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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기원전 43년)
4. 평가와 사후의 영향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든 부정적으로 여기든, 후대에 키케로는 그의 최후가 로마 공화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묘사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4.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키케로는 야심이 높고 자기 자랑도 심했지만 남을 시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가 쓴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략)
키케로는 시칠리아에 재무관으로 가기도 했고, 카파도키아와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악덕이 판을 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로마의 장군이나 총독들은 공금을 몰래 챙기는 것은 오히려 비겁하다는 듯이 아예 드러내놓고 약탈하곤 했다. 그 지방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훌륭한 총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 살면서도 키케로는 돈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태도로 한층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집정관을 지낼 때도 카틸리나의 내란을 잘 다스려 칭찬을 받았으며, 1인 집정관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키케로는, "통치자가 공정한 정치를 해야만 나라에 재난이 없다"는 플라톤의 말을 뚜렷이 증명해 보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우리는 기나긴 고대 로마 역사에 있어 남녀를 막론하고 다른 누구보다 키케로의 생애와 성격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는 공화정 말기에 관해 가장 귀중한 개인의 사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당시의 극적인 사건들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무엇보다 키케로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동시대인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점들을 지닌,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이며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부질없이 수호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중략)
편지에서는 또 연설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결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약하고 우유부단하고 허영심 많고 변명이 많으며, 종종 자기 자신과 남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동시에 총명하고 사려 깊은 이상주의자의 모습과 함께 때때로 영웅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종종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키케로는 궁극적으로 자기 이상을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카이사르보다 1년 반을 더 살았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알맞은 묘비명을 마련해준 사람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였다. 키케로의 작품을 읽고 있는 손자를 보자, 그는 책을 집어들고 한참 읽은 다음 돌려주며 말했다. "얘야, 그는 학식이 높은 분이란다. 학식이 높을 뿐 아니라 조국을 사랑했지."
「로마 공화정」, 데이비드 M. 귄
세계사의 어느 시대도 하나의 인격 속에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그(키케로)보다 더 위대한 자질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엄청난 무게를 갖는다. 권력의 세 가지 요소를 지지하는 그의 결연한 주장은 변할 수 없는 근거 위에 서 있다. 법은 정의를 구현하고, 측정하고, 또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시간이 흘러도, 법은 다른 정치체제 속에서는 확실하게 보호될 수 없다. 공화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인민의 재산이 입법을 통해 주장되고, 정의가 지배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존 애덤스
키케로는 사후 많은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동시대인보다 후대인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제정 로마시대 때도 그러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서 공화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문학, 철학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겨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가로 아직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내용 자체는 그리스에 비해 아주 얕고 천박하다는 혹평도 있으나, 키케로는 로마인으로서는 '그리스나 동방(이집트 포함)에서 수입한 학문'이 아닌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철학과 문학을 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의 계보를 잇는 이상주의적 스토아 철학과 그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정치학 및 수사학을 결합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그 결과 공익을 추구하는 공화정 로마만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철학에 맞게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벌였는데, 위인 중에도 키케로처럼 덕업일치와 출세와 재산까지 전부 이루어낸 경우는 정말 드물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 자체도 엄청나게 잘 썼다. 비슷한 인물로 카토가 있으나, 그는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까 키케로의 고유한 [철학적] 기여는 무엇보다도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이는 단순 번역을 통한 그의 철학적 기여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키케로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키케로는 각 [철학] 학파 중에서 각기 학파를 대표하고 그 학파를 집약적으로 부여줄 수 있는 저자를 고르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진술한 다음, 각각의 입장과 견해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키케로는 표현 양식의 문학적 맥락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탐색한다. 그러니까 [이를 통해서] 자기가 수집하고 정리한 각 학파의 교리와 입장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개별 학파의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 접근과 논의를 제공하자는 것이 키케로 [철학의] 근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 키케로의 저술들은 이러한 점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 모음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키케로의 특징은 현대 독일의 대학 강단에서 진행되는 철학 교수들의 강의 진행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정신-사상의 발전에 대한 해명과 해석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전승되어온 철학 이론들의 합리적 재구성이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 독일 대학 강단의 [강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철학 교수들이 세미나와 독강형 강의(Vorlesung)에서 하는 강의 방식은 키케로가 「최고 선악론」에서 실제로 실연해 보였으며 그가 간략하게 요약-제시했던 작업 방식과, 내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전혀 구별이 가질 않는다.
Gunther Patzig, Cicero als Philosoph, am Beispiel der Schrift "De finibus", Gymnasium 1979(86), p. 311 인용.
또한 키케로가 남긴 수많은 저술들은,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사상적 뿌리가 되어왔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카이사르들이 출현할 때마다, 역시 수많은 키케로들이 출현하여 Res publica(공공의 것, 의역하면 '공화국'), Res populi(인민의 것)를 부르짖었다. 키케로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권력분립 및 상호견제 만큼은 양보할 수 없으며, 이것이 무너진다면 인민은 독재자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라고 호소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훗날 수많은 독재자들의 롤모델이었다면, 키케로는 훗날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의 롤모델이었던 것이다. 비록 살아서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새로운 카이사르의 제물이 되어버렸지만, 죽어서는 수많은 카이사르들을 침몰시킨게 바로 키케로이다. 또한 키케로는 단순히 기존의 체계를 지키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저서 『법률론』에서 공화정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과 개혁적 방안들을 제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기에 "아무런 대안 없는 극렬수구파" 같은 비판을 그대로 듣기도 어려운 인물이고, 동료 귀족들에 대한 단순한 예스맨도 아니었고, 플루타르코스가 저술했듯이 개인으로서도 청렴했다.
또한 공화정 로마의 법 체제는 원로원의 지나친 권한 등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충분히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였다. 물론 소수 귀족들의 집단지도체제에 가까웠던 당대 로마 공화제의 가치를 근대인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키케로에게 그 나름대로 공화정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조차 부여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한 처사일 것이다.
그는 인적이 끊긴 길을 따라 쫓아오는 추적자들을 조용히 기다린 끝에 기원전 43년 12월 7일에 살해되었다. 그는 운명해 가던 공화정을 지키려다가 희생된 순교자였다. 그 연사의 가장 유력한 도구였던 혀와 오른팔이 로마 광장의 연단에 못박힌 채 걸렸다. 그것은 삼두들에게 반대하는 자는 이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잔인한 조치였다.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비판한 것은 무모하고 단견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공화정 말기에서 개인적 영예와 위신을 위한 귀족들간의 편협한 정쟁을 초월하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가 품었던 공화정의 이상, 즉 이탈리아 전역의 공적 있는 귀족들과 기사 계층에서 선별한 한 사람의 지식인 엘리트의 통치를 받는 공화정의 이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순진하고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편협한 이기심의 한계를 넘어선 관심사들에 기초하여 더 나은 세계를 지항하여 세운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의 동료 의원들, 심지어 스토아 학자연하던 카토와 브루투스에게조차 해당되지 않았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적인 공화국은 법이 지배하는 국가였고, 정무관에게 행정권을, 원로원에게 권위를, 인민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국가였다. 그리하면 그 나라의 인민들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면서 일하고, 엘리트들은 지위와 위신에 걸맞는 성취감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키케로의 정치적 숙원은 자신의 출신인 기사계급과 원로원 주류인 귀족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뤄냄으로써 공화정에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실현되지 못한다. 결국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는 모두 키케로가 바라보았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국가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유럽인들이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에 상당히 부합한다. 제정시대의 로마 역시도 이념적으로는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바라보았으며, 중세에도 근대에도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체제는 '강력한 행정권자'와 '권위를 지닌 엘리트'와 '여론'이 균형을 이루던 혼합정 체제였다.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군주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자신들이 행정권을 휘두르되 엘리트의 권위와 여론을 존중하는 군주라고 옹호하였고, 엘리트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군주 혼자 다 해먹으면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인민들은 국가는 Res publica(공공의 것)라는 키케로의 논리를 좋아했다. 이렇듯 그의 논지는 어느 쪽이든 좋게 해석할 여지가 존재했기에 훗날 군주, 귀족,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급진론자 등에게 모두 수용된 것이다. 엘리트들의 권위를 옹호하는 키케로의 논리는 오늘날에는 그 호소력을 상당히 잃었으나, 제아무리 여론이 원하더라도 견제가 불가능한 절대권력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적 호소는 여전히 유효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면모에서 볼 때, 키케로가 민중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키케로는 새로운 법안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방법은 비판을 하였으나, 체제를 흔들지 않고 그 건전성을 올리는 틀 내에서는 인민들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그가 킬리키아 속주와 시칠리아 속주에서 보인 행보는, 그가 공직자로서 품고 있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
로마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을 때 키케로는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강제로 식량을 모아 로마로 보냈으므로 섬사람들은 그를 무척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공정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차차 알게 되자, 그들은 키케로를 지금까지의 어느 총독보다 더 존경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파르티아에서 전사한 크라수스 2세의 뒤를 이어 복점관이 되었다. 그리고 곧 킬리키아의 총독이 되어,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 그 뒤 파르티아군과 싸우던 로마군이 크게 패배하자 킬리키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키케로는 온화한 정책을 써서 그들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로마에 순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보내는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고, 각 지방에서 베풀던 성대한 제사나 잔치도 중지시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 또 그는 많은 공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완전히 뿌리뽑아 각 도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손해를 변상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벌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을 수 있게 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