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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 4 - 마르세유 항구에서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의 옛 월드컵 결승전을 생각하다!
5월 23일 아침에 엑상 프로방스 Aix en Provence 에서 프랑스 국영철도 SNCF 가 파업중
이라 기차편이 없으니 7시 50분에 철도에서 운영하는 Autocar 버스 를 타고
마르세유 Marseille Saint Charles 에 도착해서는 부르고뉴 본 으로 가는
떼제베 기차 좌석을 예약하고는 역을 나와서는 대로를 걸어서 마르세유 항구 로 갑니다.
몇년전인 2018 러시아 월드컵 축구 에서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나라는 축구 강국 프랑스
와 전세계 축구팬들의 예상을 깨고 놀랍게도 동 유럽의 소국인 크로아티아 였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 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응원 대결을 벌였습니다.
콜린다 는 월드컵 기간 동안 발랄한 미모의 대통령으로 매스컴의 주목 받았고 특히 8강전
에서는 크로아티아 대표팀 유니폼 을 입고 열정적인 응원을 보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는데, 7월 15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결승전은 프랑스로서는
세번째 결승 진출이고 크로아티아로서는 첫번째인데 결국 프랑스가 4대 2로 우승 했습니다!
앞 게임에서 "댄스를 추며 응원했던 콜린다 대통령" 은 모스크바 결승전 경기장에서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과 볼 키스 를 해서 화제를 모았는데, 오늘 항구도시
마르세유 에서 84년전에 두나라 사이에 있었던 사건 을 떠올리고는 역사를 회상해 봅니다.
아인슈타인 부부 가 일본 으로 가기위해 이곳 마르세유에서 배를 탔던 1922년 10월 8일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국왕 알렉산드르 1세 가 루마니아 공주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1934년 10월 9일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마르세유 를
방문했다가 불행하게도 마케도니아 폭력 혁명주의자 체노지미스키 에게 암살 을 당합니다.
유사한 암살 사건 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에서 일어났으니 오스트리아제국의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계의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에게 암살된 사건 인데....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과 독일의 패전으로 끝난후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 건국되고 세르비아 왕인 페타르 1세 가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의 힘을 빼기 위해 그 영토를 분할
하면서 1차 대전에서 연합국을 도와 공을 세운 세나라 국민들에게 왕국을 선사한 것입니다.
이른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의 연장선상인데..... 이에 고무된 조선인
들은 우리도 독립하겠다며 파리 회담에 민족대표를 파견하고 3.1 만세운동 을
벌여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어 그 주선으로 일본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이 간과한게 있으니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 으로
영국, 프링스, 미국과 연합군 이었으니 전쟁에 참가해 독일령 산동반도의 청도와
태팽양 섬들을 공격했으며 파리 개선문 꼭대기 에는 개선문을 지나 상젤리제를 행진
하는 승전국 군대 행열에 일장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행군하는 일본군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 영토를 나누는데 혈안이 되었으니, 영국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및 요르단 을 차지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 을 얻은후 터키 남부 까지 얻을려고
하타이(안티오키아)에 상륙해 내륙인 가지엔텝으로 진격해 터키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철수하니 터키의 케말 파샤는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그리스로 부터 나라를 지켰습니다.
인류 5천년 역사에 나라 운명은 전쟁 에 달렸으니 이기면 영토가 넓어지고 전리품과 배상금
을 얻으며.... 지면 영토가 쪼그라들거나 속국이 되어 노예처럼 부림받고 나라가 멸망해
없어지는데, 전쟁에 이긴 일본은 영토가 늘어나야지 지배하던 영토를 내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그럴려면 전쟁에 이길려고 희생 을 감내하며 기를 쓴다는게 무의미하지요.
1804년 오스만투르크 영토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의 주지사 학정에 시달리던 세르비아인들이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라는 상인의 지도하에 봉기 를 일으켜 베오그라드를 장악하는데
독립국가를 세울 움직임을 보이자 투르크군에 의해 1813년에 진압되었으나... 1815년
오브레노비치가 2차 봉기 를 일으키니 1821년에는 그리스인들도 봉기해 독립국가 를 세웁니다.
카라조르제 왕조 는 1813년에 투르크군에게 축출된후 1842-1858년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민족주의 그룹 내 라이벌 오브레노비치 왕조 에 밀려났다가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를 무너뜨리고 재집권했으니 1903년 페트르 1세 가 근 반세기 만에 다시
왕위에 올라 1918년 까지 세르비아 왕으로 재위하다가 알렉산드르 가 이어 받습니다.
1921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의 페타르 1세가 죽은후 왕이 된 알렉산드르
1세는 대세르비아 왕국 을 꿈꾸며 다음해 루마니아 공주 마리야와 결혼하고
1929년에 유고슬라비아 (남 슬라브족의 나라) 왕국으로 국호를 바꾸는데.....
이질적인 민족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의 반목과 싸움을 막기 위해 독재정치를 폅니다.
그런데 1934년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동맹 을 강화하기 위해 바로 여기 마르세유 항구 에
상륙했다가 체노지미스키에게 암살 당한후 페타르 2세가 즉위하지만 이내
2차 세계대전 이 발생하니 왕은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 하는데.... 그런데
루마니아 공주였던 마리야 왕비는 유럽에서 최초로 자동차를 운전했던 여성 이라고 합니다.
유고슬라비아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영국에 협력하기로 하자 추축국은 즉시 침략해 들어오니
보름도 안되어 나라는 망하고 영토는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가 나누어 차지
하게 되자 티토는 파르티잔(빨치산) 을 조직해 독일군과 싸우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세르비아를 제외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에서 세르비아군은 장비는 빈약했지만 국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선전했으니
발칸전쟁의 영웅 스테파 스테파노비치 장군 이 지휘하는 세르비아 제2군은
쩨르산 전투에서 승리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 하였으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25,000명 이상이었던 반면에 세르비아군의 사상자는 16,000명 이었다고 합니다.
세르비아군은 여세를 몰아 사라예보로 진군 했지만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삼국 연합군
공격을 받아 1914년 11월 3일 수도 베오그라드를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해야 했으며
다음해에는 그리스로 철수하는데 그럼에도 전쟁 내내 지연전과 게릴라전을 수행 했으며
이후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1918년 9월 총반격에 나서 11월 1일 베오그라드를 탈환 합니다.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해 11월 4일 보스니아로 진격하고 11월 한달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부분을 장악하였으며 12월 1일 세르비아 총사령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들의 왕국 의 탄생을 선언
하였으니 이로서 총면적 25만㎢에 인구 1,200만명의 유고슬라비아 왕국 이 탄생한 것입니다.
크로아티아 는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남슬라브 민족의 하나로 오랜 세월 터키와
헝가리, 오스트리아 제국등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온갖 차별을 감수해야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징집되어 오스트리아군
에서 복무 하면서..... 같은 슬라브족인 세르비아군에 총부리 를 돌려야 했습니다.
조선인 10만명 이상이 일본군에 징집되었 듯 오스트리아군에 15% 가 크로아티아인 들이 차지했을
정도로 비중이 컸으며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인구의 30% 가 징집 되는등 고통을 당하였는데,
식민지인으로 취급받았던 크로아티아인들로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들
은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 한다면 이를 기회로 자신들의 독립된 국가를 세울 생각 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질수 없었으니 세르비아 는 물론 승전국 이탈리아도 크로아티아를 자국령
으로 편입하겠다는 야욕을 품고있었기 때문인데, 1914년 12월 7일 세르비아의 니쉬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세르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해방 시켜
남슬라브족 나라 를 세우겠다고 선언했으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의 속셈은 달랐습니다.
또한 1915년 4월 26일에는 런던에서 이탈리아와 연합국 사이의 비밀 협약이 체결되었으니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참전하는 대가 로 로마제국 시절의 속주였던 동부 아드리아해 연안
달마티아를 비롯해 크로아티아의 영토 상당 부분을 양도 하기로 하였는데 이때만 해도
전쟁이 연합군에게 유리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되건 마구잡이로 약속을 남발한 것 입니다.
게다가 연합국도 오스트리아 제국을 완전히 해체 할 것인가, 아니면 제국은 존속
시키되 일부 영토만 조정할 것인가? 이 문제는 1918년 여름에 와서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에 따라 오스트리아제국을 완전히 해체
하고 발칸에 남슬라브 민족의 통일 왕국을 수립 하기로 하면서 해결되게 됩니다.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간절히 원했지만 승전국인 연합국에 참전한게 아니고 비록 자의에 반한 강제
집집이었지만..... 오스트리군의 병사로 참전 했으니 "독립을 주장할 권리가 없었는데",
조선인들이 미군편에 서서 함께 싸운게 아니라 일본 육사 자진 입대나 학도병, 강제징집 으로
일본군으로 참전해 미군과 영국군 및 중국군과 전투했으니 독립할 권리가 없었던 것과 같은데....
독립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반란을 일으켜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승전국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이며 세번째는 중립인데... 크로아티아나 조선은 패전국 군대 에 참가해 싸웠다는?
이제 크로아티아인 들에게는 패전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 으로 남을 것인가, 승전국 이탈리아
의 영토 가 될것인가, 아니면 같은 남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에 편입 될 것인가.... 결국
후자를 선택키로 하였으니, 세르비아의 카라조르제 왕조 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 왕국의
건설에 동의하되 모든 민족이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누리는 연방제의 실시를 강력 주장했습니다.
1918년 10월 29일 승전국 이탈리아군 이 크로아티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달마티아 일부를
무력으로 점령 하고 자국령으로 편입 시킨 급박한 상황에서 세르비아와 논의할 여유가
없었으니.... 협상을 질질 끌다가는 더 많은 영토를 이탈리아에게 빼앗길 판이라 결국
그들로서는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의 건설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18년 11월 3일 독일이 항복해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자 11월 26일 몬테네그로 가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같은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역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탈퇴하고 세르비아에 편입 되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의 지도자
들 역시 더 이상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세르비아와 통합키로 동의 합니다.
이로서 100여년간 발칸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왕국이 세워졌으니
“유고슬라비아 왕국” 은 발칸반도에서 크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지만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으니 14세기에 오스만 제국에 병합된 이래 발칸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난립하였고
단 한번도 통일된 국가를 세운적이 없었으니.... 인종도 문화도, 언어도, 문자도 달랐습니다.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가 “세르비아 왕국” 을 계승한 나라이며 그 테두리 안에서
크로아티아를 비롯 왕국에 편입된 다른 민족들에게 제한적인 자치권 을 부여할
생각이었지만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시달렸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는
세르비아라는 새로운 상전을 모실 생각이 없었으니 갈등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르왕 치하의 유고슬라비아 는 세르비아계에 모든 권력이 집중된 “세르비아인
을 위한 나라” 가 되었으니 이는 약속 위반 이었고 크로아티아와 다른 민족
들은 세르비아인들의 권력독점과 차별에 격분 하였는데 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지배자가 단지 오스트리아에서 세르비아로 바뀐 것에 불과했기 때문 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크로아티아에서 안테 우스타샤의 친독 괴뢰정권 이 수립되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독일군의 앞잡이로 해묵은 감정을 앞세워 세르비아인들의 학살 에
앞장 서는등 양 민족의 갈등과 증오심은 극단에 치닫게 되었으니 50년이 지난 1990년
대에 유고 내전이 폭발 하는등 두 민족의 뿌리깊은 증오심 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1941년초 유고슬라비아 병력은 탱크 110대를 갖춘 7개군 33개 사단 147만명 에 달했는데
발칸의 최강대국 답게 외형적인 규모는 컸지만 훈련상태나 장비는 1차 세계대전
수준에 머물렀는데..... 북쪽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 헝가리 에 대항하고
남쪽으로는 알바니아와 불가리아 에 맞서고 있었으니 완전히 포위된 상태 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460여대의 항공기 와 3만명의 병력을 가졌으며 해군은 구축함 3척 에
불과했는데 여러 민족 사이의 극단적인 갈등 에 있었으니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등에 비해 숫적으로 우세하지도 못하면서 배타적인 민족주의 와 지배-
피지배라는 봉건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한채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934년 10월 9일 여기 프랑스 마르세유 를 방문중이던 알렉산다르 국왕 이 무솔리니의 후원을
받은 크로아티아 급진파에게 살해되자 12살이었던 페타르 2세가 즉위 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국왕의 숙부인 파블레 대공이 섭정이 되었는데 그는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크로아티아에 대한 온건책으로 참정권과 자치권 을 부여키로 합니다.
이는 크로아티아의 불만 을 무마하고 왕국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정부와
군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세르비아계의 반발 로 이어졌는데 어정쩡한
태도가 왕국의 균열을 더욱 증폭시켰으니.... 1941년 3월 26일의 군부 쿠테타 로
이어지면서 독일을 버리고 연합국인 영국으로 기울자 히틀러의 분노 를 사게 됩니다.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쿠테타를 자신에 대한 반역 으로 간주했으니 그리스에서 이탈리아군
의 고전과 영국의 개입이 신경을 자극해 바르바로사 작전 을 앞두고 그리스를 점령해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겠다고 수개월 전 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히틀러 는 이번 기회에
유고슬라비아 까지 완전히 정복 하여 모든 위험 요소를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결심 합니다.
소련 침공을 준비 하고 있던 독일 최고사령부에 "총통 명령 제25호" 를 하달해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지시 하는 한편 헝가리와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참전을 요청하니 북쪽에서는
독일 제2군과 제12군, 이탈리아 제2군이, 남쪽의 알바니아 방면에서는 이탈리아 제9군이,
북동쪽에서 헝가리 제3군이 삼면에서 공격하니 적군은 140만명에 전투기 1800여대 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 는 제1차 세계대전 보다도 불리한 처지에 놓였으니 사방에 포위 된데다가
프랑스의 항복과 영국의 고립 으로 동맹국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처지였으며...
국내 민족간에 갈등과 균열은 폭발 직전 이었으니 독일군등에게 패배하는데 미래에
대한 준비 없는 성급한 쿠데타로 파블레 대공을 몰아낸 댓가는 나라의 멸망 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정규전에서 패배한후 게릴라 파르티잔(빨치산) 으로 맹활약을 했던
티토 는 전후에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인들을 묶어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을 건설 하고 공산주의를 체택해 왕실제도를 폐지 하니 공주는
빅토리아여왕의 증손자 뻘이라 죽은후 런던 윈저성 영국 왕실묘지에 안장 됩니다.
2000년 세르비아 공화국이 왕실제도를 부활 하면서 영국에 망명했던 마리야 왕비의 손자 가
2013년 4월 29일 할머니의 시신을 들고 세르비아로 귀국 해 토플리 왕릉에 안장되었다
는데 처절한 내전을 거쳐 유고슬라비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와 원수지간 입니다.
월드컵에서 최고상인 발롱도르상을 수상한 크로아티아의 루카 모드리치 는 이탈리아 가
점령한 자다르 태생으로 유고 내전에서 조부와 친척을 잃고 집이 파괴되는 아픔을
느꼈다는데.... 프랑스와 결승전을 지켜본 세르비아 축구팬들은 원수지간 임에도
같은 나라였던 유고슬라비아 국민 이었으니 "크로아티아의 우승을 응원" 했다고 합니다.
이는 한국 이 월드컵 경기에서 독일과 싸울때 일본인들이 독일이 아닌 한국팀을 응원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 지배 세력인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원수지간 으로 2차
대전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우스타샤는 독일편에 붙어 세르비아인 50만명을 학살 했고
1992년 분리 독립전쟁에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전쟁을 벌여 서로를 죽였는데도?
유고슬라비아는 7개 나라 로 분열되었으니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쩨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로...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함께
신유고연방 으로 2006년에 독립후 2016년에 나토에 가입하니 러시아가 반발 했는데,
몇년전 핀란드 헬싱키에서 트럼프는 몬테네그로를 위해 미군 피를 흘릴수 없다고 비웃었네요?
이런 저런 회상에서 깨어나서는 되돌아오다가 도중에 작은 식당에 들러서 작은 햄버거 하나와
콜라를 사서 점심으로 떼우고는 마르세유역 으로 되돌아와 화이트 와인의 산지 부르고뉴
지방의 “본 Beaune” 으로 가기 위해서 12시에 출발하는파리행 떼제베 고속철 기차 를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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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프랑스 남쪽 지중해의 마르세유는 동남쪽
유럽은 물론 일본으로 가는 배도 출항했네요?
잘봤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파란만장 하다지만.....
한반도는 북과 남 2방향에서 침략을 받았지만
유럽 발칸반도 나라들의 역사도 그에 몾지않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것은 동서남북이 다 적국이기 때문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