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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마티아 신부(홍보위원회 부위원장)는 정진석 추기경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한 이로 꼽힙니다. 허 신부는 정진석 추기경의 삶의 이야기를 2016년 5월 15일부터 2017년 11월 26일까지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해, 한국 근현대사와 현대 한국 교회의 큰 흐름 속에 있었던 정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소개했습니다. 2018년 가톨릭출판사는 이 원고들을 모으고 새롭게 구성해 《추기경 정진석》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는데, 일부를 소개합니다. 《추기경 정진석》은 가톨릭출판사 인터넷 서점(www.catholicbook.kr) 또는 온라인 서점(YES24, 교보문고 등)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추기경 정진석은 1931년 12월 2일 서울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지 나흘 만인 12월 6일 명동성당에서 ‘니콜라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호적에 등록된 생일은 12월 7일이지만 그 전날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호적 문서로만 보면 낳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가톨릭 집안에서는 먼저 세례를 받아 교회에 이름을 올리고, 그 후 호적에 이름 올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26쪽)
“진석아! 만과(晩課, 저녁기도) 바칠 시간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 안방 십자고상과 성모상 앞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 기도문을 바닥에 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 준비를 했다. 저녁에 긴 만과를 하다 보면 어느새 어린 진석은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사르르 잠이 왔다. 한참 지나고 나면 결국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고 말았다. 지금도 정 추기경은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때 어린아이가 기도하기가 여간 싫은 게 아니었을 것 같은데, 특별히 싫고 좋고 할 여지도 없었다. 그에게 기도는 갓난아이 때부터 그냥 생활이었고, 당시의 독실한 신자 집안에서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 기도의 시간이 평생의 아름다운 추억 중의 하나가 되었고, 자신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7~29쪽)
1996년 6월 6일 오전 8시쯤 아침을 든 어머니는 “잘 먹었으니 조금 쉬겠다.”하면서 잠을 청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편안하게 자는 모습으로 정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생전 안구 기증 의사를 밝히신 만큼 바로 안구 적출 수술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인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 로마 시대 두 눈을 잃고 순교한 루치아 성녀의 삶을 따라 두 눈마저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42쪽)
1942년 12월, 한국인 첫 주교가 나왔다. 명동성당에서 매일같이 보던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당시 진석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12월 20일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의 주교 서품 미사가 열렸다. 그동안 성실히 보미사(補Missa, 복사)를 했던 진석은 서품 미사 보미사로 뽑혀 난생처음 주교 서품식을 볼 수 있었다. ……
노 주교님은 진석의 첫 번째 교리문답 선생님이기도 하셨다. 진석은 계성보통학교에서 일반 수업 후에 천주교 교리문답을 배웠다. 노 주교가 교사였고, 다음으로 조인환 신부, 박귀훈 신부가 학교의 교리 수업을 담당했다. 세 분이 진석의 교리 선생님인 셈이다. 교리 수업은 무조건 한국어로 진행됐다. 문답책이 한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 안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굉장히 엄한 벌을 받았다. 유일한 한글 수업이기도 했던 교리 시간 덕분에 진석은 한국어를 잘 배울 수 있었다. (52~53쪽)
과학자의 꿈을 간직한 정 추기경은 1950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새로운 것을 발명하여 세상에 선익이 되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에게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가 대학 1학년생이 되어 여전히 푸른 꿈을 꾸던 어느 날, 갑자기 터진 6·25 전쟁은 세상 모든 비참을 가져온 듯 상황을 암담하게 했다.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발명된 많은 것들이 무기로 변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진석은 그의 꿈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다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끔찍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과학자의 꿈을 꾸던 청년에서 사제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되었다. (34~35쪽)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얼마 후 서울 지역의 젊은이들을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했다. 진석은 집에 머물던 중 강제 징집 소문을 듣고는 삼선교 친척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은신처를 만들어 육촌 동생과 함께 숨어 지내게 됐다. 인민군이 집집마다 수색하고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74쪽)
서울 수복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밤이었다.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났다. 포탄 하나가 진석이 은신한 집 위로 떨어진 것이다. …… 그런데 좀 전까지 옆에 있던 동생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너진 서까래가 동생을 덮친 것이다. 진석이 눈앞에서 본 첫 죽음이었다. (84~85쪽)
진석도 제2국민병 소집 명령을 받았다. …… 날이 저물었을 때 얼어 붙은 한강을 건넜다. 긴 대열이 오랫동안 걸어서 얼음 위에 길이 생긴 것 같았다.
“우지끈!”
한참을 걸어 뭍으로 올라온 순간, 진석의 등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진석이 강을 건넌 직후 얼음이 깨져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 여럿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손쓸 틈도 없이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94쪽)
6·25 전쟁을 통해 여러차례 죽음의 체험을 한 정 추기경은 미군 부대에서 통역장교로 일하던 중 영적 아버지인 김영식(베드로, 1909~1963) 신부를 만나게 된다. 황해도 연백성당 주임이었던 김 신부는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란을 왔는데,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기 위해 영어를 잘하는 통역을 찾던 중이었다. 당시 진석은 참혹한 전쟁을 겪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자신이 꿈꿨던 과학자로서의 길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지향으로 연구와 발명의 길에 매진하더라도 과학이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김 신부의 일을 도와 통역하다가 미군부대 서가에 꽂혀있던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읽게 되었다. 진석은 마리아 고레티의 순수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큰 사랑을 다시 느끼게 되고 사제성소를 굳게 결심하게 되었다. 진석은 영어로 된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진석이 속으로 신학교를 가기로 결정한 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린 것은 어머니였다. 홀어머니를 두고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가장 노릇을 해야하는 진석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담담하게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 곧장 (당시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주교에게 입학 허락을 받으러 갔다. 노 주교는 진석이 외아들이라 안 된다고 거절했지만 어머니의 완고함에 이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에 입학한 진석은 번역한 책에 대해 한참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1955년 한공렬 학장 신부가 진석을 불렀다.
“이거 자네의 책이네.”
건네받은 책은 진석이 2년 전 번역한 《성녀 마리아 고레티》였다. 그런데 책의 역자 부분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당시 학장신부와 《경향잡지》 사장 윤형중 신부가 상의 끝에 신학생 이름이 출판물 저자로 나오게 되면 성소(聖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책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넣었다고 한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와의 인연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68년 로마로 유학 간 정진석 신부는 1970년 7월 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교구 모금사업을 하던 중, 당시 주미 교황 대사로부터 주교 임명을 수락하겠냐는 서신을 받는다. 그 서신을 받은 날이 7월 6일이었는데, 바로 마리아 고레티 성녀의 축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전율했다. (124~125쪽)
진석은 사제수품 성구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를 택했다. 상본 앞면은 진석이 지은 첫 책 《장미 꽃다발》의 표지로 대신했다. 사제서품 예식은 명동대성당에서 있었다. (138쪽)
▲ 정진석 신부의 사제 서품 상본 앞면과 뒷면
소신학교에서 라틴어 교사로 활동한 것은 진석 자신에게도 라틴어 실력을 갈고닦는 시간이 됐다. 이는 훗날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라틴어 서한을 번역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였다.
당시 정 신부는 소신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국립 서울중앙방송국(KBS)에서 천주교 방송을 진행했다. 당시 방송국은 남산에 있었다. 천주교 교리나 강론 등의 원고를 쉽게 작성해서 방송하는 것이었지만 방송 준비하는 것이 서품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제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색다른 경험과 매력이 있었다. 정진석 신부는 그때 방송한 원고도 착실하게 엮어 《라디오의 소리》와 《라디오의 메아리》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펴냈다. (152~153쪽)
학생들을 가르치던 라틴어 선생 정진석 신부는 1965년 교구청으로 부름을 받고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67년까지 서울대교구의 상서국장을 맡았다. 당시 상서국장은 교구 공문서를 책임지는 오늘날의 사무처장 역할을 했고, 교구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비서도 겸하는 자리였다. 어린 시절 한국 최초의 주교 서품식에서 보미사(복사)를 서며 보필한 노기남 주교를 사제가 되어 더 가까이에서 모시게 됐으니 참 신비한 인연이었다. (155쪽)
정진석 신부는 1968년 10월 3일 유학길에 올라 로마의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면 신학교 교수가 되어 후배 신부들을 양성할 꿈을 꾸고 있었다.
정 신부는 1970년 방학이 되자 미국으로 향했다. 다른 신부들처럼 미국 교회를 방문해 교구 모금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주미 교황대사관으로부터 주교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급작스런 부름에 정 신부는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교회의 부르심에 순명했다. 자신의 삶은 이미 6ㆍ25 전쟁 때 덤으로 얻은 삶이었기에 ‘주님 뜻대로 하시라’고 여겼다. 바오로 6세 교황이 정 신부를 제2대 청주교구 교구장으로 임명한 날은 1970년 6월 25일이었다. 20년 전 같은 날 전장의 한복판에서 인민군 탱크를 마주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인생이었다. (178쪽)
정 주교는 자신의 주교 사목표어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이 사목 표어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택한 것으로 교구장의 사목 지침을 밝힌 셈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186쪽)
정진석 주교는 청주교구 자립과 사목체계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인 교구장 임명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가 일정 부분 담당했던 교구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재정 자립’이 교구의 첫 번째 과제가 됐다. 이후 1970년대 내내 교구와 각 본당은 자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 사제 양성이 시급했다. 정 주교는 가는 곳마다 성소 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자녀들을 우리 힘으로 키워 사제로 만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201쪽)
한발 더 나아가 정 주교는 가난한 교구에서 생활하려면 교구장 본인부터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제들이 교구장의 말을 따를 리 없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가능한 한 지출을 줄이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우선 방의 냉난방부터 조절했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배어 나중에도 더운 여름날에 냉방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 주교의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옷은 고작 몇 벌이었고 서류 가방도 하나로 수십 년을 쓸 정도였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종이 한 장 낭비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203쪽)
정 주교가 강조한 신앙 내실화와 복음화 사업, 가정의 중요성은 이후의 사목 방향에서도 근간을 이뤘다. 정 주교의 착좌는 청주교구 사목의 제2기가 시작됨을 의미했다. 1970년 착좌 이후 3년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1974년부터 교구 행정 체제를 개편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정 주교는 교회법 규정에 맞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교구 행정 체제를 확립하고자 박차를 가했다. (205쪽)
우연한 기회에 최양업 신부의 라틴어 편지를 접한 정 주교는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정 주교는 글의 첫 장에서부터 푹 빠져버렸다. 최양업 신부의 라틴어 문장은 그 구조나 표현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글씨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번역하고 싶은 마음에 정 주교는 일상 업무 시간을 피해 틈틈이 작업했다.
날은 자꾸만 더워져 갔다. 당시엔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도 잘 틀지 않았던 정 주교는 땀을 뚝뚝 흘리며 작업에 몰두했다. 낮에는 땀이 흘러 원고지 종이가 손에 들러붙기 일쑤였다. 정 주교는 고육지책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번역에 매진했다.
번역한 원고는 가장 먼저 최석우 신부(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장)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김대건 신부의 원고 번역도 부탁한다는 전갈이 왔다. 선배 신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정 주교는 그렇게 김대건 신부의 편지 번역도 이어가게 됐다. 그렇게 정 주교는 번역자로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났다. 정 주교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이후 이 번역물들은 책으로 출판됐고, 많은 이들이 두 신부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됐다. (231~232쪽)
- 최양업 신부의 서한-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1995, 성바오로출판사)
- 김대건 신부의 서한-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1997, 성바오로출판사)
가톨릭교회가 준수해야 할 교회 법규들을 담은 「교회법전」. 교회에 매우 중요한 책자임에도 우리나라에 라틴어와 일본어 대역판으로 출판된 것이 1960년 전후였을 것이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정진석 주교는 교회법에 관심이 많아 라틴어-일본어 대역판 교회법전이 출판되자마자 구입해서 읽어 보았다. 하지만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내내 걸렸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더 공부해서 내가 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번역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1983년 새 교회법전이 반포되었고, 주교회의에 정 주교를 필두로 한 교회법 번역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번역이 진행되는 대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사목》에 번역본을 한 부분씩 실었다. 1983년 시작한 번역 작업이 1989년에 끝이 났다. 곧바로 교황청 허가를 받아, 같은 해 라틴어-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출판할 수 있었다
법전 번역을 하다 보니 우리나라 환경과 다소 달라,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어 보였다. 교회법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교회법전에 열정을 쏟은 정 주교는 신자들을 위해 또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교회법전 해설서를 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정성껏 작업한 해설서가 장장 15권에 이르렀다. (239~242쪽)
1998년 5월 30일 오후, 교황청에서 공식 발표가 나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는 교구장 정년을 맞아 사의를 표명한 김수환 추기경의 사임 신청을 받아들여 후임 서울대교구장에 주교회의 의장이자 청주교구장인 정진석 니콜라오 주교를 임명했다.”
교황청 발표 직후 청주교구청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김수환 추기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 대주교님! 축하드려요. 그리고 내일 보좌 주교님들과 꾸리아 신부님들을 청주로 보낼 테니 착좌식 날짜와 준비를 상의해줘요. 고생 좀 해줘요.”
“추기경님!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사람이 추기경님의 후임자가 돼 송구합니다.”
정 주교는 28년 전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되던 당시, 김 추기경의 연락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로마 유학 중 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모금 중이던 그에게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준비해 주겠노라 연락을 주었던 김 추기경이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인연이었다. 큰형님 같은 김 추기경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267~268쪽)
정진석 대주교는 청주교구장 시절부터 줄곧 ‘생명’ 문제를 사목의 중심 주제로 다뤘다. 그는 이제 생명 운동에 역량을 집중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교구에 관련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 세계에서 생명 운동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을 위한 수상 제도를 마련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이미 이 사회의 생명 가치는 무방비로 훼손이 된 상황이었다.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의 시작은 이렇듯 거침이 없었다.
2005년 10월 5일 생명위원회 발족식이 열렸다. 정 대주교는 이 자리에서 이미 연구 기반을 확보한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가톨릭세포치료사업단을 통해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 데 집중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 사업을 진행하는 생명위원회는 정 대주교를 위시해 총대리 염수정 주교가 위원장을, 사회목담당 교구장 대리 김운회 주교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위원회에는 주교들을 비롯해 교구청 사제들은 물론,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생명연구 분야 교수들도 포진했다. 정 대주교는 발족식에서 서울대교구가 생명을 파괴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 대신, 교회가 대안으로 제시해 온 성체 줄기세포 연구를 촉진하고 생명 문화 확산에 앞장설 것임을 강조했다. (342~343쪽)
2006년 2월 22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37년 만의 새 추기경 임명은 한국 교회 경사였다. 그동안 한국 교회 교세 성장에 따른 아시아 선교에서의 주도적인 위치, 그리고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 등으로 매번 추기경 임명 때마다 두 번째 한국 추기경이 나올 것이란 소문이 떠돌곤 했다. 또한 통상 주교직의 은퇴 나이가 75세인 것을 감안하면 만 74세인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한 것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353~354쪽)
2006년 3월 24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새 추기경 서임 예식이 거행됐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시작기도가 끝나고 새로 서임된 추기경들의 명단이 발표됐다. 정 추기경은 여덟 번째로 호명됐다. 새 추기경들의 신앙고백과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 후 교황은 새 추기경 한 명 한 명에게 진홍색 주케토와 비레타를 씌워 주며 포옹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다음날 3월 25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정 추기경과 새 추기경들과 함께 서임 축하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미사 후 로마에 있는 ‘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은 축하연을 열었다. 신학원 성당에서 봉헌된 강론에서 정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몸과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들에게 영혼의 평화, 마음의 평화를 주는 밤하늘의 작은 별빛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주변 사람에게 작은 별, 작은 빛처럼 마음의 평화를 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360~363쪽)
서울대교구가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60주년을 맞아 2006년 6월 18일부터 9월 16일까지 개최한 교구 성체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서울대교구가 생명나눔 운동에 솔선하자는 취지로 이 행사를 기획했다.
서울대교구는 성체대회 기간 주일·평일 미사 봉헌과 성체조배 참여 운동, 생명문화 알기와 참여 운동, 영·유아 국내 입양 운동과 전 신자 장기 기증 등록증 갖기 운동, 하루 100원 모으기 100만 신자 참여 운동 등 성체성사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서울대교구 신자들은 위의 실천 방안을 실생활에서 구현하겠다는 ‘헌신 봉헌서’를 작성, 본당별로 취합해 장엄 미사 때 지구별로 봉헌하기로 했다.
2006년 6월 23일에는 ‘사제 성화의 날’ 행사가 열렸다. 교구 성체대회 중 열린 사제 성화의 날을 좀 더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 정진석 추기경이 발 벗고 나섰다. 정 추기경은 이날 공개적으로 ‘뇌사 시 장기 기증’과 사후 각막 기증 등 ‘사후 장기 기증’ 서약서를 썼다. 이어 서울대교구 전체 사제 가운데 유학 중인 사제 등을 제외한 600여 명이 사후 장기 기증에 동참했다.
장기 기증 서약에 대해 정 추기경은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나눠주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다면 그 생명을 받는 사람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소중한 것을 나눴다는 생각에 모두가 행복해지며, 생명을 주고받는 사이에 사랑과 행복이 더 커집니다. 사후 장기 기증은 재산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는 자신이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갈 장기들을 나누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므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큰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므로 많은 이들이 사후 장기 기증 운동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365~368쪽)
정 추기경의 퇴임 후 생활도 사실 그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평생 시간표에 맞춰 생활해 왔던 터라 어려운 것은 없었다. 정 추기경은 젊은 시절부터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해 왔다.
정 추기경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해서 책을 쓰고 있는데, 특히 새벽에 하느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책을 쓰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이처럼 정 추기경과 평생을 함께해온 오랜 친구이자 취미는 집필이다.
정 추기경은 어느 순간부터 성경에 맛 들이고 공부하는 데 큰 재미를 느끼게 됐다. 교구장 재임 중에는 꽉 막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성경에 매달렸다. 성경 속 인물에게서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경험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긍정적인 성격에 감사하면서 정 추기경은 오늘도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고 있다. 신학생 시절처럼 시간표대로 기도하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묵상을 하며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대화하려 노력하는 행복한 삶이다.
“추기경님,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421쪽)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