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1956년 8월 10일 전북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에서 아버지 이동석, 어머니 양선녀의 2남으로 출생. 본명은 이덕구였으나 어머니가 김호열과 재혼, 김호열의 호적에 1967년 10월 23일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 천호상고 졸업.
1980년 12월 6일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1981년 12월 27일 일본의 오꾸보 가스히로를 3회 KO로 꺾음. 1982년 2월 28일 챔피언 김광민을 꺾고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이 됨. 1982년 6월 5일 이영미와 약혼하고 1983년 6월 23일 유복자 김지완 출생. 프로권투 전적은 20전 17승 2패 1무승부. 1982년 11월 18일 미합중국 라스베이가스 데저트스프링 종합병원에서 사망(이상 故김득구 묘비 비문에서 발췌).
신문기사에 따르면 김득구는 그 전 해 동방생명에 1백만 원짜리 무지개보험에 가입, 최고 1천만원까지의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82년 당시, 일간스포츠 1부 가격은 130원이었다. 지금은 600원이다.) 당시 김득구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은 1억1700만원.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억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김득구가 사경을 헤매자 대한항공은 김득구 어머니의 미국행 항공권을 무료제공했고 어머니 양소선씨는 미국에서 코마 상태의 아들의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는데 동의하였고, 사후 김득구의 신체장기는 두 명의 미국인에게 이식되었다.
영화에서 김득구의 애인...임신소식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약혼녀 이영미 씨는 김 선수 사망 이후 가족들과 보상금 문제로 인해 갈등을 빚기도 했다. 현재는 트로트 가수와 결혼 후 서울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김득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주변과의 소식을 끊고 살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 김득구의 비극적인 운명의 산고끝에 태어난 아들은 건장한 청년으로 장성했다. 성장하면서 어머니 이영미 씨로부터 아버지가 링 위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이 아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되겠다며 복싱체육관을 드나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