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 김은호(1892-1979)
인천에서 태어났다. 집이 몰락하여 정식 교육은 받지 못 하였다. 이발소, 구두방, 도장포, 인쇄소에서 허드레 일을 하면 보냈다.
1912년 경성서화미술원에 등록하여 안중식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1915년에 서회미술회를 졸업하였다. 안중식의 소개로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종의 초상화(사진을 보고 모사)를 그린 것을 계기로 천재 화가로 소문이 났다. 순종의 초상화를 그리므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20년 대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신일본화의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된 신고전주의 화풍을 수용하였다. 김은호의 채색인물화와 화조화를 일본풍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일본의 신고전주의 화풍은 치밀하면서도 섬세우미하여 격조 높은 중국 송의 원체화와 동양화의 전통적인 구륵적 모필 효과를 융합하여 명징힌 화풍을 만들었다.
그는 마지막 어진 화가라는 명예(?)도 갖고 있다. 그는 너무 유명화가가 되었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다. 화선(畵仙)이라는 칭찬도 들었다.
30대에는 조선미전에서 맹 활약을 하였다. 첫 회(1922)에 4등 상을 탔다. 22년에서 30년까지 5회 입선, 2회 특선을 했다. 1933년 ‘제미전(帝美展)’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1937년의 제16회 선전에서는 창덕궁상을 받아 다음해에는 선전 참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2년간 체류하였다.[1] 이후에 심사에 참여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인물화, 특히 미인도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관전인 선전을 배경으로 활약함으로 친일화가라는 불명예도 짊어지고 있다.
미인도의 경우 화려한 색채 구사와 배경 설정이 없는 그림은 그의 양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극히 정적이고 여성취향적인 화면을 구성하였다. 명암도 없다. 극세필의 미인도는 복보적인 경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만 화려한 형식주의라고 비평한다. 정신세계는 없고 손재주만 있다는 평이다. 그림을 찾는 사람의 요구대로 그렸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또한 그의 독보적 양식임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화가로는 드문 북종화 계통의 화가로서 채화(彩畵)를 통하여 한국의 풍속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갔으며, 중국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이나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도 비견할 사녀도(仕女圖) 형식의 한국적 화풍을 수립한 화가로 평가된다. 그외 채색화로서 산수·인물·화조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전개시켰고 재래 도화서풍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작품으로 〈향로(香爐)〉 등이 있다.[1]
김은호는 왜정 말기에 일본인의 강압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선전하는 그림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이상범과 더불어 친일화가로 불린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2] 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3][4]
<後素會>
이당 김은호 제자들이 만든 미술 단체이다. 1936년에 첫 전시회를 가졌다. 이후로 간헐적인 전시회를 하였다. 1977년에 88세의 스승 김은호를 모시고 9회전을 가졌다.
후소회라는 말은 공자의 繪事後素(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에서 따와 정인보가 지었다.
김은호 밑에서 수학한 제자는 30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그 중에 회원은 약 40명 쯤 된다. 후소회는 이상범의 청전 화숙과 전통 회화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미술회였다.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장운봉, 이유태, 정도화, 김화경, 안동숙, 배정례 등 한국화의 초기 인물들이 대다수이다.
조선미전에서 입선하는 화가의 다수를 후소회가 차지하였다. 어떤 해는 입선작 60점 중에 후소회원 작품이 21점을 차지한 일도 있었다. 무언가 문화권력의 힘이 느껴진다.
작품의 성향은 일본적 성향, 중국화의 남화적, 북화적 성향 등 각각의 화가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6. 25 이후에는 활동상이 줄어들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2] 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3][4]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선정하지 않은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미술 분야에 심형구와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두드러진 친일 이력과 일본풍으로 의심받는 화풍과 관련하여, 김은호가 그린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철거하자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5]
첫댓글 여기도 친일 친일 이구나
일제 강정기에 살아남은 이는 모두 친일
우리는 모두 친일 후손 이런가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