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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플리온에서 아테네로 가다가 에게해를 보면서 여러차례의 해전을 생각하다!
2024년 5월 1일 코린토스에서 버스로 미케네 Mycenae 에 도착해 유적을 구경하고 항구 도시 나프플리온
Navplion 에 도착하는데 신화상의 영웅 나우플리오스 (Ναύπλιος) 에서 따온 유서깊은 항구도시 입니다.
성채에 오른후 해수욕장을 구경하고 거리를 걸어 해변에 이르니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이 보이고 거기에 부르치성이라는 요새가 보이는데...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나브플리오스의 아들 팔라메데스의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버스 터미널로 가서 16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는데 왔던 길을 되짚어 북쪽
으로 달려서 코린토스 외곽도로를 지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코린토스 운하가 보입니다.
그러고는 버스는 오른쪽에 푸르디 푸른 에게해를 끼고 북쪽으로 달리는데....
오른쪽에 보이는건 육지가 아니고 살라미스섬인가 본데, 문득 오래전에
제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 앞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 이 떠오릅니다.
고대의 해전은 갈코리를 던진후 상대편 함선에 올라타 창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인데 그 전에 충각
을 이용한 충격으로 적 함선에 피해를 주었으며 충격시 요동으로 적군 배의 탑승
전투원을 줄이는 부수효과도 얻을수 있었으니 기원전 480년 9월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 입니다.
다리우스가 죽고 페르시아 왕위에 오른 아들 크세르크세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제3차 그리스 원정을 준비
했으니 BC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16만명의 병력과 1,200척 함선을 끌고 그리스로 진격했는데,
그 전에 노예들을 동원해 헬레스폰토스 (다르다넬스) 해협에 선박을 연결시켜서 만든 “다리” 를 건넜습니다.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 방위선을 돌파하게 되는데....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군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가 테르모필레에서 7일 동안 페르시아 군을 막아내며 “그리스 해군의
퇴각 시간” 을 벌어준 덕분에..... 아테네인들은 아티카를 포기하고는 살라미스 섬으로 도망칩니다.
페르시아군은 빈 아테네성은 점령했으나 살라미스섬 공격이 여의치 않으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거짓 정보를 보내 페르시아군을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하니 BC 480
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한 그리스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 하게 됩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
주리라”.... “테미스토클레스” 의 호소로 아테네는 “3단 노함선” 을 건조했는데 170명이 노를 저을수 있는
배는 1인당 하나의 노를 맡도록 했으며, 노는 3단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니 총 380척 함대 를 확보했는데
1,200척의 페르시아 함선과는 비교가 안되는 숫자지만 그리스 3단 노함선이 질적으로 더 우수 했다고 합니다.
전술적 이점은 그리스 쪽에 있었으니 페르시아 함대는 명량 해전 처럼 “좁은 살라미스 해협”때문에 모든 배가
싸울수 없었는데다가 대형을 유지하지 못한채 무질서하게 공격하는데 비해, 그리스군은 “준비된 장소”
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격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으며“빠른 속도와 단단한 충각” 을 이용할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3단노 함선은 적선의 “노를 부러뜨리고” 적선 “좌우 측면을 들이받는”등 의 기술적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 7시간의 격전을 치른 결과 페르시아는 200척의 함선이
격침당하고 200척이 그리스군에 포획당했는데 그리스 함대는 40척을 잃었을 뿐 이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해전에 패해 보급” 이 끊길 위험에 처하자 서둘러 회군했고 그리스 해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이듬해 여름 “소아시아로 출동” 하여 페르시아의 나머지 함대를 쳐부수었는데 이후 페르시아
의 침공을 받지 않았으며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아테네는 오랫동안 지중해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바다에서 두 번째 해전은 85년 지나 그리스 도시국가들 끼리 싸운 코린토스 전쟁
(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87년) 으로 아테네, 아르고스, 코린토스,
테바이와 기타 반 스파르타 동맹과 스파르타 동맹국(펠로폰네소스 동맹) 이 싸웠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꺽고 승리한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가 소아시아 원정을 감행하자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는 그리스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전쟁을 부추기니 테바이가
응하는데 부차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한 스파르타에 대한 다른 도시 국가의 경계심과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전쟁은 육지에서는 코린토스에서 테바이 부근까지, 바다에서는 여기 보이는 에게해 에서 치러
졌는데, 스파르타는 육지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바다에서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적에게 참패했으니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제국’ 의 대부분을 회복합니다.
그러자 아테네의 성공과 세력 확장을 경계한 페르시아는 노선을 변경하여 정 반대로 스파르타
편을 들었으니 불리해진 반 스파르타 동맹은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387년에 체결된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을 맺으며 전쟁은 끝났으니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전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또한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되었습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국가
들과 페르시아의 협력을 얻으면서 에게해의 여러 섬을 지배했으니 스파르타는 패전국이나
아테네의 옛 속국들로 부터 공물을 요구했고, 전시에 스파르타에 대한 적대행위를 한
엘리스를 기원전 402년에 공격하자 코린토스와 테바이는 스파르타에 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합니다.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는 기원전 399년에 소아시아 원정을 벌임으로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협력자였던 페르시아와 결별했는데 이 원정에서 테바이, 코린토스, 아테네
는 참여를 거부했지만... 아게실라오스는 소아시아의 태수들을 상대로 우세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과 싸웠던 프리기아의 사트라프(태수) 파르나바조스는 그리스 본토
에서 전쟁을 유발하여 아게실라오스를 철수시키려고 로도스 출신의 티모크라테스를
그리스로 파견했으니... 아테네, 테바이, 코린토스, 아르고스를 방문한 티모크라테스는
대 스파르타 전쟁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였고, 반감을 품고 있었던 도시 국가들은 설득됩니다.
기원전 395년 테바이는 스파르타에 직접 도전하는건 내키지 않았으니 동맹국인 로크리스를 부추기니
이에 포키스가 로크리스를 침공하였고, 로크리스가 테바이에 원군을 요청하자 테바이는 포키스
를 침공했으며, 포키스의 원군 요청을 받은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징계한다는 명목으로 병력
을 동원 했는데, 또한 테바이는 사절을 아테네에 파견하였고 보이오티아 연합과 동맹을 체결합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제독으로 활약한 리산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 왕이 이끄는
두 군대를 각각 파견해 보이오티아의 도시 할리아르토스에서 만나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니 리산드로스는 오르코메노스에 보이오티아 연합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리산드로스는 오르코메노스 군과 함께 할리아르토스로 향했지만,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패배를 당해 죽음을 맞았고 며칠후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협정을 맺고 전사자의
시신을 거둔 스파르타로 발길을 돌렸는데 도착이 늦어져 리산드로스를 죽게 한
파우사니아스는 재판에 회부당했고....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테게아로 망명합니다.
기원전 395년 말에 코린토스와 아테네가 대 스파르타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들은 다른 수많은 소국에
사절을 보내 지지를 호소하자 놀란 스파르타는 새 동맹국에 군사를 보내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소아시아 원정을 떠나 있던 아게실라오스에게 특사를 파견해 그리스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기원전 394년 테바이의 승리로 테바이와 포키스가 휴전을 한후 대 스파르타 동맹은 24,000명
의 대군을 집결시키고, 반면 스파르타도 18,0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니......
양군은 코린토스의 네메아에서 회전을 벌였고, 〈네메아 전투〉 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납니다.
한편 바다에서는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는 예하의 에게해 국가의 함선을 집결시켜 120척의
함대를 편성하고 지휘권을 처남 페이산도로스에게 주었으며 페르시아,
아테네 연합 함대는 파르나바조스와 경험이 풍부한 아테네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갖게 합니다.
함대는 기원전 394년 크니도스에서 충돌하였고, 스파르타는 분전했지만 크니도스 해전에서 대패해 스파르타
는 해상에서 퇴출되었고, 승리 이후 파르나바조스는 이오니아 해안을 따라 여러 도시에서 스파르타 인이
파견하고 있던 주둔군을 추방했지만 데르킬리타스가 지휘하고 있던 아비도스와 세스토스에서는 실패합니다.
아게실라오스 군은 페르시아에서 육로로 귀국하면서 테살리아에서 약탈을 한 후에, 진군을
계속해 보이오티아에 도착했으니,기원전 394년 테바이, 아르고스 등 여러
반 스파르타 동맹국에서 모은 병력과 조우해 〈코로네이아 전투〉 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아게실라오스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코린토스만을 건너 스파르타로 귀국합니다.
스파르타는 육지에서는 우세하게 싸웠지만, 바다에서는 열세에 놓여 있었으니 이후 몇 년 동안
스파르타는 코린트와 아르고스를 동맹에서 몰아내려고 공격을 가했는데 한편, 아테네와
테바이는 그 틈을 이용해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에 이용합니다.
기원전 393년, 코논과 파르나바조스는 함선에서 그리스 본토를 향해 라코니아 연안을 강습해 큐테라
섬을 점령하고 수비대와 아테나이 인의 지배자를 남겼으며 코린토스 에 가서 의회
의원들에게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페르시아 왕을 알현하도록 요청합니다.
그후, 파르나바조스는 상당한 자금을 주어 코논을 아티카로 보냈으니 그곳에서 돈으로 고용한 일꾼과
함대 선원으로 아테나이에서 피레우스에 이르는 장성 재건에 착수 해 끝낸후 아테네는
함대를 스슈로스, 임브로스, 렘노스 섬을 점령하는데 이용하였고 클레르코스(시민거주지)를 설립합니다.
그즈음 코린토스에서 민주파와 과두파의 충돌이 일어났고, 아르고스의 협력을 얻은 민주파는
과두파를 추방하자 이들은 스파르타로 도망친후 시키온을 거점으로 했는데
그후, 스파르타 군과 추방자들은 야습을 감행하여 코린토스의 항구였던 레카이온을 탈취합니다.
기원전 392년, 스파르타는 사르디스의 태수 티리바조스에게 안탈키다스를 사절로 파견
했는데 그는 코논이 페르시아 함대를 아테나이 패권 재건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리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의 동맹 측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스파르타 측은 모든 국가의 독립에 근거한 평화를 주장했으나 아테네는 에게해
에서 구축한 세력의 유지를 원했으며, 보이오티아 연합의 지배권 유지를 원하는 테바이와 코린트의 흡수
를 노리고 있었던 아르고스 등의 동맹 쪽에서 거절당하자 강화 회의는 결렬되었는데 이때 코콘의
행동에 경계심을 품은 티리바조스는 그를 구속하고 몰래 안탈키다스에 함대 건설을 위한 자금을 제공합니다.
크니도스 해전에서의 패배 후, 스파르타는 함대 재건을 시작하여 코린토스와의 전투 끝에 기원전 392년경
에는 코린토스만의 제해권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에크디코스 휘하의 소함대로 로도스에서
망명한 과두파를 지원하기 위해 에게해로 보냈지만, 정권을 잡고 있는 로도스의 민주파가
그들 보다 더 많은 함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텔레우티아스가 이끄는 함대를 기다립니다.
스파르타 함대의 부활을 경계했던 아테네는 40척의 함대를 트라쉬불로스와 함께 파견했으니 헬레스폰투스로
향하는 인접한 주요 도시들을 아테네 측에서 설득하여 비잔티움을 지나가는 배에 세금을 부과했고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으로 잃은 세입(동맹 도시에서 공납하는) 을 대신하여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 그는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뮤티레네의 협력을 얻어 섬의 스파르타 군을 물리치고, 도시들을
친 아테네 세력으로 만들었으나 소아시아의 아스펜도스의 침공을 받아 트라쉬불로스는 전사합니다.
이후 스파르타는 아나크시비오스를 케르소네소스 반도(터키 겔리볼루)의 아뷔도스로 보냈으니 그는
파르나바조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아테네 상선을 노획하자 아테네는 이피크라테스를
파견했고 진군해 오던 아나크시비오스 군에 매복 공격을 가해 장군을 포함한 다수를 살해합니다.
기원전 391년 스파르타왕 아게실라오스는 레카이온에 원정을 떠나, 방비가 강화된 지점과
대량의 포로와 약탈품을 얻어 전리품 매각을 준비하는 동안 이피크라테스가
경장보병과 투창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레카이온에 가서 스파르타 군대를 물리칩니다.
이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 경갑부대는 스파르타의 호플리테스를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전력을 줄이며, 괴멸시켰으며 그후 스파르타가 차지했던 많은 요지들을 탈환하고
플리우스와 아르카디아에 원정을 가 있던 플리우스 인들을 물리치고 아르카디아를
약탈하고 다녔으며 이후 아르고스 군은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코린토스를 합병합니다.
이피크라테스의 승리후 코린토스는 주전장에서 벗어났고 펠로폰네소스와 그리스 동북부에서의 전투가 주가
되었는데 기원전 391년에 아게실라오스가 아르고스에 원정을 떠난후 기원전 389년에 반 스파르타 연합
동맹국이었던 아카루나니아에도 원정해 승리를 거두니 아카루나니아는 이듬해 스파르타와 강화를 했습니다.
같은 해 아테네는 에기나를 공격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 함대를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나 아테네 군은 몇달 후 에기나에서 빠져나갔으며 또한 안탈키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로도스에 가려고 했지만 아뷔도스에서 아테네 군에 길이 막힙니다.
에기나에서 아테네 군의 철수 직후에 고르고파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아테네 근해
에서 아테네 함대에 매복 공격을 가해 많은 선박을 노획하자 키프로스로 행하는
길목에서 아테네 장군 카브리아스는 에기나 섬에 병력을 상륙시켜 그곳에 있던
에기나군과 스파르타 동맹군에 매복 공격을 가하여 고르고파스 등 많은 이들을 살상합니다.
그래서 스파르타 함대의 지휘관으로 텔레우티아스를 에기나에 파견시켰다. 그는 아테네가 카브리아스의
승리후 수비를 느슨하게 한 것을 알고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를 습격해 많은 상선을 노획합니다.
기원전 388년, 아게실라오스와 공동 통치했던 아게시폴리스 1세가 스파르타 군대를 이끌고 아르고스를
침공해 시골 지역을 약탈했지만 불길한 전조가 있었기 때문에 귀국합니다.(스파르타는 보통은 왕이 2명임)
안탈키다스는 티리바조스와 협상에 들어가 동맹 측이 평화협상을 거부할 경우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측에 참전한다는 합의를 얻기에 이르렀는데..... 왜냐하면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키프로스의
에바고라스 1세와 이집트 아코리스 왕에 대한 원조를 포함한 아테네의 행동에 질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안탈키다스는 아뷔도스의 봉쇄를 깨고 시라쿠사에서 원군과 자신의 함대를 연합하여 헬레스폰투스
에 가서 아테네로 가는 곡물 수송 항로를 차단하고 아테네가 강화를 할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었으며
티리바조스는 기원전 387년 화의를 주장했으며.... 각국은 같은 해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의 기본 요지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법령에 의하여 발부되었기 때문에
‘대왕의 화평’ 이라 불리는데,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도시를 포함한 소아시아를 영유하고 아테나이에
속해야 하는 렘노스, 브로스, 키프로스를 제외한 그리스의도시 국가들은 모두 독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페르시아는 다시금 그리스 측의 아시아 간섭에서 해방되어 에게해 동부의 지배를 굳건히 했고, 기원전
380년,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시 점령했으며 또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후 페르시아의 자유와 자치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으로 페르시아에 의한 이오니아를 포함한 소아시아의 지배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자유와 자치를 목표로 무언가를 시도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본토 그리스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며 이후 알렉산더 3세 대왕이 이곳을 정복할 때까지 페르시아는 소아시아를 계속 지배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위협 세력이었던 동맹을 해체한다는 평화조약의 조항을 활용해 그리스 패권을 주창했으니
테바이의 세력 하에 있던 보이오티아의 도시를 독립시키라고 압박하고, 아르고스와 코린토스를
분리시켜 코린토스를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복귀시켰지만 그러나 곧 테바이와의 대립으로
보이오티아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서 패배하니 그리스에서의 패권을 상실합니다.
한편 기원전 4세기 중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전 이후 2등 국가로 위신이 추락한 아테네는
이전 만큼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강국의 지위를 되찾고 ‘제2의 아테네 제국’ 이라는
에게해 국가 동맹체를 결성하고는 기원전 404년 패전으로 상실한 세력의 일부를 회복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새에 버스는 아테네 시내로 집입했고 한참 동안이나 더 달린후 나프플리오
를 출발한지 2시간 20분쯤 지나.... 드디어 아테네의 키피소스 버스 터미널로 들어가 멈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