태어났다.
1975년 박희천 목사님이 부임하셨고, 이 무렵 오정현이 지방 에서 올라와 대학부에 참여하면서 이성주, 이종현 둥과 함께 대학부의 주역이 되었다.
1976년 대학부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3월에 찬송 책자 New Life'’를 처음 발간했고.5월에 주보 ‘證A들’의 전신인 ‘에벤에셀’을 처음 발행하였다. 또 수련회의 필요가 생겨나 박희천 목사님을 초빙해서 제1회 여름 수련회를 가졌다. 이어 송인규 전도사님을 초청해서 6개월 가량 매주 수준 높은 강의를 들으면서 증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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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이 간사로서 1981년까지 사역을 했고 1981~1983년은 친동생인 오정호 전도사님이 사역을 이어 받았으므로, ‘비전’은 여전히 대학부의 주된 방향성으로 공식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982년이 되자 전 시기의 열정보다는 차분한 성숙을 위한 교육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고 , 주보에도 종래 보이지 않던 신앙에 대해 갈등하는 글과 비전보다는 다양한 삶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고있었다.
첫댓글 원초적으로 고등학교 학력을 속이고 가짜 대학생이 되어서 내수동 교회 대학부에 들어갔군요. 놀라운 학력사기 통찰력이
보입니다.
읽도 싫고 보기도 싫지만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내수동교회 출신들중 오목과 같이 상태가 안좋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이 여럿 있습니다.
풉;;
가짜대학생 노릇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참 인생 불쌍하네요.
오정호는 진실을 알고있지만
형제가 만인을 속이고 우롱하는군요...
그러니까 중학교를 졸업한 1972년 부터 거의 반세기를 거짓과 사기로 살아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