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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소위 '블랙데이'라는 날이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혼자 보내야 했던 싱글들이 검은 옷을 입고 짜장면을 먹으며 마음을 달래는 날이라고 한다. 젊은 친구들에겐 비공식 기념일이라 하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짜장면이란 어릴적 추억을 간직한 음식 이상의 그 무엇이다.
나에겐 특별한 두 개의 찌장면 추억이 있다.
하나는 국민학교 시절의 짜장면이다. 동네 불알 친구의 아버지는 면의원을 지낸 마을의 유지였는데, 제주의 말들을 모아 사서 육지로 파는 장사를 했다. 어느 정도 말이 모이면 말들을 항구가 있는 제주시 서부두로 몰고 가야했다. 비포장 자갈길이었던 신작로(新作路) 일주도로를 말을 몰고 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향마을 마을에서 제주시 까지는 약 17km다. 잰 어른 걸음으로는 3시간이 채 안되는 거리지만, 이따금 먼지를 날리며 지나는 버스나 트럭에 말들이 놀라 날뛰기도 하는 길이라 새벽에 출발해도 점심때가 되어야 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두에 무사히 말을 인도하면 수고비를 나누어 주었다. 얼마를 받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받은 돈으로 동네 형들과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먹고, 그리고 칠성통에서 영화 한편을 보고 나서 집으로 가는 버스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 시골 어린 무지랭이들이 짜장면을 먹는다는 건 이런 경우가 아니면 거의 없었다.
두번째의 추억은 군대에서다. 그 당시에 제주 장병자원들은 거의 해병대로 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주장병들을 해병대로 훈련시키는 것은 전쟁이 나면 제주의 예비역들을 육이오 인천상륙처럼 상륙부대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1973년 7월 징집대상자들은 해병대 자원이 넘치는 바람에 광주에 있는 육군31사단 훈련소로 입소했다. 5대불순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모골이 송연하도록 징한 전라도 욕을 먹어가며 뙤약볕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과 기합을 견뎌야 했다. 해병대 못지 않은 훈련강도였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얻어 터지는 건 일과였고, 맘 편하게 잔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훈련을 마치고 원주에 있는 보충대를 거쳐 '똥가대'라 스스로 못나게 부르던 통신가설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군수행정 교육을 따로 받았지만,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주특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통신가설부대로 가게 되었다. 과꽃이 피기 시작하는 초가을 자대배치를 받고 첫 외출허가를 받아 원주시내로 나가게 되었다. 동기들 끼리 시내를 우르르 다녔지만 군바리들이 무어라고 할 일이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켜 먹은 다음 지하다방에서 죽치다 부대로 복귀했다. 점심에 먹었던 짜장면, 세상에 이 보다 더한 음식은 없었다. 그러나 허겁지겁 담았던 그 민간음식을 나는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다. 쓰린 배를 쥐어 안고 엉성한 군대 칙간에서 용을 쓰던 그날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어쩌다 과꽃을 보면 그 날의 몹쓸 짜장면이 떠오른다.
흔히 짜장면은 중국의 음식이라고 여기나, 중국의 자지앙미엔(炸醬麵)은 대한민국의 짜장면과 다르다. 짜장면은 1905년 인천의 공화춘에서 최초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짜장면을 만들었다. 공화춘은 한국으로 진출한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이 값도 싸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야채와 고기를 넣고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는 짜장면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0년대 중반, 영화장유에서 개발한 한국 최초의 면장 제품인 사자표 춘장이 중국의 춘장에 캐러멜을 첨가하면서 본격적인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하게 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펼친 분식장려운동과 조리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점이 산업화 시대와 맞아 떨어지면서 짜장면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35> 청운동 ‘중국’의 짜장면 잘게 간 고기·야채 파 기름에 달 달 달 짜장 입에 감기네
|제370호| 2014년 4월 13일 <중앙Sunday>
▲ ‘중국’의 짜장면. 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영업시간 전부터 기꺼이 줄을 서는 사람이 많다.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정호승 시인의 ‘짜장면을 먹으며’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의지가 되는 음식이라… 이렇게 멋진 헌사를 받는 음식이 우리에게 짜장면 말고 또 있었을까? 괴테는 인생의 고난을 얘기하면서 ‘눈물 젖은 빵’을 얘기했지만 우리는 ‘눈물 젖은 짜장면’이 그 역할을 대신해 왔다.
짜장면을 먹으며 정 호 승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검은 밤이 올지라도 짜짱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살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이 노래 가사 한 구절 때문에 눈물을 훔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짜장면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곁에서 함께 해온 대표적인 소울 메이트(Soul mate) 음식이다.
노래를 들으시려면 들으시려면 상단 중앙의배경음악은 잠시꺼주세요~♬
짜장면을 먹을 때면 수많은 추억이 생각난다. 학교에 입학했다고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주셨던 짜장면,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몰래 나가서 한 젓가락에 털어 넣었던 짜장면, 가슴 두근거리는 상대와 처음으로 마주 앉아서 촌스럽게 보일까 봐 마음 졸이며 먹었던 짜장면, 추운 겨울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시골 중국집에서 달게 먹었던 짜장면 등등. 이렇게 켜켜이 쌓인 추억들이 양념으로 뿌려지면서 짜장면은 언제 먹어도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2 '중국' 외부 모습. 3 내부. *사진 주영욱)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추억을 곁들여 먹는 짜장면도 좋지만 그런 감성 양념을 제외하고도 객관적으로 맛있는 짜장면이 어디 있을까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주위 분들에게 소개도 받고 검색도 해보고 하면서 찾아 보았는데 역시 짜장면은 ‘제 눈에 안경’ 식으로 자신만의 감성이 담긴 맛을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 헛걸음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찾아낸 곳이 청와대 부근 청운초등학교 옆에 있는 ‘중국’이라는 작은 중국음식점이다. 사장 겸 요리사인 문경철(48) 사장이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영업 방식이 독특하다. 그날 판매할 음식 재료를 아침에 준비해서 영업을 시작하고 그 재료가 모두 떨어지면 끝낸다. 시작 시간이 오전 11시30분인데 요즘은 오후 2시 이전이면 영업이 모두 끝난다. 이들이 이렇게 운영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남는 시간에는 재미있게 원하는 일을 하면서 놀러 다닌다. 부부가 함께 서예도 배우러 다니고 태극권도 한다. 근처 화랑을 돌아다니며 그림 공부를 하기도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자신들이 행복한 것이 중요하고, 자신들이 행복하면 만드는 음식도 더 맛있어지고, 그 음식을 먹는 손님들도 함께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유쾌한 사람들이다.
문 사장은 원래 중국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였다. 대만에 석사과정 유학을 갔다가 중국 음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유명 중국 음식점들에서 요리 수업을 받고 나름 경험을 쌓은 다음에 2001년에 자신만의 식당을 시작했다. 이분의 요리 철학은 한마디로 ‘최선을 다해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간 모아온 중식요리책이 무려 3000권이 넘는다고 한다.
모든 요리는 자신이 직접 만든다. 그날 그날 준비한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다. 온도와 습도에 따라 면 반죽과 음식의 간을 다르게 하는 세심함까지 기울인다.
‘중국’에는 다른 중식 메뉴들도 있지만 나는 짜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유니짜장(肉泥炸醬) 스타일로 고기와 야채를 모두 잘게 갈아서 만든 소스는 먹기에 편하고 부드럽다. 전체적으로 고소한 맛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인데 다른 중국집에서는 귀찮고 복잡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 파 기름을 이용해 조리하기 때문에 그런 맛이 난다는 설명이었다. 단맛이 좀 강한 편이지만 입맛에 불편하지 않고 착 감긴다. 약간 싱겁고 재료에서 우러나오는 뒷맛이 좋아서 맛의 여운을 오래 느낄 수 있다. 조미료를 넣기는 하지만 재료의 맛을 덮지 않아 의식을 하지 못할 정도다.
적당히 쫄깃거리는 면발은 굵기도 적당하다. 먹고 나면 ‘아 잘 먹었다’는 느낌이 드는 중독성이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최고의 짜장면이 있다. 그 맛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어차피 불가능하다) 이 정도 수준이면 현재를 사는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4000원이라는 착한 가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짜장면이어서 더 맛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래 저래 짜장면의 맛은 감성이 중요한 모양이다.
*중국~서울 종로구 청운동 59-4 전화 02-737-8055. 일요일에는 쉰다. 영업 시간이 짧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에는 쉴 새 없이 바쁘다. 전화로 방해를 안 해줬으면 하고 당부를 했다. 짜장면 보통 4000원, 곱빼기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