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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5 35권 한국국민당 Ⅰ > 한 민 > 『한민』 제23호(1940.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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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제23호(1940. 10. 15) |
『한민』 제23호(1940. 10. 15)
[社論] 光復軍 成立典禮觀感
9월 17일은 한국독립운동에 새로운 한페지를 열엇다. 한국의 무장세력은 이날로부터 국제젹으로 확립하얏으며 한국의 독립군은 이날로부터 통일화 조직화 할 것을 션언하엿으며 한국의 각당, 각파의 혁명젹 력량은 이날로 조차 한군데로 집중될 것을 확졍한 때문이다.
림시정부 국무원 여러분과 독립당 중앙간부 동지들과 일반 당원 여러분들은 광복군을 세우는 일에 대하야 거침없시 일치한 결심과 용긔로써 힘을 모아 돌진하얏음은 당연한 일임으로 두말할 여지가 없거니와 만여명 대중의 동포가 멀니 태평양을 격하야 혈성을 다한 졍신젹 경제젹 응원은 우리 광복군을 세우는데 위대한 원동력이 되였으며 다음으로 중일젼쟁에 4년 갓갑게 용젼하는 중국 당국의 열열한 후원과 동졍은 우리 광복군으로 하야금 국제젹 존립의 새로은 립장과 지위를 세우게 한 유일한 동력이 되엿다. 그럼으로 재미동포를 대표한 여러 단톄와 중국을 대표한 국민졍부는 우리 광복군의 생존발달과 병행하야 영화롭고 굉장한 민족젹 치하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잇음을 단언한다.
과거 슈십년 동안에 왜놈을 박살하기 위하야 니러난 군대는 의병, 독립군, 혁명군, 광복군 가진 명목으로써 국내, 국외에서 피바다를 맨들었다. 이와 같은 위대한 독립젼쟁력사에 새로 긔억할 것은 약간 유감이 없지 안엇다. 부산 젹이엇는 것, 민군으로 대립젹이엇는 것, 각자 위젼하는 것과, 리산식이엇든 것, 지대젹 할거로 군웅이 병립하얏든 것, 주의니 당파니 하야 무의미하고 슈치스럽고 뼈앞운 동족젼쟁까지도 잇엇든 것이다.
이런 때문에 흘닌 피보다 희생한 머리수보다 싸와본 통게젹 수짜가 뵈여주는 위대한 전투력보다 만은 보람 큰 갑을 발지 못하얏셧다. 이런 결함을 청산하고 보담 만은 성공 보담 큰 공효를 가져오기 위하야 이제다시 대한민국 광복군을 세워 민군을 국군으로 분산을 통일로 고립젹이며 후원없는 무장세력으로 하야 금 국제젹으로 후원과 공인과 동경을 밧게 한 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돌변젹 진보라고 판단하겟다.
우리 운동이 이가치 파죽지세로 나아가면 광복군의 국제젹 신임이 날로 득실하야 교젼단테의 자격을 얼게 될 것이며 림시졍부는 사실상 혹은 법률상 승인을 얻을 수 잇을 것이다. 이로조차 국내 2천만 대중은 한칼로 결박을 끈코 한팔로 졍부의 손을 잡고 만인 일치한 고함소리로써 산천초목을 울니마 혁명의 불꽃이 한강우에 한울을 붉게 할 것이다.
중국은 수천애 불과한 려원홍씨의 군대로써 중화민국을 세웟으며 파쇼스키 장군은 일만내외되는 군대로써 파란공화국을 광복하엿다. 너머진 나라가 니러날 때에 긔본부대가 반다시 만을 수 없다. 다른 소수의 긔본부대를 중심으로 한 절대다수의 졍신젹 옹호와 물질적 소원을 가지고 지헤롭고 용감하게 긔틀을 잘 잡는데서 최후승리를 견취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야금 최후 승리를 젼취하라고 우리 앞에 긔회를 보내주엇다. 이 긔회는 뒤통수로 잡을 수 없는 앞머리만을 가졋음을 주의하자. 몣해을 계속하야 경보로 우리의 귀를 울니며 긔회의 강림할 것을 예고하얏다. 예고한 긔회는 지금 임의 강림하얏다. 이 긔회는 한국의 메시아와 가치 영접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라 왜적의 군대는 흑룡강에서부터 안남에까지 수만여리에 분산하게 되엿고 왜젹의 군함은 발해 종곡해협에서부터 황해남해 태평양의 광대한 해면을 포위하기 위하야 젼투력의 집중을 파멸식히엇다. 근위란 놈은 중앙긔구를 개조냐 창조냐 하고 머리를 맨들냐 하나 병신 불구자의 머리밧개는 창조할 늑녁이 없음을 선포하얏다. 덕의 축심에 한목을 보랴하나 불난집의 도젹을 막자는 히틀너와 원동일본 활동의 감독자인 미국과 로시아는 눈을 노리고 방아쇠를 견우고 잇다. 미국의 해군 시로아, 신무긔 중국의 무한한 항일군 한국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하야 준비한 위대한 세력이 다 지금 광복군의 인수가 비록 만치 안으나 벌서 왜놈의 국군에 대하야 200만이나 사상을 주엇다. 이는 중국의 힘으로써 왜놈을 바슌것이지만 장차 미국의 힘으로써 왜놈을 바슈게하자 로시아의 힘으로써 왜놈을 바수게 하자 왜놈이 걱구러지게 되는 때에 빨리 나서서 만치 안은 군력으로써 졀대젹 승리를 젼취하자. 이것이 광복군에 다시 업는 긔회며 또한 한국독립에 유일한 긔틀이다.
이같이 위대한 사명을 가진 우리 광복군의 장령들은 한국독립을 위하야 한국민족을 위하야 우방의 긔대를 응답하기 위하야 중대한 책임을 각오할 것이다. 어렵은 일을 다 할때에 구차히면하랴 하지말고 명예와 리익에 흔들니지 말자. 죽엄에 영화를 가질지언정 삶에 욕됨을 받지 말자. 이련이라야 비로서 외로운 장군에 자격이 잇나니라 하얏다. 새로 임명된 광복군 장령들은 수십년 동안 남북만주에서 풍찬로숙하며 구사일생하든 용맹스럽은 장녕이라. 현대젹 무긔는 비록 구비하지 못하나 현대젹 젼략을 가졌으며 명장의 자격을 구비하였으며 근국할 졍치젹 도량과 방침을 가졎으며 오쳔년 국가를 호위하든 군인 졍신젹, 모범젹 인격을 가졎으니 그네들은 한국 독립에 건국원훈이 되기에 젹당한 승리를 뵈여 줄 인물임을 확실하게 밋고 미리 축수하는 바이다.
왜놈의 세력범위에서 헤매며 멀니 독립의 서광을 바라보는 동포들 왜놈의 군대속에서 멀니 림시정부를 보고 마음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인들 국내에 안전 자유지대를 바라보고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를 위하는 혁명동지들 모싀코 · 와싶튼 · 중경에 한국운명을 결부 식히려는 동포들, 3 · 1운동 보다 결승젹 젼쟁을 맹세하는 각게 무장동지들, 모히자 광복군으로 나오느라 광복군의 긔치앞으로 함께 싸우자. 광복군의 지휘대로 그리하야 한국 민족단위의 군대를 맨들자. 독립전쟁할 기본군대를 맨들자. 중국과 연합하야 왜놈을 타도할 중한연군의 상승군이 되게 하자. 중경에 모힌 세계의 눈은 광복군 긔때 앞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광복군의 긔빨은 대한민국을 업고 왜놈의 진션을 돌파하면 왼 세계를 향하야 졍졍당당하게 부르지질 것이다.
아! 광영과 찬란이 광복군의 성립으로부터 태극긔를 따라 독립자유의 새소리를 날니며 한거름씩 한거름씩 조국강산을 밟어나갈 것이다. 한국동포 여러분 광복군의 라팔소리에 일치하게 니러스자. 만일 방광주저하는 자 잇으면 그는 적으로 인졍하자.
金九 先生의 式辭
여러 래빈 여러 동지들.
오늘은 우리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뎐례를 거행하는 날이올시다. 일각이 천금인 이때에 여러 우방 각게 동지들께서 이러케 보귀한 시간을 내여 참가해 주서서 만장에 광휘를 주심은 감사함을 무어라고 형용하야 말할 수 없음니다.
우리 대한민국 림시정부는 국가 주권적 독립과 민족 생존적 자유를 광복하기 위하야 저 원수 왜적과 30년을 악전하여 왓음니다. 우리가 비록 악랄하고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혹은 정규적 광복군을 활동하야 대규모적 전투를 할적도 있엇고, 혹은 일부일부젹 광복군을 발동하야 장기적 유격전을 게속하야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는 등 큰 전과를 얻은 바도 많음니다.
우리 한중 량 민족은 력사적으로 관게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더욱 밀절하야 죽고사는 것이 한 운명에 매인 것도 사실인고로 중국의 일반현달한 인사들로붙어 우리 한국혁명에 대하야 시종이 한글같이 동졍하며 원조하여 왓으며 우리 한국혁명동지들도 중국혁명에 참가하야 피흘린 이가 많이 있음니다. 그러나 항상 국제적 불합리한 공법이니 조약이니 하는 따위에 건제를 받아 한중 량민족의 진정한 구체적 합작 정신과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만은 심히 유감으로 늣기는 바임니다.
지금 우리 우방 중국은 바로 동방의 야심가 왜적의 침략행위에 봉착한 바 중국자신의 생존과 또한 세게의 화평을 위하야 신성한 항일전을 전개하엿음니다. 그러므로 세게에 젼인류는 소수인 인류의 반동분자를 내여 놓고는 다 중국 항전에 동정하며 그의 최후 승리를 바라며 찬조함니다. 더욱히 이번 중국의 항일전쟁은 우리 한국독립과 절실한 관게가 있는 고로 우리는 전민족적 무장력량을 총동원하야 중국 전우와 공동히 왜적을 토멸하고 한중 량민족의 원수를 갑기로 맹서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우리 한국민족이 이러나는 력량은 그야말로 우리 한족에 복국도존하는 중심기틀이 될 뿐만 않이라 중국 항전에 있어서도 한 큰 생군이 않이될 수 없을 것임니다.
오늘 우리가 중국 전시수도인 중경에서 이 례식을 거행하게 됨은 그 뜻이 퍽 심장하다고 생각됨니다. 이로붙어 중국땅에서 정규적 광복군을 이르키여 우방 중국 항일대군과 억개를 겻고 왜적을 섬멸하게 되엿으며 또한 이로붙어 백산흑수간에서 총을 메고 날새기를 기다리고 있는 삼한의 건아와 화북 일대의 백의대군이 발등될 것이며, 또한 국내에 삼천만 대중은 문풍흥기하야 왜적의 철제와 쐬즐을 때려부시고 성결한 민족적 직무을 다 할 날이 머지 않을 것을 단언합니다.
우리는 우방 중국 최고통수에 위대한 인격과 명철한 모략에 대하야 본래붙어 흠모하여 마지않는바 지금 더욱히 우리 한국광복군을 중국 경내에서 편제훈련함을 허락하야 우리로 하여금 중국항전시기에 있어서 한중련합군의 일부임무를 맛아 행하며 우리의 위대한 목덕을 달성케 함은 우리 삼천만 한족을 대표하야 치하를 드리는 바임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못이로부터 밤낫으로 쉬임없이 분투 로력하야 련합군의 사명을 다하며 할 우밧비 우리에 위대한 사업을 성취함으로써 우리의 직책을 삼을 수밖에 없읍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더뎐 레식은 절대로 어떠한 일종의 평범한 허식이 않이오. 그 속에 포함한 뜻이 중대한 것을 본주석으로서 이 기회를 타서 식사로써 드리는 것임니다.
趙素昻 先生의 光復軍 成立報告
(1) 광복군과 력사상 국제전쟁
한국 민족의 건국한 력사가 5천년이다. 중화 · 에집트 · 끄리쓰 · 인듸야와 함께 가장 오란 문화민족의 한아이엇다. 3천만 인구와 8만 4,000방 마일의 강토를 가졌음으로 우리의 국군액수는 50만 내지 100만을 수요한다. 한국민족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두어 강폭한 이웃민족의 침략을 모라내며 안으로는 국가의 긔초를 든든하게 하야 독립국가를 항구여일히 지지 하앗엇다. 15세긔 끗트로붙어 왜란을 당하야 해군량장 리충무공과 륙군 권도원수는 명나라 장수 송응창 · 양호 · 진린 · 리여송 등으로 더부러 여들해 동안을 싸워서 비로소 왜적을 구축하었다. 16세긔 초에 만주족과 충돌이 되여 여러번 싸우며 여러번 강화하얐다. 이 두 전쟁을 치른 후로 우리의 민족정신은 고급적으로 발전되야 국방군을 훈련함에 거국 일치로 로력하얐엇다. 유롭에 신무긔인 총포와 중국명장 척계광의 전략은 삼백여년 이전에 발서 우리가 채용하였다.
(2) 포쓰마쓰 조약과 한국
18세긔 하반긔 이래로 서양의 세력이 동으로 달녀들매 이웃민족은 틀을 엿보며 내란은 자조 일어낮섯다. 일아전쟁이 끗나면서 포쓰마쓰조약이 한국을 희생하고 말엇다. 을사경술 5~6년간에 수십종 망국조약은 우리 3천만 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의 부로가 되게 하며 13도 국토는 적의 식민지가 되얐으며 광대무랑한 일체 경제권리는 젼리품이 되며 충요한 국방군은 적의게 해산되야(정미년 8월 1일) 5천년 독립국가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엇다(경술년 8월 29일).
(3) 국방군의 해산과 광복군의 창립
졍미년에 리상설 · 리위종 · 리준 세 선녈이 밀명을 가지고 덴마크에 열인 만국평화회의에 출석을 요구하야 보호조약의 무효를 공포하려 하얐엇다. 왜추 이등박문은 광무황제를 협박하야 양위를 선포하게 하며 림등으로 하야금 7조약을 체결하게 하었으며 니어 경성에 주둔하엿든 적군 사령장 장곡천으로 하여금 한국 장병을 소집하야 국방군 해산을 음모하얐섯다. 그때에 시위대 제일련대 제일대장이엇든 박성환 장군은 궐내에서 거사하야 국치를 씨스려 하였으나 화단이 황제에 밋칠까 염녀하야 중지하다가 8월 1일에 국군이 해산됨으로 박장군은 자긔에 총으로 자긔의 가슴을 쏘앗다. 박장군의 총소리는 경성에 잇든 국방군 젼체로 하야금 선전을 포고하는 나팔이 되앗다. 그러하야 우리 군대는 서울있든 적군을 모조리 도살하야 붉은 피가 거리를 씨섯으며 멧날이 안되야 300여 주에 의병과 국군이 서로 배합하야 혈전을 게속하야 왓다. 전후 십여년 동안 우리의 남녀로유가 적에게 도살된 자가 50만이며 적군이 우리에게 섬멸된째 무수하앗다. 말하자면 정미년 8월 1일 국방군 해산 하든 날이 곳 광복군 창립된 날이라 할 것이다. 금년 8월은 맛츰 33주년이 되얐으며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이 8월 4일에 되엿음은 광복군의 력사적 의미가 더욱 명백하게 표현된 것이다.
(4) 광복군이 국내로서 국외에 이젼함
광복군이 국내에서 항전한지 5 · 6년에 왜놈을 완전이 모라내지 못하얐으나 국가의 독립을 위하며 민족의 해방을 위하야 오래 저항하였음으로 민족정신을 발휘하며 위대한 민족 영웅과 혁명선렬을 부단히 배출하게 되얐다. 경술 신해 이후로 우리의 국치의 중국혁명이 앞뒤를 이으며 광복군 대번영은 상해 동삼성 해삼위 호을눌누 센푸랜시스코 등지를 근거로 하야 비밀리에 미국과 아라사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군사와 외교를 추진하야 왓섯다. 동삼성에 신흥학교와 호놀눌누 병학교와 운남에 사관학교는 긔미년 이전 한국광복군에 긔간부 대양성소이엇다.
(5) 대한민국과 광복군
3 · 1운동 당시에 림시정부는 국내의 무장한 군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기 위하야 조례를 반포하고 총사령부를 세워 동삼성에 세가지 군사긔관으로 하야금 200만 교포를 통제하며 장정과 군향을 증발하야 맹렬이 적과 싸왓섯다. 왜총독은 한국에 잇는 3 · 4단에 병력으로는 남북 만주독립군에 대항하기에 넘우 박약함을 깨다라 3 · 4단을 느리려하였으며 경비선, 교통망, 졍탐망, 포대와 보루, 군용철도, 비기, 철갚차를 비상히 확장하며 경찰과 밀탐 편의대를 총동원하야 정식 국가에 대한 젼쟁과 다름이 없이 싸왓으나 적은 한번도 승리를 보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외교수단으로써 우리 독립군을 익이고자 하야 1925년에 잠시 협약을 동삼성 당국과 체결하얐으니 중일 량국 경찰은 한교의 반일운동을 방지할 것. 중국 미국은 배일하는 한인을 잡아 넘길것. 배일 영수의 성명은 일본당국으로붙어 긔록해 보낼 것. 품행부단한 한인은 일본에게 잡아 넘길것. 이와 같이 두 나라가 독립군을 앞박하게 된 것은 그때에 동삼성이 중국 혁명졍부의 세력범위가 안니얐섰든 때문이엇다. 그럼으로 동삼성 당국은 한국 독립군에 대하야 공식으로 승인도 안니하고 묵인도 없엇든 때문에 비장차절한 용사와 무수한 애국지사로 하야금 속수취박하게 되얐다. 그러나 독립군은 동족에 후원과 지세에 유리함을 가졌음으로 적을 익이기에 유리한 모든 전술를 유감없이 활용하얐다. 1931년 이후로는 동삼성에 한군과 화군이 서로 런결하야 왜놈을 도멸하기에 전력하는 무장세력이 아직도 5~6만에 쓸만한 군대가 있다. 이는 대한민국에 건국군이며 민족에 전위대며 공동한 원수를 타도하는 한중 량군에 선봉군이며 동아화평을 건설할 임무를 가진 긔간부대이다.
(6) 중 아가 일본과 타협할 시기와 광복군
엇더한 국가나 민족을 물론하고 국제상 련새 관게가 잇든 까닭에 파국밧게 고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되 우리 군도 일개 민족단위의 무장세력 임으로 국제환경에 좌우됨을 면치 못하게 되왔다. 근자 아라시와 일본이 타협할 시기에 있어서 우리 군대는 아라사 경내에 졉족을 못하게 되았고 삼시협정이 동삼성에서 체결되매 무한한 험난 중에 국제상으로 아무 원조도 없고 국내 민중의 옹호와 지지로 일케 되얐다. 과거의 우리 군대는 가진 각색의 위협과 구박을 밧엇고 더욱이 무긔와 군자금의 곤란이 심얐다. 그러나 구사일생의 희생적 정신으로 수만의 군사를 동원하야 왜적을 대파하기를 수십년내로 게속되얐으니 과연 약소민족 운동사상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럿케 투쟁을 게속 부단하면서 오직 우방중국이 왜적과 싸우기를 고대하며 촉성하얐었다.
(7) 광복군과 중국
중국과 한국이 서로 손잡기 시작은 중국 신해혁명 이후로붙어 가장 견심하게 되야서 광동황포군교 교장 장개석씨가 한국혁명청년을 수용하야 많은 장재를 양성하야 주엇고 ‘1 · 28’ 4 · 29 이후로는 중국과 한국이 왜적에 대하야 동구적개의 의식이 더욱 심각하얐다. 중국 북벌혁명이 셩공한 후의 가장 저명확한 사실은 중국낙양군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고 비밀히 우리 청년장교를 다수히 길어준 것인데 이것이 곳 대일전쟁의 선성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동삼셩에 산재해 잇든 우리 군대 수령들은 이 소식을 듯고 관내로 모여들어 림시정부 령도하에 군사긔관을 설립하고 국내외 동지들에게 밀명을 노아 총동원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맛츰 중국 최고령수 장개석 선생이 동구적개의 의리와 손중산 선생의 약소민족을 부조하라는 유훈에 의거하야 중국 경내에서 우리 광복군의 편성과 활동을 허락하는 동시에 중국 지방당국에게 명령하야 우리 군대 활동의 편의를 수기수시하야 방조하야 주라하얐으니 일로부붙어는 확실이 한중련합군의 성립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 림시정부가 전에 규정된 광복군 조레와 총사령부 조직 대강에 의하야 금년 8월 4일에 총사령부를 셩립하고 그 전레를 9월 17일에 중국 중경에서 거행하는 금일에 있어서 한중 오천년 력사적 신의와 교분이 좋게 되얐다. 협력토적하는 가운대 더욱 늑실하게 추진될 것이 자연의 추세이다.
(8) 광복군의 임무와 구셩분자
우리 광복군은 파괴와 건설의 임무가 잇다. 파괴방면으로서
1. 한국내에 잇는 왜젹의 일체 침략적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 등의 긔구를 박멸할 것 2. 국내 한인의 일체 봉건세력 반혁명 세력과 왜적에게 의부하는 각종의 악랄한 인소를 숙청할 것 3. 재래의 모든 악풍오속을 파괴할 것이오. 건설방면으로서 1. 대한민국 건설방침에 의하야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토지의 국유, 보선제도, 국비교육, 의무교육, 년한의 연장 등을 실행할 것)를 수립할 것 2.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평등한 지위를 실현할 것 3. 우리에게 평등대우하는 자로 더부러 반드시 흡수하야 세계 인류의 화평과 행복을 위하야 협력 촉진할 것 등이다.
우리 광복군의 임무가 결정됨을 따라서 그 구성분자도 자연 정해질 것이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야 싸우려는자 공화국과 합리화한 사회를 건립하기 위하야 싸우려는 자는 모두 우리 광복군 깃대 아래로 모여 뒤를 도라볼것 없이 요왕 매진하야 인류의 모적인 왜젹을 섬멸하고 국가 기초를 영원무궁하게 세울 것이다.
정의 인도를 주장하는 우방인사에게 많은 지교를 바란다.
洪震先生의 訓辭, 림시정부를 대표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큰 나라로 5천년 영광스럽은 력사를 가지며 3천만 우수한 민족을 가지고 동방에서 뽐내엿섯다. 그 후 나라가 쇠패하며 강린이 침통하야 마참내 왜놈의 손에 나라가 없서지고 말엇다.
다행이 나라의 정신이 씩씩하게 꽃치여 호걸스럽은 선현선열이 앞뒤로 니러날 뿐안이라 일반 민중까지 동심동덕으로 왜놈을 때려바수기에 일치하야 3 · 1운동을 니르키워 독립을 세게에 선포하고 림시정부를 조직하야 광복대업을 메고 나스케 되엿다.
본 정부가 인민의 중탁을 밧고 광복의 큰 짐을 진지라 피가 아니면 왜적을 구축할 수 업스며 무력이 아니면 해방을 꽤할 수 없는지라. 이에 내외 각지에 폭력행동을 니르켜어온지 수십년 동안에 조곰도 간단이 없이 혹은 왜놈의 괴수를 죽이어 세계를 놀내고 혹은 큰 성시를 점령하야 왜적의 혼담을 늘내엿다. 다믄 본정부가 우방의 경내에 긔거함으로 군사운동이 자유롭지 못하야 대부 대의규모로써 적으로 하여금 치명상에 빠지게 하지 못하였다. 이는 본 정부의 유감이엇다.
중일전쟁이 니러난 후로 본 정부는 독립전쟁을 다시 크게 이룩할 기회를 보아 젼국 청년장사를 총동원하야 중국군대와 함께 협력항젼께 하였음으로 년래 각지에 약간 참획한 바 잇섯으나 이는 다믄 우리 민족의 인격을 차져 냄에 그치고 말엇다.
오늘날 중국항젼이 임의 3년유여 이매 최후 승리가 점점 갓가워온지라 본 정부는 헤아리건대 왜구의 앞길이 분괴말도로 기우려지기 시작하얐다. 이때에 우리는 국민의 힘을 집중하야 적의 목을 자르지 못하면 엇지써 우방의 승리를 결정하며 었지써 우리의 광복 대업을 완셩하리오. 이에 대규모로 광복군을 조직하앗으매 중국 최고 당국으로써 모든 것을 원조하기로 하앗으매 이제 총사령부를 성립께 하고 부서를 완성하앗다. 종차로 우리는 중국과 함께 왜격에 대한 견승젼쟁을 하게 되앗다.
오늘날 본직이 삼가 림시정부를 대표하야 먼저 중국 최고 당국의 성의에 대하야 감사한 뜻을 표하고 다음으로 우리 젼체 장령에 대하야 고하노라. 옛날 우리나라가 왕성하얐을 때에 군대에 대한 범법의 세가지가 잇섯다. (가) 나라에 불충한 자는 죽이자. (나) 남의 재물을 빼앗는자 죽이자. (다) 싸홈에 퇴각하는 자는 죽이자. 여러 장령들은 이로써 스사로 명심하야 나라에 진충하여라. 지공무사하여라. 용맹스럽게 나가거라. 그러하야 왜놈을 뭇지르고 우리의 넷나라를 광복하여라.
劉峙先生의 祝辭
김주석 리총사령 여러 래빈 여러 한국 동지들
오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를 거행하는 날에 김주석의 청함을 받아 이런 큰 전레에 와서 참가하게 된 것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됨니다. 이 젼레식이 중국의 새로된 배도에서 거행되는 것은 우리 중한 량국 력사상에서만 처음보는 큰 일이 않이라, 동아 력사상에 큰 사건이 되는 의의가 비상히 중대한 일임니다. 그럼으로 본인은 멫마대 간단한 말노써 제 개인의 감상과 희망을 말슴하여 드리고저 함니다.
여러분게서 다 잘 아시는 바와 갗이 한국은 긴 력사와 찬란한 문화가 같추워 있는 문화적 민족이올시다. 한중 량국의 력사관게는 일관하게 밀절하여 왓음니다. 지나간 최근에 얼마의 한국인민이 왜놈의 속임을 받아 중국사람을 욕되게 한 일이 있으니 례를 들면 9 · 18 이전의 만보산 사건과 한국국내 화교에게 대한 폭등이 있엇으나 우리가 만일 이런 것으로만 한국을 리해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부족한 것임니다. 한국이 능히 5천년의 오랜 력사적 민족국가를 건립하여 내려온 것이 절대로 우연한 것이 않이고 당연히 특수 우□한 자연조건과 력사적 배경이 있어서 그리된 것이니 즉 말하면 한국은 아주 동족의 돌출한 반도국가로 서북은 만주와 서백리아를 경계하고 동쭉에는 바다를 격하야 일본과 린접하엿으며 사계의 긔후는 비상히 온화하며 곳마다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지가 있어 농사에 적당하며 해안선이 퍽 길어서 교통이 극히 편리하며 전국의 면적은 8만 4,000여 방리오, 인구의 총수는 3천만에 갓갑고, 젼국 인구의 100분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함으로 농산물이 풍부하며 연해 각지에는 고기잡는 업이 극히 발달되엿고 □□의 광산의 뭇처있는 량이 더욱 많음니다. 하늘이 기처주신 한국의 천연온□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는 자연조건의 한방면을 설명하엿음니다. 그다음으로 한국의 력사적 조건을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넷닐을 거스려 생각해 볼 가치가 잇음니다. 조선민족의 발상은 일반 력사가들의 상고하야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흑룡반두산을 중심하고 이러난 일개 위대한 민족이라 함니다. 맨처음 대륙으로붙어 남쪽으로 옴기여 만주 거츠른 뜰을 지나 백두산을 타고 지금 있는 한국에로 옴가가서 살앗음니다. 중한 량국의 관게가 서로 생기기는 대략(긔자봉조선)이란 때부터 시작되엿는데 당나라, 송나라 때에 와서 한국이 비으소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엿고 또한 점점 유석도 삼교를 흡수하게 되야 일체 문물제도가 중국을 모방하엿으므로 이로써 신라 고려시대의 찬란한 문화적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임니다. 19세긔 끝에 이르러 한국의 국제적 환경은 비상히 복잡하얐으며 또한 비상히도 험악하엿음니다. 그 시에 일본은 바로 명치유신을 실행하고나서 소위 정한게획을 실행하려 하엿고, 또한 아라사는 한국을 병탐하려 하엿기 때문임니다. 그러므로 한국은 중일아 삼방이 다투어 따르는 노루가 되엿고 게다가 그 내부는 통일 단결되지 못하고 소위 친화파니 친일파니 친아파니 하는 등 파벌이 있어서 서로 투쟁하는 불상한 일이 잇게되야 멸망을 스사로 재촉하엿고 일본은 중일 일아 등 두번 전쟁에 승리한 후 한국의 독립을 조성하야 1910년 8월 29일에 이르러는 매국적들이 정게적 나라를 왜놈에게 바치여 정식으로 포악한 왜놈의 식민지와 노예가 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참통한 력사는 오늘까지 이르기에는 30년이 되엿음니다. 이 30년 동안에 한인은 그 어느 날이나 저 일본의 쇠발굽 아레서 신음 고통하는 비인간적 생활을 면한 날이 없어 오며 이 30년 동안에 한국 독립운동은 조금도 끊임없이 일관하게 노력분투중힌바 일본 통치가 아모리 가혹하고 혁명을 압박하는 수단이 제아모리 잔인하다 할지라도 한국 독립운동의 불꽃은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것이다. 믿을 만한 통계수자에 의지하건댄 1910년으로붙어 1927년에 이르기까지 그간 겨우 18년 동안 조선민족운동의 차수가 1,500차 이상에 이르러 사상자가 2만 여인이오, 옥에 가치은 자가 5 · 6만에 달하엿다 하며 1927년으로 지금까지 이르기에 비록 정확한 통게는 얻을 수 없으나 놀낼만한 수자가 증가되엿으리라고 추측됨니다. 이와 같은 찬란한 운동력사 중에 우리가 특별히 말하고 너머가여야 될바는 즉 1919년의 3 · 1운동 그것입니다. 다시 혁명젹 노죠는 일본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엿으니 이야말로 한인혁명운동사상에 가장 광휘찬란한 한페지가 될 것이웨다. 그러나 우리는 3 · 1운동의 결과는 실패되지 않은 것이라고 부인할 수 없는 기맥힌 사실이 잇음니다. 엇지하야 실패하게 되엿느냐? 우리가 검토하자면 두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됨니다. 첫재는 굳고 통일된 정치령도가 없섯든 것.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한 혁명운동의 전개와 완성함은 반드시 굳고 통일된 정치령도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3 · 1혁명 후 비록 독립을 선언하고 림시정부와 의정원을 건립한 바 있으나 그 당시에 내외지를 통하야 광복을 표방한 대소혁명단테가 너무 많아서 상해 한곳만해도 독립운동단테가 수십에 이르렷든 것이니 이것이 혁명운동 발젼에 잇서서 비록 서로 방해하는 페단은 없었다치드라도 산만누계통하야 정치령도권에 영향이 없지 못하엿고 혁명조직에 있어서 건젼을 보존하기 어려웠든 것이다. 둘재는 혁명적 무력이 건전하지 못하엿든 것. 3 · 1혁명의 주요한 임무는 일본강도주의 통치를 꺽구러치고 조선의 피압박 민족을 해방함에 있나니 이 의무를 완성하려면 힘찬 혁명무력이 필요한 것이웨다. 1907년 8월 1일에 죠선군대가 일본에게 해산을 당한 후로부터 드듸여 한국광복군이 생긴 것인바 이 혁명의 부대는 유격성질에 가까운 산만한 무력이엿음을 부인할 수 없엇고 3 · 1운동이 생기여 림시정부가 성립될자 내외의 항일무장부대를 개편하야 광복군이 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혁명무력의 큰 진보와 발전이라고 볼 수 있으나 우에 말한 바의 첫재 원인으로 인하야 죠선혁명 무력을 객관적 조건의 요구하는대로 비약적 발전과 건전을 보지 못하게 하고 3 · 1운동을 실패하게 만드른 인소를 더하게 한 것이라고 봄니다.
지금 30년 혁명투쟁의 교훈을 받아 한국독립당 령도 아레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되며 혁명정부의 불통일 불견강한 점을 극복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곳 우리 중국 국민당이 13년 경에 개조한 것과 국민혁명군을 세운 것과 그 력사적 가치가 서로 상등하게 가지고 잇는 것이웨다. 청컨대 한군광복군 총사령부가 셩립된 후 독립당의 정확한 령도 아래서 굳고 강한 혁명무력을 조직하야 독립혁명운동에 노력하면 죠선의 혁명셩공과 승리를 반드시 얻으리랴고 밋슴니다. 이것이 곳 본인이 희망하는 바의 한나이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반드시 잘 인식하여야 할 것은 세게혁명운동은 서로 그 련대적 관게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웨다. 중화국부 손중산선생이 친수로 만든 삼민주의 가운대 있는 민족주의는 세게 약소민족을 돕자고 주장한 것이오, 동시에 우리 정개적 혁명의 방략은 곳 두졈이니 첫재는 민중을 불러 이룩하는 것이오. 둘재는 세게의 우리를 평등으로 대우하는 민족을 련합하야 함께 분투하자는 것이웨다. 물론 세게상에 있는 약소민족은 다 포함된 것이지오. 오늘 우리 중일항전은 간졉으로 일본 강도주의자 압박 아레 잇는 약소민족을 도아주는 일이 되는 것이웨다. 중국의 위대한 민족령수 장위원장께서 손중산선생의 유교를 바뜨러 일체 약소민족에 대하야 더욱히 한국인민에 대하야 가장 큰 도움을 주어 그 혁명운동의 셩공을 촉진할 것이웨다. 이번 중일항전은 동아력사를 창조함에 주동력이 되며 또한 조선부흥에 가장 조흔 긔회가 되는 것이웨다. 희망컨댄 조선의 지사와 건아들은 일치하게 단결하야 광복군 기치아레 일졔히 뭉치여 용감히 싸우며 또한 중한 량인민은 친밀하게 손을 잡고 억개를 서로 곁고 싸와서 왜적을 때려부시고 넷땅의 자유를 함께 차아오며 동아의 력사를 창조하기 위하야 세게의 화평을 실현하기 위에야 분투합시다. 이것이 곳 본인의 희망하는 바 둘재이웨다.
최후로 12만분의 열성을 다햐야 여러분의 승리와 셩공을 빔니다. (그만)
趙琬九 先生의 祝辭
한국독립당대표
우리 광복군 총사령부가 이제 정식으로 셩립하게 된 것은 임이 셩립보고 가운데에 진술한 바 있음으로 거듭 말삼치 않으러 함니다.
우리 광복운동자들이 종래로 끈침없이 로력해온 최종목젹은 오직 군대를 양셩하며 각종 무장행동을 통일하야 혁명젹 전락으로써 나라에 륙림과 겨례의 자유를 젼취하려고 하는데 있엇다. 그러나 종종의 정세에 억때여 의연히 각자로 젼투젹 력랑이 분산되여 왓음은 절대의 유감이여섯다.
더구나 현하의 객관적 정세를 보면 우방 중화의 거룩한 항전은 우리와 원수의 대상이 같고 리해의 조건이 같함에 닳아서 우리는 기고를 다시 정리하고 보벌을 같이 맞우워 왜적을 소멸하기에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라고 않이 볼 수 없다.
우리 정부에서도 이래의 위대한 게획에 의하야 내외정세의 빛위어 많은 근심과 로력을 다하야 광복군 총사령부를 셩립하는 동시 군계의 중진로장을 선발하야 각군의 통일적 총지휘의 책임을 맞기고 전레를 이처럼 융중하게 거행하며 중외에 발표함은 정말 거룩한 일이라고 촉하하는 바이다.
아! 우리 정부는 전민의 맡긴 책임을 받은지 벌서 22년을 지나는 동안 가진 간난과 위험을 맞보아 왓다. 최근의 사실만을 들어보자. 중일전쟁이 개시된 이래 다수한 혁명동지와 및 군중을 다리고 각지에 포류하면서 일맥정기를 꾸준히 유지하여 왔다. 다만 력량의 천박과 인재의 결소로 인하야 사업의 보조가 많은 장애에 지연케 되엿슴은 역시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확한 립장과 견지한 성충의 앞에는 현재의 미소한 기초가 미래의 광대한 토대로 돌변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정부의 자신도 그러하지만은 우리들도 그러케 믿는다.
보시오! 서반구 교포의 렬셩과 력량이 정부의 일부를 기간이 되여 있으며 종종의 윤함구에 산재하는 멫백만 교포중 무장대오는 말할 것도 없고 민중들만을 보더라도 싸여온 억울과 분로에 넘치어 맹럴한 잠세력을 양셩코 있는 것인바 정의의 깃발이 날니는 날은 그의도 제 역활을 다할 것이다. 엇지 이 뿐이리오. 내지 3천만 동포의 혁명 럴화는 원수의 압력이 강할사록 더욱 고도로 팽창하야 일촉 즉발의 형세를 일우워 있다.
이와 같은 정세가 결코 리상에 끊이지 않고 원수의 소멸과 조국의 광복을 실증하고 있다. 넷날 사실에 빛위여 보드라도 십제개기(十濟開基) 온조건방(溫祚健邦)과 십냔일심(十亂一勾) 주무혁명(周武革命)이 금일 우리의 전감이 않이고 무엇이랴! 이러한 이미에서 우리 일반 한인들은 오날을 깁어하는 것이며 더욱히 우리 한국독립당은 일즉히 조국의 유휘(遺徽)를 게승하고 인민의 정의에 복종하야 임이 본당의 인력, 물력, 정력을 기울여 정부에 공헌하야 우리의 최후 목적을 달성하려고 작정하면서 총사령장군에게 정중히 아래와 같이 비는 바이다.
장군이여! 장군은 거대한 임무와 간난한 사업을 달셩하는데에는 첫째 ‘나라지샹 민족지상’으로써 정신을 삼고 ‘군사데일 승리데일’로써 전락을 삼아 견지룡왕하면 덕으로 하야금 고성락일이되는 동시에 우리의 서광이 안전에 전개될 것은 조금도 고려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물영물외(匆盈□畏)하고 극근극려(克勤克勵)하야 위대한 공업을 하로 밖이 달도 하기 바라면서 이 두워가지 말로써 한국독립당을 대표하야 공손히 빈다.
李靑天(리청텬) 將軍答辭
나는 남북만주에서 왜놈을 잡기로 직임을 삼은지 수십년이엇소. 그러나 어느 정부나 어느 나라에서 나를 위하야 큰 힘을 주느니가 없섰오. 지금 나라의 명령으로 광복군 총사령이 되엿스며 우방의 도움으로 군사상 편의를 밧게되엿으니 분골쇠신 할지라도 나라를 위하야 토성을 다함에는 리충무공을 본밧겟소. 왜놈을 바쉬기 위하야 용맹을 다함에는 최영 장군을 본밧겟소. 다들 부탁하시며 가르치신 여러 래빈의 말슴과 우리 정부 우리 당의 간절하신 말슴은 뼈에 삭여 실행하기를 힘쓰게 슴니다.
光復軍 總司令部 成立典禮記
9월 17일 이날은 한국의 백성된자로서 영원히 긔럼할만한 날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이날 아츰 7시부터 중국의 배도 중경에서 성대히 거행되엿다. 이날을 당한 나의 가삼속에는 뜨거운 피가 끄러오르고 두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흐를만 하엿다.
나는 이렇게 깁부고 위대한 례식에 참례하기 위하야 새벽 4시에 숙소에서 떠나 성내에셔 오리되는 가릉 언덕위에 서잇는 가릉빈관으로 향하얐다. 성안으로부터 신시가지까지 가는 거리위에는 벌서 삼삼오오 떼를 지여가는 한교들의 힘찬 발소리가 새벽잠이 아직도 깊희 드러잇는 시민들의 단꿈을 깨우처 주고 잇다.
가릉호텔은 중경에서 제일류가는 큰 호텔로서 중경에 래왕하는 외인들이 이집에서 만히 류 하고 또 중국 외교부를 중심으로 관민 각 긔관에서 거행하는 국제적 회합이 이곳 싸룸에서 열니는 만치 중경외교게와 사교게에서 가릉호텔을 모로는 사람이 없을 만치 일흠난 호텔이다. 산위로 통한 넓은 길을 다 올너가서 식장에 도착되기는 먼동이 희미하게 터오르는 새벽 5시이다.
높직한 산중턱에 웃뚝 서 잇는 화려한 건축물은 왜적과 싸흐는 3년 동안에 싸흘사록 더욱 강해가는 신중화의 건설력량을 표현식히는 것이다. 뒤에는 웅장한 산을 등지고 앞에는 비단결가치 흘녀 내리는 가릉강을 □하야 멀니 그림가치 뵈이는 푸른산을 대하고 잇다. 오날이 집에서 성대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전례식이 거행되는 가릉호텔은 영원히 우리 한족으로서 긔념할 만한 곳이 될 것이다.
식장 정문에는 태극긔와 청천백일긔가 바람에 펄펄날니며 한중 량민족의 굿세인 련합진선을 상징하고 잇다. 나라를 왜적에게 유린당하고 외역에 류랑하며 악전고투의 혁명생활을 계속하는 우리는 언졔이나 태극긔를 볼적마다 뜨거운 피가 끄러올나올 뿐이다. 례당 안에는 정면에 대폭의 태극긔가 걸니워 잇고 앞테불위에는 화란이 노혓으며 좌우기둥을 건너질너 높직히 달니운 홍색횡액 위에는 한 · 중 · 영 세가지 문자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 이라고 크게 쓴 흰글자씨가 뚜렷하게 광채를 나타내고 잇다. 바로 그 밑에는 흰바탕에 검은 글씨로 쓴 중국군사위원회 부위원장(기독장군으로 일홈난 풍옥상)씨의 보내인 큰 표어가 걸니워잇다. 그 외에 사면 벽위에는 중화 각 기관명인으로부터 보낸 축사와 주련이 죽 걸니워 잇고, 식장중간에 좌우 두줄로 서 잇는 여섯개의 흰기둥과 전후좌우의 유리창 위에는 대소의 태극긔와 청천백일긔가 꼬차되야 걸녀잇어 식장안에는 가장 엄숙하고도 화려한 기운이 가득할 뿐이다. 또 멀니 좌우쪽 모퉁이에는 오날의 성대한 례식의 일등일정을 필림에 찍여서 젼세게 곳곳에 전파식히랴고 관립 활동사진 졔조창에서 파견한 활동사진 기사들이 벌서부터 눈이부시는 강렬한 전기광선을 준비하고 잇다.
아참 6시에 례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중경시간으로 보아 굉장히 일은 시간이다. 이것은 왜놈의 비행기가 습격하기 전에 전부 례식을 마치기 위한 것이다. 내외 각게의 중요한 인물들을 청한 까닭에 공습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안을 수 없다는 것이 특별히 전례위원회의 설명이다. 그러나 오날은 이상히도 날이 흐리고 안개가 끼여서 공습의 염려가 조금도 없이 되엿다. 따라서 녜식 거행시간도 한시간 드리워젓으니 이것은 래빈들의 편의를 고려한 전녜위원들의 림시 변통이다. 6시가 조금 지나자 각게의 중요 인물들이 호텔정문을 향하야 물밀듯이 드러오기 시작한다. 정문 좌우에는 당국에서 특파한 군경들이 럴립하야 잡인의 출입을 검지하고 래빈이 왕래하는 길거리마다 경찰이 느르서서 귀빈의 거마를 보호하고 잇다. 얼마 안이하야 류선형 자동차가 호텔문 앞에 정거하고 륙군대장의 군복을 입은 중경위술총령관 유치장군이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쳔쳔히 거러드러온다. 뒤를 이여 군정부, 군령부, 중앙당부 등 각 군정긔관의 대표들과 신문게와 단테의 대표 특별히 원조를 주는 우방동지들이 물밀듯이 드러오니 남녀 초대원들은 손님을 인도하기에 골몰하다. 식이 개시되기 전에 내빈을 초대하는 응졉실 쏘파우에는 빈자리가 없어 손님이 가득차 잇고 전녜식 주석 김구 선생과 광복군 총사령 리청쳔씨는 만면춘풍의 깃분 얼골로 응졉에 분망하며 그새이로 백설가치 힌옷을 입은 뽀이들이 코피쨘을 들고 왔다갓다 하며 졉대가 매우 주도하다. 먼저 광복군 총사령부 막료와 부직원들이 렬을 지여 드러오니 나라를 광복하고 새나라를 건설하겟다는 무거운 짐을 두 억개에 지고 기운차게 행진하는 광복군의 자태는 대번에 실내의 공긔를 긴장식히엿다. 다음으로 림시정부 국무원과 한국독립당 당원 전테가 일제히 착석한 후 주석 김구 선생과 총사령관 리쳥쳔씨의 인도로 내빈들이 내빈석에 렬좌하엿다.
일곱시 정각이 되매 애국가로 네식이 개시된 후 김구 선생의 개식사가 시작되자 각 신문사의 사진관과 활동사진기사들은 이곳 저곳에서 사진찍기에 분주하다. 기자가 해외에 나온지 십여년 동안에 양복입은 김구 선생을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식장 중앙에는 사령부 직원들이 오렬종대로 느러안고 그 우편에는 보통내빈석과 신문기자석이 배치되고 주석대 우편에다 림시정부국무원 일동과 총사령관이 쫘진하얐으며 그 다음으로 한독립당을 비롯하야 각 단체의 대표들이 느러안젖다. 주석대 좌편에 배치된 귀빈석에는 고급장관들이 혹은 친림하야 참가하고 혹은 대표를 보내여 참가식히는 등 성황을 이루엇스니 여섯시라면 아직 햇발이 희미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다수한 래빈이 온 것은 항일전쟁과정에서 분투하는 신중화의 관원들이 얼마나 각근 분투한다는 것을 짤 알 수 잇다.
다음으로 조소앙 선생이 긴 수염을 휘동하며 천천이 나와 한국광복군 셩립경과에 관한 자세한 보고가 잇슨 후 홍만오 션생이 림시정부를 대표하야 웅장한 음셩으로 훈사를 랑독하니 이때에 장내의 공기는 긴장의 최고봉에까지 달하엿고 순서가 밧귀일 때마다 카메라 반의 활동이 빈번하다. 한독대표 조완구 선생의 축사가 끗난 후 총사령 리청천장군은 장화를 신고 버서진 널분이마를 들고 나서서 장엄한 태도로 답사를 간단히 한 뒤에 배달청년기술연구회로붙어 광복군 성립을 축하하기 위하야 맨드러 보낸 찬란한 비단의 헌긔식이 잇슨후 래빈에 축사가 시작되엿다.
본시 위슈총사령관 류치 선생의 졍중하고도 간곡한 치사를 비롯하야 래외 래빈의 치하가 끝나고 긔넘찰영을 백이고 나니 시간은 상오 10시이다. 광복군의 용감한 행진을 따라 호텔문밧그로 나오니 활동사진반은 산회의 관영을 카메라에 넜느라고 분주하다.
9월 17일날은 우리 민족으로서 영원히 긔넘할 만한 감격에 넘치는 날이다.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포의 가삼속에는 오직 뜩거운 피가 끄러오를 뿐이다. 30년 동안 격거오뎐 한과 왜로의 원슈를 갑을 때가 이때이다. 그런즉 모릇 배달의 족속은 일심협넉하야 돈잇는 이는 돈으로 힘잇는 이는 힘으로 조샹나라의 광복을 위하야 희생적으로 분투하자.
우리 앞에 광명이 비취어 있다.
한국광복군 승리만세
대한독립만세
商務日報 社評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임이 본월 17일에 우리의 전시 수도에서 정식으로 성립하엿다.
일본 악마의 압박 아래에셔 해방을 급히 도모하는 한인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깊움에 넘일 것은 물론이오. 중한 량민족의 공동적인 폭일에 향하야 영용한 항전을 하는 오날에 우리들도 한국광복군에 성립에 졔하야 역시 똑같이 끗없는 깁붐과 경축을 표시한다.
중한 량민족의 력사적 관게가 가장 장구하고 지리적 관게도 극히 밀절하엿다. 리상과 정리상으로 말할지라도 모다 비상히 갓가윗던 것이니만침 응낙 친선하게 합작하여야 될 것이다.
중화는 삼민주의로써 립국에 최고원리를 삼아서 세게 각민족까지에 모다 독립균등에 지위를 얻기를 희망한다. 중화는 삼민주의를 실현하러고 현재 3년 3개월 이상에 간고한 항전을 게속하야 일본으로 하야금 진흙 속에 빠인 발쳐럼되게 만드렀다. 한인이 오날에 의기를 높이들고 중화항젼 대오에 들어 자신에 해방을 위하야 싸홈을 젼개함은 우리들에 최고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친애하는 한인 동포들! 강도 폭일에 궤뢰하는 때는 곳 중화혁명 성공에 날이며 역시 한국 광복성공에 날이니 동포들은 로력하야 최후 승리로 하야금 하루밟이 우리 중한 량민족의 눈앞에 날아나게 하기를 발안다.
▪ 『한민』 제23호, 1940년 10월 15일.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