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전투시 정봉욱 중좌 귀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1950년 8월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벌어졌다. 서울 함락 이후 아군의 방어전은 기본적으로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지연작전’이었다. 하지만 8월이 되면서 ‘더 이상 내줄 공간이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방어선 중에서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그것은 곧 ‘대한민국의 멸망’이었다. 워커 미8군사령관은 8월 11일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180km로 전선을 축소 조정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한편, 김일성은 7월 20일 충북 수안보에서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통일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10여개 사단, 14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8월과 9월 두 차례의 총공세를 가해왔다. 그러나 북한군은 병참선이 크게 늘어난 상태에서 소년병까지 징집해 무리한 돌파시도는 북한군의 전투사단들에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부하였던 최용진이 지휘하던 제13사단에서는 사단장의 무모한 지휘에 대한 항명사건과 고급 군관들의 UN군 투항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미 8월 29일 오전 10시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가 백기를 들고 UN군측에 귀순해버렸다. 이는 김일성의 무리한 독전에 대한 혐오감과 13사단장의 다부동 전투 포격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에서 야기된 것이지만 당시 북한군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9월 19일 국군 제1사단의 공격을 받아 왜관 동북쪽의 가산을 방어하고 있던 제13사단과 제1사단이 붕괴됨에 따라 제1군집단과 제2군집단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는 한편, 미 제1군단의 주공부대인 제1기병사단이 왜관을 점령하고 그 북쪽에서 국군 제1사단이 돌파구를 확장하자 북한군 부대들은 급속히 무너졌다. 사실상 북한군 사단들은 아래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그뒤 9월 19일과 20일 사이에는 사단참모장이었던 리학구 총좌가 부하를 돌보지 않는 최용진 사단장의 무리한 명령에 반발하여 권총으로 사단장을 쏘고 다음날 UN측에 투항했다. 최용진은 부상당했으나 생명은 건졌다. 그 후로도 제13사단의 주요 지휘관들이 계속 투항했다.그러나 제13사단에서만 항명과 명령불복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2군집단사령관 무정은 권총을 빼들고 진지를 고수하라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고함쳤지만 연대장들이 먼저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 유사한 사건들이 많은 부대들에서 일어났다. 8월에는 왜관-다부동-대구 방면에 주공을 지향했으나, 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돌파에 실패하자 9월에는 모든 방면에서 돌파를 시도해 아군은 한때 영산, 다부동, 영천, 포항을 동시에 돌파당하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낙동강 전투의 마지막 분수령은 영천이었다. 적 15사단이 9월 6일 영천읍을 점령하면서 방어선이 연쇄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이에 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국군 2군단은 8일 영천읍을 탈환한데 이어 9일부터 총 7개 연대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 9월 12일에는 최초의 방어선을 회복했다. 영천전투의 승리로 전선을 안정시킨 아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마산과 영산 돌출부전투는 미군들이 주로 수행하였고 영천, 안강, 기계, 포항전투는 국군이 주도한 전투이며, 다부동전투는 국군과 미군이 함께 싸운 전투다.
화산 전투
화산전투도 칠곡 다부동 전투에 못지않은 치열한 격전이었다. 화산(828m)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 경계에서 조림산과 마주하고 있다. 국군 제6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퇴각한 북한군 일부와 낙동강을 따라 군위 우보에서 영천 신령 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8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맞섰다. 이 무렵 대구에 있던 임시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영천을 사수하는 신녕전투를 비롯해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화산 정상 부근은 모두가 유해 발굴지역이라 해도 된다. 고추장과 주먹밥 한덩이 지원도 끊어지는 전쟁속에 중대병력이 소대병력으로 줄어들었고, 북한군의 피해도 막대함
[교전내용] 화산828m은 지형적인 특성상 넓은 들판지역의 평지같은 곳이다 국군은 주간공격에 많은 전사자가 나오자 야간을 이용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중대원들은 주먹밥에 고추장 찍어 먹고 화산으로 침투 북한군 동쪽진지, 국군은 서쪽진지 서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다 보니 서로의 진지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다. 혼전과 혼전, 전투와 전투속에 진지가 바뀌고 또 바뀌니 식사를 운반해오던 한국청년단원이 적에게 사살되거나 붙들리니 주먹밥과 고추장 한숟갈 조차도 지원이 끊어져 버렸다 . 지원은 끊어 졌지만 실탄은 부족함이 없었다.수없이 쓰러진 전사자의 실탄과 부상자들의 실탄이 보급의 원천이 되었으니... MBC 드라마 2010년 소지섭의 "로드 넘버원" 촬영 배경이 된곳
신녕, 갑령, 화산지구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14일까지 33일간의 피말리는 전쟁을 한 격전지로 신녕지구전투는 갑령, 화산, 조림산 지구전투와 더불어 대구 동북부 방면 방어 작전 중 하나며, 낙동강을 건너게 된 북한군 제 8사단은 아군 제6사단과 교전하면서 신녕 북쪽으로 남침했고, 북한군 12사단과 15사단은 보현산지구로 진출했다.
보현산 전투
보현산 전투는 50년 7월부터 9월 초까지 보현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전개된 비정규전 및정규전 전투였다. 북한군은 남침과정에서 정규전을 실시하는 한편 유격부대를 침투시켜 그들로 하여금 남한에 있는 좌익세력과 합세,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주민을 선동하면서 민중 봉기를 유도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제766부대가 동해안에 상륙한 후 보현산 일대로 진출하면서 유격활동을 펼치게 됐다. 아군은 최초 경찰병력을 동원해 적 유격대 소탕작전을 벌였으나 경찰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7월 하순부터 공병단과 유격대를 투입했다. 북한군 제 766부대가 투입됨으로 비정규전 형식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보현산 전투는 이곳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정규전으로 점차 확대됐다. 즉 국군은 제8사단을 이곳에 투입했고 북한군은 다부동 전방에 있던 제 15사단을 이곳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반면 아군은 이역과 이곳으로부터 남쪽은 접근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적 제 15사단은 운주산과 봉화봉 사이에 형성된 공백지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죽장~자양~영천 축선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고 9월 2일 저녁 공격을 개시해 돌파구를 형성해 영천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아군 제8사단은 결국 보현산을 포기하고 영천 북쪽에서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적은 동부전선의 진출이 지연되어 왜관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적 제15사단을 청송지역으로 이동시켜 전투력을 보강하게 하는 한편 목표로 한 8월 l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반적인 전쟁목표 달성에 차질을 가져왔다. 반면에 아군은 부대를 재편하고 정리하는 한편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획득하였다.한편 보현산 일대에 이동해 주저항선을 형성한 제8사단은 험준한 지세를 적극 활용해 22일간 우세한 전력의 적 제8사단과 제776부대를 억류하고 견제하는데 성공하였다.하지만 신편으로 인한 훈련부족과 병력 및 장비의 열세에 따른 전력 차는 결국 국군 제8사단을 기룡산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작용한 요인이었다.8월 15일 투입함으로써 이후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8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을 투입함으로써 국군 제8사단은 방어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보현산지구전투는 영천지구 전투를 위한 전초전으로서,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전투였다. 다시 말해,적이 총력을 집중한 9월공세로 9월 공세로 부득이 제8사단 예하 제15연대와 제21연대, 그리고 제7사단 제5연대와 독립 제 1, 제2유격대대,강원경찰대대 등이 9월 4일을 기해 인접부대와 연결 작전을 위해 다음 진지로 이동하였다.이로써 국군 제8사단은 모든 병력을 집중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영천 일대에서 결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덕분이다. 과거의 불행을 잊어버리면 그 불행은 또 다시 찾아온다. 낙동강전투의 승리는 대한민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구국의 전투였다. 낙동강방어선이 최후의 보루로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은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경찰, 학도병, 소년병, 노무부대 등의 위국헌신 정신과 실천 덕분이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전쟁을 극복하였는지 제대로 가르쳐야한다. 우리는 전쟁을 각오해야 더 큰 전쟁을 막을 수 있다. 70년 전 전쟁을 겪으며 그 무엇보다 자유의 소중함을 체험했고 우리의 핵심가치로 자유가 떠오르게 되었다.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자유수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