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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마르코 10,46ㄴ-52
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 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주님의 또 다른 얼굴, 고통>
매일 와 닿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어떤 분은 자신의 힘겨운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세상살이 고달픈 실상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어찌 이리 참혹한지요?
언젠가 이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이, '다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이 거추장스런 육신을 훌훌 벗어버리고 영혼만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하소연입니다.
때로 하루를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루를 견뎌내려고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욕과, 좌절과 눈물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이다.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때로 끝도 없는 지루한 일상과 맞서야 하고,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너'란 존재를 묵묵히 견뎌내야 합니다.
나란 존재가 안고 있는 비참함도 참아내야 합니다.
가식과 위선, 모순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서 그저 바보처럼 웃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바르티매오란 눈먼 거지가 그러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심연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은 바닥났고,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게 된 그는 점차 세상에서 잊혀져갔습니다.
완전히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한심스러웠습니다.
너무도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죽고만 싶었지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온 이상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뭔가 세상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본능적 욕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그런대로 습관이 되어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늘 남들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게 된 가장 직접적 동기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겪어왔던 답답함, 미칠 것만 같은 마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생각, 바로 그것들이었습니다.
극심한 삶의 고통, 비참함, 자존심 상함, 모욕 같은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바르티매오의 인생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보란 듯이 한번 살고 싶다'는 생각에로 그를 이끌었고, 결국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그 누군가가 바르티매오처럼 답답함, 비참함, 모욕, 자존심 상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너무 슬퍼할 일이 아니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쓴 간절한 외침,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열렬한 갈망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기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하루하루라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는 우리 삶을 대대적으로 바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은총의 순간이 반드시 다가올 것을 굳게 믿으며 하루하루 용기를 내고 그분께 매달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에 기뻐하는 바르티매오를 바라보며 제 지난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정녕 생각하기도 싫은 불행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짓누르던 끔찍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값진 은총의 순간이었군요.
그 순간은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 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은 제 자신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정화와 은총의 순간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병고에 시달리며 허우적거리던 순간,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응답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0주일 강론>
(2024. 10. 27.)(마르 10,46ㄴ-52)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ㄴ-52).”
1)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있는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단순히 ‘시력 회복’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새 인생’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 인생’은 ‘새 직업’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신앙인)의 삶’, 또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이었음도 나타냅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시력회복만을 원했다면? 그리고 시력이 회복된 뒤에 새 직업을 갖게 되는 것만을 원했다면?
그러면 이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면?
살던 대로 살기만을 바라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즉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났을 것이고,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 선포에 관심 갖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이었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기득권층 사람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반 서민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소외계층 사람이든지 간에,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한 사람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복음 선포를 외면했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만족하는 것은 아닌데도 변화 자체를 두려워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개하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쇄신’이나 ‘개혁’ 같은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으려고 하면
저항하고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2)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하신 말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5,34).
두 이야기는 겉으로는 차이점이 많지만, 현재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는 점과
완전히 변화된 ‘새 인생’을 갈망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두 사람의 희망과 간절함에 초점을 맞추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단순한 ‘치유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새 인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영적으로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은 당장 눈앞의 일에 대한 소원이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생활입니다.
<세례식 때 흰옷을 입는 것은 새로 태어났음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