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 장안면 우당고택(한옥고택중 제일 큰 집, 신안이 소점한 기혈)
1. 우당고택(愚堂古宅)
보은 장안면 개안리152-2에 우당 선영흥(宣永興, 1862~1924 보성선씨 창의공파18세손)이 3년(1919~1921)에 걸쳐서 당대 최고의 목수를 동원하고 제일 좋은 목재를 사용하여 건축한 한옥이다. 처음에는 99칸을 지었다가 1926에 관선정33칸(학생들 기숙 교육용 건물)을 달아내었는데 지금은 110칸이 보존되어 있다. 담장안의 면적이 3900평 외부 소나무숲이 3천평이다. 우리나라 3대 한옥(강릉 선교장, 청송 송소고택, 보은 우당고택)중 규모가 제일 크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창건(創建)과 부침(浮沈)
창건과 성장의 발자취는 이 고택에 그대로 남아있다.
1) 선차흠부부의 효열(孝烈閣)---정신적 기틀
우당의 아버지 선차흠은 부친이 눈병에 걸렸을 때 의원으로부터 매고기가 특효약이라는 말을 듣고 7일간 기도를 하자 매가 스스로 잡혀주어 치료를 할 수있었다고 하고 부인 김씨는 남편이 사경에 이르러자 손가락피를 내어 연명시켰다고 한다. 고종29년(1892년) 효자와 열녀로 인정받고 1928년 고택 안에 정려각을 세웠다. 이러한 효성과 부부애가 가계(家系)의 정신적 기틀이 되었다.
2) 우당 선영흥---창건기(創建期)
우당은 전남 고흥 거금도 출신으로 우무가사리등 해산물을 일본과 중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아 전국적인 부자가 되었다. 고흥의 두원, 점안, 남양, 남면등지에 소작농을 보유하였는데 소작료를 받지 않고 세금도 대납해주었다. 고흥 주민들은 1922년 그 공덕을 기리어 고흥에 선공(宣公)영홍 시혜비(施惠碑)라는 철비(鐵碑)를 세웠다. 현재 이 비는 도로개설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는 경주 최부자집과 같은 명당에 집을 지어서 후손들이 번성하기를 염원하고 지관을 전국에 파견하였다. 그러던 중 “육지속의 섬을 잡으라”는 선몽을 꾸고 서울 여의도 천안등지를 거쳐 속리산 남쪽 개안리에 오게 되었는데 삼가천(속리 천황봉에서 발원하여 탄부면 구암리에서 보청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이 에워싼 형상이 꿈에 본 곳과 일치하였다. 일대 수십만평을 매수하고 1903년(고종40년)경 고흥에서 소달구지 수십대에 이사짐을 싣고 이사하였다. 고택은 1919년 착공했다는데 이론이 없으나 고흥에서 이사한 시기에 대하여 1905년 또는 1910년이라는 이견이 있다. 고흥에서 완전 철수한 것은 아니므로 상당기간 래왕하였을 것이다.
3) 장남 남헌(南軒)선정훈(宣政薰, 1888~1963)---전성기(全盛期)
우당 사후에 가업을 이어 받고 서울 화신백화점자리에 대동상사를 설립하는 한편 1926년 고택옆에 33칸 관선정을 지어서 인재양성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1939년경 항일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하여 폐쇄당하였다. 그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이라는 가훈을 걸어 놓고 선행을 하였으니, 소작료를 면제해주고 춘궁기에는 만주의 좁쌀을 대량 구입하여 나누었고 해방후 혼란기에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구명해주었다. 이러한 선행덕에 육이오때 가문이 무사했다. 1990년에는 헛간을 개조하여 고시생을 후원하였는데 사법고시합격자만 50여명에 이르런다.
4) 쇠퇴기(衰退期)과 회복기
남헌 사후 1970년대 새마을사업에 따라 동쪽 물길을 막고 직강공사를 하여 개간 작업을 하였던바 1980년과 1998년 두차례의 대홍수를 만나 하천이 범란하는 바람에 담장이 무너지고 많은 손해를 보았다. 이에 증손자 선민혁이 마을의 양해를 얻어 두갈래 물길로 원상복구시켰다. 1980년경 가세가 기울어져 제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인들이 패물을 팔기도 하였다. 지금은 간장 판매와 관광객방문등으로 활기가 넘친다.
3. 풍수적 관찰
* 대개 선몽으로 택지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찻집을 운영하는 셋째집 며느리의 말은 조금 다르더라. 우당이 지관에게 양택지를 잡아달라고 부탁하자 지관은 수원과 보은에 있는 터를 보여주고 수원은 재물이 있을 곳이고 보은은 자손이 번성할 곳인데 어느 곳을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우당은 재물은 지금으로 충분하니 자식번성지를 택하겠다고 하였다. 우당에게는 4남이 있었는데 보은에 이사올 때 장남 선정훈은 17세(1905-1888)이었고 고택 완공시 33세이었다. 4형제가 고택에서 함께 살다가 1940년 선정훈은 고택내의 선병국가옥에 살고 선병우고가(3남 선준현, 현재 찻집), 선병묵고가(4남 선남훈, 현재 홈스테이)를 신축하여 셋째와 넷째를 분가시키고 차남은 고향인 고흥 도양읍 옛집을 분재하였다.
* 선병우고가의 며느리 말에 의하면 장남은 13남매를 두었고 3남은 9남매를 두었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자식을 많이 두었다 한다. 또한 지관은 지기가 쇠퇴하였다가 80년 뒤에는 회복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물은 애당초 목적이 아니었다.
* 우당 고택이 있는 섬은 어디로 입수되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육지에서 물을 건느는 맥은 보통 개천(開川)이 얕은 경우이고 바다를 건느는 경우에 깊은 해저(海底)를 건느게 된다. 여기의 개천은 제법 깊고 넓다. 주산인 구병산에서 혈처로 乙字 맥으로 내려 왔고 삼가천이 두개로 갈라지는 곳에 선창(先昌)이란 표지석이 있는데 船艙(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를 닿게하는 곳)으로 보아야 맞다. 안내표지석을 보니 송씨가 10승지라 하여 먼저 입주하고(아마도 동네에 입주?) 선씨가 이주하면서 섬이 선박형이므로 배를 댈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선창이라 하였다고 적혀있다. 용은 그 곳 개천밑을 건느서 섬으로 입수하였다고 보인다. 백호쪽 옥녀봉이 좋다. 요즈음 풍수견해로 생기가 산밑에서 또는 바다에서 육지의 혈처로 올라오고 개울을 건너서온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하늘에서 막바로 내려온다는 견해도 있다. 이곳 옥녀봉에서 우당고택으로 오는 생기는 개울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공중으로 영향력이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이는 고택부지가 모래가 내려와 쌓인 삼각지라고 하나 밑바닥은 바위가 받쳐주는 견실 한 곳일 것이다.
* 어떤이는 청백이 없고 물이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점을 흉본다. 그러나 연화부수보다는 행주형으로 본다면 흉은 감소된다. 고택은 큰 배요, 개천 건너 선씨 고가 두 집은 부두에서 큰 배로 화물을 운반하는 작은 배이다. 즉 행주형이다. 선창을 막았다가 낭패를 보았는데 만약 섬에서 들판쪽으로 다리를 놓는다면 화물이 바다로 쏟아져서 폭망할 것 같다.
* 섬이 명당임을 알아보았고 좌향을 바로 잡은 점은 탄복할만 한데 더 나아가 자식이 번성하고 경제가 쇠하였다가 회복된다는 발복예언도 신기하다. 우당이 고흥에서 돈벌이 하면서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명당 찾아 천리를 이사하고 재물보다 후손번성을 택한 조치 또한 도인의 경지이다. 神眼과 道人의 합작품이다. 용맥을 연구하하는 풍수는 꼭 와서 보아야 할곳이다.(2023.8)
4. 사진
* 중국---주산 구병산에서 옆으로 길게 왔다. 입수터를 찾기 어렵다.
* 옥녀---고택대문과 옥녀봉
* 고택에서 본 구병산 행룡---구병산의 꼬리이므로 상등중급이 되지 못했다.
* 소국---우당고택은 상등 초급, 선병우고가는 중등초급, 선병묵고가는 동네길지급이다.
* 고택 본가---위엄있다.
* 위선 최락(선행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우당 부자가 가훈으로 걸어 놓고 적덕을 많이 하였다.
* 우당의 부모 효열각과 시혜철비(施惠鐵碑)---철비의 내용인 즉, “논밭을 나누어주어 은혜를 베풀고 세금도 부담해주니 농사짓는 사람은 배고프고 가난한 것을 몰랐다. 공이 아니고 누가 이런 은혜를 베푸리오” 라는 내용이다. 고흥의 두원 정암 남양 남면 소작인들이 1922년 현지에 철비를 세웠는데 뒤에 도로공사로 철거해야 되자 면민들과 상의하여 고택으로 이전했다
* 전국 장독---황해도등 전국에서 좋은 장독7백개를 수집하고 선씨 집의 씨장독2개를 이용하여 장을 담군다. 씨장독은 350년된 장을 매년 일부씩 퍼내어 새간장의 씨앗으로 삼는다. 지금은 간장을 소량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