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예찬
대게 내 옷차림을 결정하는 건 그날 아침 뉴스의 날씨 코너이다. 어쩌다 일기예보를 미처 챙겨보지 못한 날에는 오후 늦게 비를 만나거나 꽃샘추 위에 벌벌 떠는 낭패를 보기도 한다. 누가 알려 주어야만 우산을 챙기거나 옷을 한 겹 더 껴입거나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인간은 자연 앞에 참 별거 아닌 존재이다. 식물은 그렇지 않다. 7시마다 아침 뉴스를 듣지 않아도 알아서 옷차림을 바꾼다. 식물들은 봄이 온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무심한 사람들은 꽃이 다 피 고서야 알아채지만 봄을 맞이하는 때의 나무를 관찰해보면 매일이 변화 무쌍하다. 겨우내 바싹 말라죽은 게 아닐까 싶던 나무둥치가 봄맞이를 시작한다. 한 껏 물을 머금기 시작한 나무는 겉보기엔 겨울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도는 얼굴 같다. 이때부터 나무가 얼마나 부지런히 봄을 맞는지 살펴보는 즐거움으로 매 일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손톱 만하던 겨울눈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시 나브로 꽃봉오리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다.
아파트 마당에서 내가 처음으로 알아채는 것은 목련 꽃봉오리다. 일찍 피는 꽃이기도 하고 꽃이 큼직한 만큼 봉오리도 눈에 잘 띈다. 목련 꽃을 활짝 피우는 며칠 동안 나무가 애쓰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덩 달아 나도 응원하게 된다. 물을 빨아올려 봉오리 끝까지 밀어내는 그 힘으로 목련은 조금씩 마침내 활짝 핀다. 눈부시게 하얀 목련 꽃은 등같이 밝아서 한 송이 따서 길을 밝 히고 밤길을 걷고 싶다. 달빛의 시샘을 받으면서. 만개한 목련꽃의 우아한 자태를 보고 있으면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배웠 던 가곡 한 구절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목련 꽃을 보면 목석같은 사람도 세레나데를 부르게 되는 것이리라. 나중에 볼품없이 떨어진 목련 꽃잎을 보면 사랑이 끝난 뒤 추하고 처참히 밟힌 마음 같기도 하다.
그즈음에 매화도 터지기 시작한다. 매화가 터지는 소리는 눈으로 듣는다. 경쾌한 음악이 해가 잘 드는 순서대로 도미노로 연주된다. 아이와 나는 그걸 팝콘 터진다고 하는데 꽃을 먹으면 팝콘 맛이 날 것 같 다는 똑같은 농담을 하며 매년 웃는다. 아파트 마당에는 매화와 벚꽃이 섞여 심어져 있는데 사실 아직도 구분을 잘 못한다. 예전에는 더 심해서 봄에 피는 흰 꽃은 모두 벚꽃인 줄 알았었 다. 한 번은 벚꽃 폈다고 신나서 아이와 둘이 '벚꽃! 벚꽃!'을 외치며 돌아 다녔다. 나무에 버젓이 매화나무라고 이름표가 걸려있는걸 뒤늦게 발견하 고 머쓱해졌지만. 꽃 피우는 치열한 현장을 살펴보느라 한동안 위만 보고 다닌다. 나무에 피는 꽃은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데 반해 땅에서 피는 것은 우 연히 발견하게 된다.
며칠 전부터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받아먹으려고 아이와 둘이서 열 심히 뛰어다녔다. 야속하게도 우리를 다 비껴가서 땅에 떨어지는 벚꽃 잎 을 쫓다가 민들레를 발견했다. 노란 아기 궁둥이 같은 꽃이 여기저기 얼굴 을 내밀고 있는 모습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것 말고는 반가운 마음을 달 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다. 그 옆에는 일찌감치 난 뽀얀 쑥이 아침잠이 없어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노인처럼 점잖게 자리하고 있다. 한창 꽃구경하는 이때가 아이는 비염으로 고생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병원에 약 타러 갔다 오면서 보니 일찍 피운 어떤 벚나무는 벌써 꽃은 다 지고 아기살 같은 연둣빛 싹이 났다. 벚꽃 잎을 하얗게 덮은 길을 걷고 있 으니 왠지 내가 사랑스러워지는 듯 한 기분마저 든다. 치료 잘 받고 왔으니 닭꼬치를 사내라는 아이 성화에 정문 앞 푸드트럭으 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담장을 휘감고 싹을 틔우고 있는 장미 나무가 보인 다. 만져보니 겨울을 난 가시는 딱딱하고 새로 난 가시는 말랑말랑하다. 식물의 생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이렇게 딱딱해지기 전에 운동해야겠다." 아이에게 하소연하면서 다음 주부터는 미뤄왔던 요가를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올해는 개나리를 못 봤다. 이런, 봄의 유치원생을 놓치다니...... 자고로 봄에는 사람도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봄이 왔다.
by 하유미 |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봄 예찬..
귀한글...
오늘도 함께 합니다
고맙습니다..망실봉님.
한주간 수고 많으셨어요..^^
인생의 봄에 대비해 봅니다.
좋은 글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