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시절,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아빠 직업특성상 전학을 많이 다녔었다. 그것도 전국방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곤 했었다. 유년시절은 거의
경북쪽에서 지냈었는데, 경상도로 이사가기 직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잠깐 진천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충북 진천에서도 면소재지인
이월면에 살았었고, 이월면에서도 우리 집은 외딴집이었다. 워낙 집이 외진 곳에 있었기에 동네 친구를 사귈 기회도 흔치가 않았을 뿐더러, 학교에서
집까지 오가는 길도 항상 홀로였다. 기억에 의하면, 나는 항상 심심함을 달래고자 하교할 때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뚝방길을 오갔고, 오고가는
길에는 으레, 산딸기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뱀풀에 찔려가면서도 나는 낑낑거리며 겨우겨우 딸기를 몇 알 주워 먹곤 하였고, 그게 내 유일한
주전부리이기도 하였다. 집으로 오는 길, 어렵게 수확한 몇알의 산딸기가 어찌나 달고 맛나던지. 그렇게 오다보면 어느새 집 근처였고 우리집과
안집을 제외한 주변은 거의 논이 주를 이루었다. 아무리 달려도 달려도 끝도 없을 것 같은 광활한 논이었다. 그렇게 누릿한 논을 보며 오다보면
어느 어른이 허공에 손을 허젓고 있었고,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얼른 집에 가방 놓고 나오라고 하였다.
동생은 엄마 옆에서 메뚜기를 잡는 체를 하였다. 아직 아기라서 잡는 것도 서툴었다.
학교를 갔다오자마자 논으로 나가서 수도없이 풀쩍거리는 메뚜기를 잡아서 피티병에 쑤셔넣었고 반나절 잡고나면 나름 피티병에는 메뚜기가 그득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엄마는 메뚜기를 후레이팬에 볶으셨다. 메뚜기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바둥거리는 튀틱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내코에 스며 들어오면 그게 나는 어찌나 먹고 싶던지. 매정한 엄마는 내게 메뚜기를 잡은 수고값도 못할
단 몇개만 집어먹게 하고는 손도 못대게 하셨다. 이건 아빠의 간식이었다. 작은 반상에 메뚜기를 안주삼아 아빠는 맥주를 한잔씩 하셨고 그러면 나는
또 고새 쪼르르 달려가서는 아빠 나도 한입만! 이라고 조르곤 하였다.
지금도 가끔 메뚜기를 어쩌다 귀하게 한번씩 보곤 하면 그때 생각이 추억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곤 한다. 메뚜기가 그리운 건지, 메뚜기를
잡았던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건지는 분간할 수가 없다. 아마 두번째일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은 이월초에서 했었는데, 당시 이월초등학교는 병설유치원이 따로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 중 그 병설유치원를
졸업한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우리집은 진천에 이사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므로 그 병설유치원 출신 아이들과 나는 전혀 문외인이었다. 입학식날부터
이질감 속에 시작된 따돌림은 결국 나를 끝내 학교에서 친구가 하나도 없는 외톨이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쓰러운 일이지만, 심지어
나는 학교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고 참다가 거의 오줌보가 터질 때쯤 되어서야 종례를 하면 집까지 달음박질로 뛰어가서 화장실을 가곤 하였다.
하다못해 기억속에 의하면 담임선생님조차 내 이름을 잘 몰랐고, 반 아이들도 모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입학식날 보라색 원피를 입었다는 것과 수업 중에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잘해주었다는 것,
칭찬받을 만한 일에는 언제나 포도송이를 상으로 주었다는 것 뿐이다. 젊은 분이라는 것 외에 얼굴이며 목소리, 하다못해 어떤 성격이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진천에서의 기억은 거의 학교에서의 기억보다도 집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더 많았다. 학교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많을 뿐이고 별 것 아닌
기억들이었다. 그 중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한다면, 추억이라기 보다도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사건의 일부였다.
어느날 학교에서 채변검사를 한다고 채변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선생님께서는 언제까지 꼭 본인 채변을 받아올 것을 당부하였다. 나는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그 전날 선생님께서 아직 채변봉투 안가져온 사람은 내일까지는 꼭 가져오라고 해서 부랴부랴 그것도, 당일날 학교 가기
직전에서야 엄마한테 말했다.
참고로 학교에서 교통지도때도 선생님께서 문구점에 가면 노란색 손수건을 파니까 그걸 준비물로 사가지고 오라고 하셨음에도 그 말을 싹뚝
무시하고 집에 있는 노란색 보자기로 손수건을 만들어 주었던 엄마였다. 어린 마음에 그게 어찌나 싫던지, 나는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선생님이 꼭 문구점에 있는 손수건 사오라고 하셨어, 라고 말했고 엄마는 이것도 만들면 훌륭한 노란색 손수건이야, 라고 말씀하였다. 엄마가
만들어준 손수건은 노란색이라기 보다도 황금색, 혹은 겨자색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다. 그땐 그게 어찌나 꺼내놓기 창피하던지 선생님이 손수건을
확인한다고 다들 들어서 머리 위로 들어보이라고 했을 때도 나는 한참 머뭇하다가 겨우 꺼내서 들어보였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런 사건이 있고 얼마 또 안되어 엄마한테 채변 봉투 이야기를 하니 엄마는 처음에는 온가족 모두 집합해서 채변을 받아내려고 온갖
애를 쓰셨고 나 역시 초죽음이 될 때까지도 애를 썼음에도 안되어 엄마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기절초풍할 만큼 엽기적인 것이었다. 그건 바로
안집에 있는 큰 개의 변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안집 개의 변은 덩치만큼이나 푸짐하게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엄마는 나무젓가락으로 똥을 한움큼 푹
떠서 채변 봉투에 담아주었다. 가져가기 싫다는 내 소스라침에도 아랑곳없이 엄마는 봉투를 내 가방에 직접 쑥 넣어주었다. 결국 나는 어쩌다가 정말
운이 없게도, 개의 변이나 운반해야 하는 신세를 져야만 했다. 고모가 입학 전 사주었던 쓰리세븐 빨간색 가방 안에서 개의 똥 냄새가 쿰쿰하게
올라왔고 나는 겨우 개욱질을 참곤 학교까지 가야만 했다.
드디어, 채변을 걷는 시간이 왔고 선생님은 걷는 내내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선생님이 코를 막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데에는
선생님도 코를 막을만큼 냄새나는 변 따위를 왜 학교에서 굳이 걷는 건지를 속으로 원망했기 때문이었다. 교탁 한쪽 바구니에 덩그라니 모여져 있는
변 덩어리들은 주번의 수고로 결국 밖을 나갈 수 있었고 선생님은 여전히 코를 막으며 창문을 열으라 지시도 하였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나 검사결과가 나왔고 가장 먼저 이름을 불린 건 나였었다. 선생님은 나보고 심각한 검사결과가 나왔다며 별별 기생충이
다 나왔다고 하였다. 온갖 갖가지 색색깔의 약들이 담긴 기생충 약을 전달 받았고, 나는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느 활발한
아이 같았다면 이건 우리 집 강아지꺼야! 라고 소리 질렀음직도 했지만, 순진했던 나는 온통 얼굴이 붉혀져서 받았으니 아이들은 정말 그게 내것인양
온통 안되었다는 투로 쳐다보며 떠들기에 바빴다.
변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반짝이게 예뻤던 쓰리세븐 가방의 수모는 더욱 더 큰 것이었다. 엄마는 급한 마음에
변을 얼렁뚱땅 가방안에 넣으셨던 건지, 변의 잔여물이 온통 가방 주변과 책 사이로 끼어들어서 난리도 아니었다. 특히 즐거운 생활이라는 책에는
군데군데 똥이 들러붙어서 떨어질줄을 몰랐고 즐거운 생활 시간만 되면 나는 책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 해야 했었다. 옆 짝꿍은
새침하게 생긴 여자아이였는데, 나를 보곤 냄새난다며 저리 떨어지라고 화를 내기 일쑤였다. 십원짜리 동전의 썩은 내가 내 코에도 지독하게 진동을
했으니 옆 짝꿍은 오죽했겠는가. 결국 나는 1학기가 끝나자마자 만세를 부르며 그 즐거운 생활 책을 가장 먼저 버렸더랬다.
그 때만 해도 쥐는 왜 그리 징그럽게도 많던지. 더군다나, 우리 집이 논바닥 바로 옆에 살아서였던지 더욱더 그랬었다. 밤만 되면 슬레이트
지붕위에서 달음박질하는 쥐들 때문에 도통 잠을 쉽게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침에 세수하러 화장실에 가보면, 쥐들이 비누를 파먹은 자국이
나있고, 부엌에는 온갖 쥐들이 싸놓은 배설물로 난리가 아니었다. 엄마는 한때 쥐들을 박멸하겠다며 쥐 끈끈이를 집안 곳곳에 놓기도 하셨지만
지금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큰 효과는 못봤던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히 부모님은 진천을 지나쳐 오다가 뭔가에 이끌리듯 그때 살았던 이월면 집을 찾아가봤다고 하셨다. 이미 허물어져 흔적도
없어졌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때의 집은 지금도 여전했고 엄마는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고 하셨다.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자취를 보고 나니, 안심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 때의 추억이 문득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 엄마가 핸드폰 사진으로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에는 그 당시 우리가 살았던 집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듯 했다. 여전히 사람이 사는 듯 문 안쪽에 쳐져 있는 모기장과 밖에 세워놓은
빨래줄에 빨래들이 그걸 말해주었다. 젊은 부부가 사는 집인듯, 어린 아이들의 옷가지도 빨래줄에 걸려 있었다. 엄마는 그 사진을 저장해두고
두고두고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집 식구들도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곧 좋은 집으로 이사가겠지, 라고 말이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에는
마치 우리가 진천에 살았던 가난한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듯 짠한 마음이 녹아들어 있었다.
첫댓글 담담하게 써 내려간 유년의 추억이 방울방울 맺힙니다. 깔끔한 표현도 좋구요. 다만 군더더기가 눈에 거슬립니다. 퇴고를 하면서 좀 더 정제된 글을 쓰시면 잘 된 글을 쓰실것 같습니다. 건필하세요. ^
네 아직 초고인데다 손가는데로 쓴지라 수필치고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