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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식.책.문화.인물 스크랩 [지식] 유교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도덕권력
시사랑사람들 추천 0 조회 51 08.01.24 00: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교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도덕권력



김상준 (경희대 NGO대학원)




1.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무엇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귀족 혈통이 제약하는 바’ 또는 ‘귀한 신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Oxford English Dictionary). 과거 봉건시대의 영주는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는 농민 또는 농노들이 극한 상황에서 굶어죽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이는 커다란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 프랑스의 유력한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였던 토크빌의 말에 따르면, 봉건시대의 영주들은 비록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압제자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그들을 보살피는 보호자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유럽과 같은 봉건 영지(領地)를 영유하지 못했던 중국과 조선의 향촌 사족(士族)들도, 예컨대 주희(朱熹)가 제안하였던 바와 같이 사창(社倉)을 두어 평소에 양곡을 축적하였다가 흉년에는 굶어죽는 농민들을 구제하자는 발상이 존재했었다.


귀족집단에 절대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농민들을 보호할 의무란 동시에 그들의 부와 권력의 인프라를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하는 관리술이기도 하였다. 결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결국 압도적으로 우월한 귀족의 지위와 권력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 용어 자체가 이렇듯 신분적 함의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구미권에서는 진지한 맥락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의 어떤 상류층 인사가 거액을 사회복지재단에 희사하였을 때 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누군가 표현했다면, 여기에는 진심으로 칭송한다는 느낌보다는 다소 꼬집고 비트는 뉘앙스가 강하게 내포된다. 이런 경우의 희사는 보통 자선(philanthropy[미국], charity[영국])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에는 귀족적 신분주의의 요소가 탈색되어 있다.


어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는 신분제 사회의 지배층이 힘에 의한 절대적인 권력의 우위를 향유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그들보다 하위 신분에 대해 어떤 도덕적 권위 역시 행사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그 도덕적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러한 도덕적 권위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신분적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한 권위는 단순히 생존을 위협받는 가난한 농민의 경제적 생존을 보장해 주는 정도 이상의 어떤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신분적으로 훨씬 비천한 지위에 있지만 귀족보다 많은 부를 소유할 수 있었던 특정 상인이나 부농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덕적 권위를 확보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상인이나 부농으로 큰 재산을 모아 그 일부를 어려운 빈민에게 베푼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선행은 결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불리지 않았다. 상인과 부농이 아무리 도덕적인 행위를 하였다고 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른 신분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모종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도덕적 권위를 획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경제적인 관대함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파생적인 요소는 될지언정 그 핵심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러한 강력한 도덕적 권위를 형성하는 핵심적 요소는 무엇일까?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그들 신분적 지배층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것, 더 나아가 죽음을 고결한 의무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덕적 권위의 핵심은 죽음, 다시 말하면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일단 유럽의 봉건시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의 귀족의 제1의 특징은 무장한 세력, 武人․戰士라는 점이다. 과거 봉건시대 프랑스에서 농민들은 대귀족들을 독수리, 매라고 불렀고, 별 볼 일 없어진 영락한 소귀족들조차 작은 솔개라고 불렀다. 그들은 귀족을 사나운 육식성 맹금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공격성, 육식성이 어떻게 도덕적 권위로 화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는 양과 양치는 개의 관계와 유사하다. 귀족들은 양치는 개처럼 사납게 양(농민)을 몰아 부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존재, 즉 농민들은 귀족들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즉 귀족은 공동체 바깥의 침략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지켜주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오직 눈앞의 생존만에 연연하지만 무장한 귀족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존재다. 봉건 유럽에서는 말 타고 무장하여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의무이전에 권리이기도 하였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전개했던 어법에 따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warrior)들이 지배자, 귀족이 되고, 이들은 죄의식 없는 당당하고 굳센 힘의 도덕, 행동의 도덕의 주체가 된다. 그들 도덕의 핵심은 죽음을 이겨낸 용기와 힘에 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의무를 넘어서서 유쾌하게 맞이하는 삶의 궁극적 타오름에 이른다. ‘사망의 권세를 누가 이길 것이뇨....’ 성경의 말씀을 이들 전사 귀족들은 말 위에서 목숨을 건 투쟁의 유희 속에서, 즐겁게, 영웅적으로 이겨냈다. 사망의 권세를 이겨낸 이들의 권력은 따라서 그렇지 못한 나약하고 겁에 질린 모든 이들 위에, 즉 생존에 급급한 모든 노예들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한다. 무장 자체의 물리적 권력보다 죽음을 이겨낸 용기가 가져다 주는 도덕적 권위는 더욱 강하다.


잠시 옆길로 빠져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데, 우선 그 말을 정말이지 ‘귀족’으로의 자기의식을 가지고 사용하고 있는 분들에게 감히 여쭙고 싶은 말이 있다. 정말 당신들은 앞서 말한 귀족들처럼 명예롭게, 고결한 의무로서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안타깝게도 긍정적으로 답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 현실이다.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용감하게 큰 소리를 내어 전쟁 불사의 강경론을 펴는 분들의 면면과 이력을 보면, 실은 막상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아니 정말로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기라도 한다면, 누구보다 빠른 정보력과 재력에 기초하여 누구보다 빨리 짐 싸서 이 나라를 떠나실 분들, 즉 항상 편하고 안락하고 따듯한 곳만 찾아 다녔던 분들이 아닌가 한다. 앞과 뒤가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고결한 의무로서 명예롭게 죽겠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죽음과의 본질적인 연관에 대해 커다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만 과거 고대, 중세 귀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내포된 필사적인 심각성, 진지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너무나도 가볍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운위하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는 뜻일 뿐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어휘가 한국의 식자층에 회자하고 있다는 현상 자체도 아주 입맛을 쓰게 한다. 영 엉뚱한 이야기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 어쨌든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신(新) 신분주의, 신(新) 귀족층이 한국사회에서 어느 정도 정착했다는 사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 신분주의 귀족층을 아예 발벗고 옹호하고 변호하고 나서는 사람들에게야 일촌(一寸)의 언급조차 더할 이유가 없겠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의 수단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어휘를 동원하는 측도 이러한 ‘신분적’ 불평등 구조의 정착에 대한 경계가 미약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2. 유교사회의 경우


서양에서야 전사(戰士)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었던 만큼 죽음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이라는 이 글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문사(文士)가 지배층을 이루었던 유교 사회, 조선 사회에서 그 말은 들어맞지 않을 것 같다는 반론이 있겠다. 절반은 맞는 지적이다. 말을 타고 창칼을 휘두르는 것이 의무 이전에 영광이요 권리였던 것이 고대 그리스․로마 그리고 중세 유럽의 귀족이었다(중세 일본도 그러하다). 반면 유학자들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서열에서 아예 무(武)라는 층은 제외를 시켜버릴 만큼 무인들을 경멸하고 경계했다. 그렇다 보니, 최근 대선에서의 모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 시비를 놓고 그 후보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공격했던 일각의 비판 시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그 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헛다리짚기였던 셈이다. 유학자들에게 병역(조선시대에는 軍役이라 불렀다)은 결코 고결한 의무가 아니라 천역(賤役)이요 수치였을 뿐이다. 물론 유학자들과 일종의 권력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군주들은 유학자들에게도 병역을 지워 보려고, 그것이 안되면 최소한 병역세(軍布)는 내게 해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양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그 모든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곤 하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어법으로 하자면, 병역기피는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체 높은 귀족의 자제에게 병역 의무를 강요했던 여론이 염치와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셈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유교사회의 지배층들에게는 이런 군사적 의미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게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조선시대 임진․정유 양 왜란 때와 한말 민비 시해이래 향촌의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 침략 세력에 맞서 일종의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사례를 되새겨 본다면, 유교 지배층에도 군사적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지극히 비상한 사태 속에서의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세 유럽과 같이 귀족의 군사적 의무로 좁혀 생각할 때, 유교사회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모습을 일반적, 일상적 상황 속에서 찾아보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이 글의 모두에서 말했듯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귀족층의) 고결한 의무로서의 죽음, 그러한 죽음에 기반한 권력으로 보아 해석의 층위를 한 단계 깊이 내려 일반화한다면, 유교사회의 지배층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 양상은 유럽의 그것에 비해 오히려 더 강렬하고 치열한 것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과연 무인․전사가 아닌 자로써 기꺼운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겨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시 한번 니체의 통찰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노예의 도덕, 사제(司祭)의 권력을 말한다. 무인․전사는 싸움터에서 적을 격멸하는 투쟁 속에서 기꺼이 죽어가지만, 기꺼운 죽음은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의 폭력에 스러져 가는 약한 자의 뇌리에 이 세상은 불의하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각성이 생겼을 때, 그는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의 폭력을 이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예의 도덕이고, 이 도덕을 교리화시켜 이 교리의 지킴이가 되는 것이 사제다. 사제는 폭력으로 가득 찬, 강한 자, 칼을 쥔 자의 세계가 아닌, 이러한 폭력을 악으로 표상시켜 내는 또 다른 도덕의 세계의 권력자다.   


현실정치의 중추에 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유학자들을 노예와 사제에 비유하는 것이 걸맞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이집트든 중세 유럽이든 사제가 행사했던 엄청난 권력을 상기한다면 사제의 비유는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노예의 비유도 일견 지나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교궁정의 신료들이 자신들의 왕을 위한 노력을 견마지로(犬馬之勞)라고 하여 자신을 개와 말로 낮추는 것은 당시에는 단순한 수사법만은 아니었다. 신(臣)은 갑골문을 보면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의 형상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노예라는 뜻을 가졌다. 비잔틴 제국에서 술탄의 각료들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들의 신분은 실제로 노예였다. 독자적 영토와 무력을 갖추었던 중세 프랑스 귀족들조차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들어가 가운을 들어다 바치고 세숫물 떠다 바치는 일로 일신의 부귀를 도모하는 처지로 전락했을 때, 그들은 사실상 노예로 전락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꼬집은 후일의 사가(史家)들은 단순히 말장난을 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세습되는 독자적 영지(領地)도 없고, 자신만을 위한 기사단을 거느리지도 못한, 오직 공자왈 맹자왈 외워대는 지식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물리적으로 보자면 절대적으로 무력한 유학자들을 강력한 최고 무장인 왕 앞의 노예라고 비유하여 지나칠 것은 없다. 유학의 유(儒)란 연약하다, 나약하다는 뜻의 유(柔)와 통했던 말이었다. 



3. “見死不更其守”의 정신과 유교적 도덕권력


이렇듯 여느 문명권의 왕의 신료 중에서도 물리적으로 가장 무력했던 유학자들이 역사가 입증하듯 그렇듯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유자(儒者) 집단이 일찍이 니체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강력한 도덕 권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유자(儒者)는 역사적으로 보면 士에서 비롯한 집단이다. 士란 先秦 봉건시대 제후의 방계(傍系)가 많은 가지를 친 끝에 어떤 특정한 관직과 봉록을 확보하지 못하는 데 이른 계층을 말한다. 결국 士란 비록 제후의 혈통에서 유래되었지만 사실상 일반 평민과의 경계선에 이른 신분 층을 말한다. 이러한 신분하락 때문에 공자가 애초에 그랬듯 이들은 더 이상 말이 모는 수레를 탈 수도 없고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무장도 못된다. 이런 士 신분은 춘추전국 시대에 오직 그들의 학문적 능력과 지략의 힘으로 출세의 계단을 타고 올랐다. 그들 중 역사와 의례를 전공하여 학파를 이루었던 것이 儒家다. 후일 儒家가 제자백가의 경쟁에서 최종승자가 되고 나면 士란 儒와 사실상 동의어가 된다. 조선에서도 士族이란 유학을 業으로 하는 유학자 층을 지칭하게 된다. 


더 이상 칼 차고 말 탈 수 없게 된 士 신분이 말과 칼을 독점하고 있는 상층 제후 신분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모종의 복잡한 심리가 작용하였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말과 칼, 즉 무사적 폭력의 세계와 그 세계의 모랄은 거부와 반발의 대상이었음과 동시에 선망과 희원의 대상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된 요소의 뒤엉킴이 士 신분의 정치관과 모랄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즉 그들은 철저히 반폭력적인 정치사상을 전개하되, 그들의 행위양식에는 武人적인 결연성이 강하게 잔존해 있다.


유교의 주요한 고전적 텍스트의 하나인 <예기>의 「儒行」편의 다음 구절에서 그 모순적 뒤엉킴은 뚜렷이 드러난다. 아래 구절은 공자가 노나라 군주인 哀公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라 한다.


애공이 가로되, 감히 유자(儒)의 행하는 바를 묻고자 한다 하였다. 공자 답하여 ... [중략] 유자는 금과 옥으로 보물을 삼지 않고 충과 신으로 보물을 삼고, 토지를 바라지 않고 義를 세워 토지로 삼고, 많은 곡식을 바라지 않고 글을 많이 읽어 부로 삼습니다. [중략] 유자는 이렇듯 잘 드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기 어렵습니다. 또 의가 아니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군주의 뜻대로] 기르기 어렵습니다. [중략] 유자는 ... 이익 때문에 義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유자의 뜻을 뺏고자] 다중의 힘을 동원하고,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그를 강제하려고 하면 유자는 죽음을 뻔히 보고서도 지키고자 하는 뜻을 바꾸지 않습니다.1) 맹수와 맹조가 후려치듯 덤벼들어도 유자는 결코 자기의 용맹과 힘을 계산하지 않고 맞서고, 무거운 무쇠 솥을 끄는 것 같은 어려운 고비에도 자신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지 않고 여기에 대적합니다. 


유자가 가진 것은 忠信의 붉은 마음과 義와 文 뿐이다. 현세적 쾌락과 물질적 부로는 유자의 높은 뜻을 살 수가 없다. 현세적 수단으로 조종되지 않는 신하란 왕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영 부려먹기 어려운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렇듯 까다로운 도덕관을 가진 유자의 뜻을 마음대로 구부려 써 보겠다고 힘을 동원한다면, 유자는 그 억압과 강요가 아무리 무섭고 가혹한 것이더라도 유자는 여기에 죽음으로 맞서 결코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 지키고자 하는 것을 바꾸지 않는 것(見死不更其守). 이 정신이 바로 유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志操이다.


이 지조의 정신에는 폭력에 대한 원천적 반항과 함께 무인의 결사적 투쟁 도덕이 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이미 말과 칼을 박탈당한 신분으로서 그들의 명예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이렇듯 반폭력의 정치사상과 결사적 저항정신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유가의 반폭력의 정치사상이야말로 유교에 윤리종교적 특징을 부여한 요점이다. 세계 윤리종교들(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 힌두교) 모두가 현세적 폭력에 대해서는 일단 기본적으로는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유교의 반폭력주의는 다른 경우들에 비교하여 특이하게 비타협적이다. 다른 윤리종교들은 현세적 폭력에 대해 어느 선에서는 정당화하거나 타협하고 용인하는 반면, 유교는 극히 비상한 상황이 아니라면 폭력의 행사에 대해 반대한다.


그 이유는 역시 유자 집단이 무력 수단을 박탈당한 신분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유자 집단은 이러한 신분적 상황을 폭력 행사 자체에 대한 철저한 윤리적 반대의 교리를 세우면서 극복했다는 점에서 법가 등의 현실정치파와는 크게 다르다. 맹자가 이야기했듯 공자의 저술과 가르침의 요체는 세상이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군주를 죽이기 때문에 세상이 타락하였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데 있었다. 부친살해(patricide)와 군주살해(regicide)는 춘추전국의 상황에서는 상통하는 현상이었다. 군주는 아비거나 삼촌이요 신하는 아들이거나 조카거나 하였던 것이다. 즉 맹자가 이른대로 같은 피를 나눈 귀족들끼리의 전쟁(骨肉相爭)이었던 것이다. 아비를 죽이는 아들이나 군주를 죽이는 신하는 필경 용력이나 야망이 남다른 자들이었을 것이고, 이들은 필경 남다른 지도력을 가지고 보다 아비와 군주의 지위를 찬탈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무력을 기를 수 있는 자였을 것이다. 유자란 법가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이러한 현실정치의 냉혹한 승자들을 위한 마키아벨리적인 전략전술 서비스 대신 그러한 패도정치를 맹렬히 규탄하는 길을 택함으로서, 칼의 권력이 아닌 도덕의 권위, 즉 니체의 용어로는 사제의 권력의 길을 택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패권을 추구하는 군주들의 입맛에 맞기는커녕, 그러한 패권 추구를 비타협적으로 비판하는 유자 집단은 언제나 戰國 상황에 있는 군주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냉대를 받거나 아니면 생명을 위협을 늘 무릅써야 하는 신세였다. 공자와 같이 비교적 담담한 화법을 가진 사람은 그나마 냉대 받으며 천하를 주유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맹자와 같이 도전적이고 논쟁적인 화법을 구사했던 사람은 생명이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한두 번 넘긴 것이 아니었다.


<맹자>의 첫 장을 열면 양나라 惠王과 맹자의 유명한 대담이 나온다. 혜왕이 묻기를 당신이 현명한 분이라 하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책을 말해달라 하였다. 맹자가 대뜸 말하기를 어찌 임금으로서 義가 아닌 利를 찾는가 라고 맹렬하게 반격한다. 결국 利를 추구하는 자는 위 사람을 속이고 찬탈할 사람이라는 요지의 반론이었다. 또 나중에 혜왕의 아들인 襄王에게는 천하의 牧者라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임금 중에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살벌한 전쟁상황의 일국의 군주에게 이처럼 겁없이 직격탄을 날리던 이 백면서생은 그의 가슴에 아무리 호연지기를 품고 있었다 하더라도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맹자는 “산다는 것 역시 바라는 바이지마는 義 역시 내가 바라는 바이다.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을 때는 삶을 버리고 의를 선택할 것이다” (「告子上」)라는 고백조의 결의를 남기지 않았을까.


후대의 많은 유학자들이 맹자의 결연한 태도를 뒤따랐던 것은 굳이 여러 사례를 들 필요조차 없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만세의 사표가 되는 유자의 모습이란 바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소리를 하고 구차한 삶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맹자의 결연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죽음에 대한 敢然한 태도는 그저 산다는 것에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렇듯 두려움을 일으키는 경외감이야말로 유자들이 획득한 절대적인 도덕적 권위, 즉 유교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이었다.


유자의 군왕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폭력의 정치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聖王의 정치론, 즉 도덕적 교화의 성군론을 펼친다. 현실정치의 중심인 군왕에게 이상정치의 성군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유자의 열렬한 충의의 대상은 그들의 이념 속의 성군이었다. 그들은 도덕을 무기로 힘을 제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자들의 도덕정치가 니체가 묘사했던 노예의 도덕을 넘어서는 지점은, 유자들은 단순히 무력한 자의 피동적 죽음으로, 현세가 아닌 차세에서 정의가 구현될 것이라는 교의로, 강자를 도덕적으로 넘어선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의 한 가운데서 강자에게 감연히 맞서 ‘나를 죽이고 가라!’고 외치는 능동적 죽음의 도덕을 통해 강자를 초월했다는 데 있다.



4. 유교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여성적 絶義의 동형구조


요즘 유교는 페미니즘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여타의 다른 종교적․문화적 전통 중에서도 유교가 특별히 반여성적이라는 비판은 그러나 그다지 적절한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전근대시대의 종교적․문화적 전통이든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강하게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진정한 극복을 위해서라도 내부로부터의 접근 시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이슬람 여성들의 차도르와 부르카는 여성차별, 여성억압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러나 이슬람 여성들 자신들에게는 차도르와 부르카는 오히려 집밖으로 나가는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내부적 접근에 의해 보완되지 않으면 외부적 시각은 비현실성에 빠지기 쉽다. 전통적 관습과 가치라는 것도 그 내부의 논리 속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공모하고 공유하는 권력의 영역이 항상 존재했다. 특히 전통사회의 지배층에서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남녀 양성이 권력을 공유하고 공모했던 측면이 강하다. 이는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유교적 가치에는 여성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다른 전통적 종교에 비해 오히려 강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신분적 지배층의 도덕적 권위로 이해하고 그 핵심을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敢然한 태도로 본다면, 유교적 노블레스 오블리제에는 여성이 자발적인 협력자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주체가 되는 계기들이 강하게 존재한다.


<열녀전>의 한가지 에피소드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열녀전>은 주로 춘추전국 시대의 여성에 관련된 일화를 편집해 놓은 책인데, 이 에피소드는 「節義」편에 있는 제(齊)나라의 한 지방 영주의 부관인 구자(丘子)의 부인에 관한 것이다. 그 지방은 오랑캐인 융(戎)의 침략을 받아 영주가 살해되었다. 구자는 살해된 영주의 신하였으므로 신하된 자로 주인이 죽은 이상 그 역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명예로운 길이었다. 그러나 구자는 결국 자결하지 못한다. 구자의 부인은 이를 힐책한다. 구자는 변명하기를 힘써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살아남아 생각해 보니 내 한 몸이 아니라 처자가 있는 몸이니 죽기가 주저된다고 변명하였다. 이 말을 듣고 구자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주군께서 근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신하가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주군에게 부끄러운 일이 생기면 신하는 죽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주군께서 적에게 살해되었는데 그의 신하인 당신께서는 살아 계시니 어찌 의(義)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병사와 백성들을 죽게 하고 나라를 멸망하게 하고도 스스로 살아남은 것을 어찌 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처자의 일을 걱정하여 인과 의를 잊고 돌아가신 주군을 배반하며 억세고 포악한 미개인을 섬기면서 어찌 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충신의 도리와 인의의 행실 없이 어찌 賢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지금 당신께서는 처자 때문에 남의 신하된 자로서의 절의를 잃고, 주군을 섬김에 예를 잃어 忠信의 도리를 버리고, 처자에 대한 사사로운 정리에 끌려 죽을 때에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려고 하십니다. 저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당신에게는 어찌 하겠습니까. 저는 당신과 함께 부끄러움을 견디며 살 수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遂自殺’이다. 아마 구자의 부인이 먼저 자살을 하였을 것이고, 구자도 역시 그의 부인을 따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 텍스트가 前漢의 남성 학자이자 대표적인 유교 이데올로그 중의 한 사람인 劉向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는 점을 들어 남성 전유의 봉건적 공적 영역의 절대적 가치를 미화하기 위한 상징조작에 불과하다고, 즉 여성을 봉건적 남성우월 사상의 이데올로기적 예속물로 삼기 위한 이념조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유향의 편집 의도는 더 넓은 근거 위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군주가 죽으면 신하가 따라 죽어야 한다는 규범 자체에서 분석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원래 고대적 전쟁규범은 무장한 패자는 몰살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구자의 경우와 같이 살아남은 신하들을 살육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들이 반드시 군주를 따라서 죽어야 한다고 단정하는 데는 여기에 무언가 새로운 이데올로기, 새로운 규범이 끼어 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위의 사례에서처럼 융이라고 하는 야만족, 즉 유교적 가치가 배척하는 철저히 무력에 의존하는 문명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였을 때는 이를 커다란 수치로 여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유향의 편집 의도에서 배어 나오고 있다. 즉 文(문명)의 세계, 인의와 충신이 서 있는 세계가 야만의 폭력에 의해 위협받고 꺽였을 때는 앞서 <예기>에서의 「儒行」편이 가르쳤던 바와 같이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계산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맹렬하게 저항하라는 것이고, 미처 죽지 못하고 나라는 꺽였을 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명예로운 유자의 길이라는 것이 유향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열녀전>에서는 남자인 구자가 아닌 그의 부인이 유자(儒者)의 도리인 명예로운 죽음을 설파하고 있다. 죽음을 통해 충의인현의 고결한 덕목이 실현되는 반면,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았을 때 유교의 도덕은 더럽혀 진다라고. 구자 부인의 이 처절한 도덕률과 명예의식이 단순히 남성적 유교이념의 조작과 세뇌에 기인했던 것일까? 오히려 유자의 처지란 명예를 지켜야할 어떤 특정한 신분의 여성의 처지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성의 처지는 유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강한 무력의 힘 앞에 맨손, 맨몸으로 맞서 있다. 고대사에서 여성들의 처지란 강한 폭력을 가진 승리한 전사(戰士)의 획득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힘의 논리 앞에 명예 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맞서서 오직 맨몸으로 그 힘을 도덕적으로 이겨내고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었던 것이고, 이러한 여성의 매운 절개를 두고 칭송하여  絶義라 하였다. 폭력의 위협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한다는 유자의 덕목과 명예로운 신분의식을 가진 여성들의 절의란 완전히 동형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자들의 이념인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여성적 절의와 완전히 부합한다. 또한, 굴원(屈原)의 <離騷> 이래 보여지는 유자들의 忠義歌의 센티먼트에도 대단히 에로틱한 면이 있다는 것은 유자들의 정조(情操)와 명예로운 신분층 여성의 감성이 예사롭지 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녀전>의 예에서 구자의 부인이 그의 남편보다 더 유교적일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2)


조선 유학자들 간에도 위와 같은 사례는 많지만 그 대표적인 경우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소론의 영수 윤증 간의 소위 회니(懷尼) 시비3)가 아닌가 한다. 이는 조선 당쟁사에서 노론과 소론의 분당 계기가 되는 유명한 일화다.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평소 그의 정적이었던 윤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윤선거-윤증 부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의 이단으로 단호히 정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윤선거-윤증 부자는 송시열과 윤휴의 설(設)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윤선거가 사거하게 되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는데 그 핵심은 윤선거가 죽었어야 할 자리에서 죽지 않아 義理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 인조가 오랑캐인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을 때 인조를 보필하고 있던 윤선거 역시 마땅히 죽었어야 하였거늘, 그는 그의 부인 이씨의 자살을 보고서도 그 자신은 자살하지 않고 하인으로 변복(變服)하여 남한산성을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자결한 그의 부인의 절의와 부인을 따라 죽지 못한 윤선거의 훼절(毁節)! “윤선거는 그의 부인을 따라 죽었어야 했다!” 이 서늘한 한 마디는 송시열의 입을 통해 나온 <열녀전> 속의 丘子 부인의 목소리 그대로가 아닌가?4)



5. 유교적 도덕권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노블레스 오블리주 일반, 그리고 유교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에는 죽음을 감연히 맞이하는 데서 비롯한 특이한 도덕 권력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조정과 향촌에서 위로는 군주에 맞서, 밑으로는 농민들 위에 군림하여 강력한 도덕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던 핵심에 그러한 도덕권력이 존재했다. 그들이 누렸던 엄청난 특권에는 나름대로 치렀던 값이 있었던 것이다. 도덕과 특권의 이 함수관계를 명나라의 이단적 유학자인 이지(李贄)는 죽음을 무릅쓰고 군주에게 간쟁하는 유학자들을 가르켜 간쟁(諫諍)하여 살아남으면 당대에 영화를 누리고 죽으면 자손이 영화를 누린다고 정리하였다.5)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정을 볼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도입하고 유통시키려는 분들의 대부분은 누릴 특권에는 뜻이 있되, 치를 댓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봉건시대 신분제도를 전제로 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왠지 멋져 보이는 불란서 말이 ‘사회지도층’의 품위 또는 ‘부자가 빈자에게 베푸는 선행’ 정도의 뜻을 가지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역시 귀족이란 멋있는 것이야’라는 가벼운 심리와 연결되기도 한다. 귀족주의란 특권주의, 신분차별을 말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반상(班常)의 엄격한 구분을 지칭한다는 엄연한 사실은 무시된다. 이런 현실은 어쩌면 대두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신 귀족주의 앞에 이미 자발적으로 무장해제를 하고 있는 민심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 양반층이라 할 새로운 특권층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신 봉건주의, 신 반상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경계해야 할 것은 새로운 귀족주의의 유입만이 아니다. 어쩌면 제사(의무)에는 관심 없고 잿밥(특권)에만 관심 있는 요즈음의 뜨내기 귀족 희망자들은 민주주의의 보다 큰 대세 속에서 강력한 비판의 타깃으로 스스로 떠오를 것이고, 그들의 그런 앞 다르고 뒤 다른 모습은 오히려 민주적 시민 교육의 살아있는 교재가 되어 줄 수도 있다. 신분주의, 귀족주의를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지라는 어두운 터널을 통해 현대로 引入된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정치교육 과정이 뒤늦게나마 필요할 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진정으로 심각한 교훈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배경에 있는 특이한 도덕권력 그 자체에 대한 경계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껍데기 귀족주의보다는 오히려 진지한 의미에서의 귀족적 도덕권력 자체가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한다. 유교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와 같은 경우, 유학자들의 도덕률이 너무도 쉽게 너무도 일방적으로 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무비판적인 관성이 일반인들 뿐 아니라 지식인들의 행위규범에도 무의식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뜻 높은 유자들의 가치관과 행위에는 오늘날 계승되어야 할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적 도덕권력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일단 철저히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귀족적, 봉건적, 위계적, 전통적 윤리기준과 시민적, 민주적, 평등적, 현대적 윤리기준은 다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귀족적, 봉건적, 위계적 윤리관에 기반한 덕목이다. 죽음에 대한 敢然한 태도, 고결한 죽음의 명예란 신분적 특권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도덕적 위계의 정상에 이르려는, 도덕전쟁의 승자가 되려는 필사적인 투쟁수단이다. 민주적 평등의식이 존재하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신분적 위계는 동시에 도덕적 위계이기도 했다. 신분적 위계란 또한 혈통적 위계다. 신분=혈통=도덕의 위계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삼위일체는 종교적 언어로 승화되면서 우주론, 道統論으로 확장된다. 유교사회의 경우, 유학자들의 도덕정치는 동시에 신분정치요 혈통정치였다. 이 삼위일체는 宗法정치로 종합된다. 유교에서 종법적 질서는 폭력적 찬탈, 즉 정통성이 없는 정치적 폭력을 예방하는 이념구조였고, 효와 충이 동형구조로 결합하는 유교적 봉건성, 유교적 종교성의 핵심이었다. 맹자와 열녀전 속의 숱한 絶義女들과 송시열을 한 줄로 묶는 공통성은 종법적 혈통, 종법적 국가, 종법적 신분구조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었다.


아울러 힘의 정치에 聖君論(도덕정치론)으로 맞섰던 비폭력적 유학자들이 그 자신 폭력적 당쟁정치, 피의 보복정치의 주역이 되었던 귀결점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배타적 혈통, 위계적 신분, 닫힌 교의와 결합된 전통적 도덕률은 언제나 종교적 근본주의의 맹목적 폭력으로 연결되곤 하였던 것이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교훈이 현대 정치사상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기억하자. 종교, 가치, 신념, 관습, 지역, 언어, 민족이 다른 타인들에 대해서도 평등한 존재로서, 자유로운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아울러 유념하자. 도덕적 승리를 위한 죽음, 순교자 정치의 이면에는 자신과 다른 타인에 대한 맹렬한 적대감과 폭력의 의지가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구축해 나가야할 새로운 윤리는 이러한 분노와 원한의 응결물로서의 도덕권력6)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사회비평)

                

1) 見死不更其守

2) 요즈음 안방을 장악하고 있는 티비의 조선 시대 사극에서 왕가와 사대부의 규방 마님들이 유교정치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유교정치의 전면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교정치의 정통성에는 嫡/庶, 妻/妾의 구분, 즉 계승자와 그의 모친의 신분적 지위가 중요한 기준이 만큼, 여성은 이러한 종법적 정치투쟁의 한가운데 설 수밖에 없었다. 선왕이 죽으면 大妃가 왕가의 최고 어른이 되어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왕은 대비(비록 그녀가 젊은 繼妃라 할지라도) 앞에 스스로 '臣'을 칭하여 낮추어야 한다거나, 왕위 계승자를 둘러싼 투쟁 속에서 왕비의 서열문제와 廢妃 문제가 정치투쟁의 핵심사안이 된다거나, 妃의 친정 친족이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다거나 하는 문제들도 여기서 파생된다.

3) 당시 송시열의 근거지가 충청도 懷德였고 윤증은 인근한 尼山였기 때문에 양자간의 갈등을 양 지명의 첫 자를 따서 회니 시비라고 한다.

4) 윤선거는 연로한 부친이 살아 계셔서 차마 죽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는 점, 즉 구자와 비슷한 변명을 했었다는 점을 덧붙인다. 아울러 윤선거 역시 그의 이 훼절을 부끄러워하여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5) 앞서 <열녀전>의 구자와 그의 부인의 경우에도 오랑캐의 왕조차 그 부인의 충절에 감동하여 그 부부를 높은 예로 장례 지내주고 구자의 아우에게는 황금을 하사하고 경의 작위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 이는 니체가 비판했던 resentment의 도덕,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윤리 A, 윤리 B를 구분했을 때의 윤리 A에 속하는 윤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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