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註:「문견별록(聞見別錄)」은 조선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연행사(燕行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쓴 기행일기이다. 그는 1669년(현종 10) 10월 18일에 출발하여 이듬해 2월 28일 평양(平壤)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어난 일과 견문한 사항을 기록했는데 청나라의 사신 접대 의식과 청나라의 제도및 공자묘(孔子廟)에 대한 내용등이다.
청나라 군주(康熙를 가리킴)의 키는 보통 사람 정도에 불과했다. 두 눈은 눈꺼풀이 늘어져 눈동자가 그윽한데 가늘고 작아 정채(精彩)가 없으며, 광대뼈가 조금 도드라졌고 뺨은 여위고 턱이 뾰족했다. 그는 출입할 때마다 황옥(黃屋.황제가 타는 수레) 안에서 몸을 구부려 우리나라 사신의 반열을 돌아보았다.
성격이 조급하여 돌연 화를 내는 경향이 많고, 세세히 살피는 것을 명철하다고 여겼다. 보정대신(輔政大臣)들이 전권(專權)을 휘두르고 당파를 결성하는 근심을 징계하려고 주살(誅殺)을 이미 많이 자행했고 시기심과 의심이 마음속에 쌓여 대소사를 막론하고 반드시 직접 총괄하려고 하였다.
사람을 등용할 즈음에는 먼저 재집(宰執)에게 현명한지 아닌지를 물어서, 재집이 추천하면 그 사당(私黨)인지를 의심하여 모두 등용하지 않고, 곧 자신의 의견대로 스스로 선발하였다. 그러므로 재집들이 혐의스럽게 여기고 두려워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탐오한 자를 축출하고 청렴한 자를 올려 주며 형벌 쓰는 것이 극히 엄중했는데, 청나라 군주가 보고 듣는 대부분은 인척(姻戚)들의 연줄에서 나왔다. 초피(貂皮) 가죽을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구한 곳을 물었는데 “마침 남에게 샀는데 털이 아주 좋기에 와서 바칩니다.”라고 대답하거든 드디어 초피를 판 사람을 색출하여 “좋은 초피를 구했는데 바치지 않고 팔아먹었으니 어째서인가!”라고 질책하고서 그 사람을 죽였다.
어린 시절 완구(玩具)를 창고지기에게 맡겨 두었는데 어느 날 다시 찾아보니 유실된 물건이 많자 창고지기를 즉시 죽였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마다 주벌이 두려워 내부 변란의 재앙이 있을까 매우 걱정했다. 다만 한민(漢民)들은 오랫동안 권신(權臣)들의 모진 학대에 고초를 당했기에 위력과 폭압으로 하급 관리를 통제하는 것을 매우 통쾌하게 여겨 순치제(順治帝)보다 낫다고 평했다.
관직에 있는 자는 존비(尊卑)와 내외(內外)를 막론하고 탐욕이 그지없어 공문서나 청원서가 뇌물이 아니면 상달되지 않았는데, 근자에 청나라 군주의 엄중한 법 적용으로 인하여 감히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마(鞍馬)의 경우는 예물(禮物)이라고 핑계 대고 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마(駿馬)와 금장식 안장〔金鞍〕을 구해다가 재집(宰執)들에게 주었는데 관직을 얻는 자들이 모두 그러하였다. 말 값이 마침내 높아져서 잘 달리는 말이 작더라도 4, 5백 금(金)이 아니면 팔지 않았다. 안장은 모두 금옥(金玉)이나 진주조개 등으로 장식하였으니, 이런 장식을 갖출 수 없는 자는 길에 나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청나라 군주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사냥을 좋아하였다. 매일 궁중에서 말을 달리며 사냥하였는데, 백성들에게 살아 있는 토끼, 노루, 사슴을 바치도록 하여 금원(禁園)에 풀어 놓고 직접 화살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그 값을 계산하면 토끼는 은(銀) 5전(錢), 노루는 4냥(兩), 사슴은 그 두 배였는데, 납부한 사람에게는 부세(賦稅)에서 그 금액만큼을 면제해 주었다. 길을 가다가 산 사슴을 싣고 가는 자를 만나 물어보니, 또한 진상한다고 답하였다.
숭덕(崇德) 황후에 대해서는 잘 섬겼는데, 순치(順治) 황후에 대해서는 생모가 아니라고 하여 무척 박대하였다. 숭덕 황후가 사냥하러 나가는 것을 자주 경계하자 답하기를 “이미 군병을 쓸데가 없으니 사냥이 아니면 어떻게 기분을 유쾌하게 하겠습니까. 젊은 나이에 또 어찌 답답하게 궁중에 오랫동안 지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지난가을에 산동(山東) 지역으로 나가 사냥했고, 올봄에는 또 서쪽 길을 따라 자금관(紫金關)으로 나가 사냥하였다. 이후에도 빈번히 나가 사냥했는데 연경에서 5백 리로 한계를 삼으려 하였다. 사냥 나갈 적에 수행하는 관원과 서사(胥史), 군병과 말은 그 수가 만(萬)을 넘었다. 백성들의 폐해를 덜어 주기 위해서 식량과 마초(馬草), 제반 도구를 모두 중앙 관사(官司)에서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한 번 사냥하는 비용이 40여만 금(金)에 이른다고 한다.
덕 황후는 어질고 후덕한 데다가 사려가 깊으며 사적인 청탁을 근절하고 뇌물을 받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무릇 큰 일이 있으면 청나라 군주 역시 물어서 결정하였다. 오배(獒背)가 옛 공로로써 죽음을 면한 것도 숭덕 황후의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금년 원일(元日)에 청나라 군주가 태평연(太平宴)을 베풀고자 했는데 숭덕 황후가 호구왕(虎口王) 아들의 시신이 빈소에 있다고 하여 중지시켰다. 호구왕은 바로 순치제(順治帝)의 적형(嫡兄)인데, 순치제가 즉위하자 구왕(九王)이 시기심과 의심으로 그를 살해했다. 순치제가 비명(非命)에 죽은 호구왕을 애도하여 그 아들을 왕으로 봉하였으니, 청나라 군주에게 종형(從兄)이 된다.
청나라 사람이 전하기를, 청나라 군주가 장차 몽고(蒙古) 여자를 아내로 맞아 원후(元后)로 삼으면 이전에 아내로 맞이한 황후는 그 다음 지위를 차지하는데, 이 나라의 제도는 본래 세 황후를 둔다고 한다.
순치제에게 서형(庶兄)이 있는데, 매우 순량한 성격이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어 순치제가 홀대하여 심양(瀋陽)으로 내쫓아 숭덕제(崇德帝)를 매장한 곳에 제관(祭官)으로 충원시켰다. 강희제는 지친(至親)을 소원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왕작(王爵)을 더해 주고 도로 불러들였다. 숭덕제 묘소의 제관은 매 계절마다 공작(公爵)을 번갈아 차임해서 보냈는데, 일행이 거느리는 사람과 말이 수백이기에 도로에서 쓰는 비용을 장차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호구왕은 숭덕제의 장자인데, 구왕(九王)이 섭정(攝政)할 때 모함하여 죽였다. 순치제가 친정(親政)할 적에 그 아들을 봉하여 친왕(親王)으로 삼았다. 날쌔고 용맹했다고 일컬어졌는데 나이 삼십 세가 되기도 전에 두질(痘疾)로 사망하였다. 지금 종실로 친왕에 봉해진 자는 단지 6인만 생존한다고 한다.
오랑캐 제도에 친왕과 군왕(郡王)의 구분이 있는데, 친왕은 1년 늠록(廩祿)이 은(銀)과 쌀 각각 만(萬)이고, 군왕은 친왕의 절반이며 작질(爵秩)도 이와 같다고 한다.
원일(元日)에 예식을 행할 때 청나라 관리들은 전상(殿上)에서 시립(侍立)하는데, 종종걸음으로 심부름하는 자와 정중(庭中)에서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자 모두 엄숙하지 않고 정돈되지 않았다. 늙은 역관들이 “순치제 친정 이후가 구왕의 섭정 때보다 못하고, 강희제 친정 이후가 또 순치제 말년보다 못하니 호령(號令)이 차츰 느슨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아역(牙譯)들은 언어로 두 나라의 일을 전달하기 때문에 예부(禮部)에 소속되어 예부 상서(禮部尙書) 이하 관원이 지시할 뿐이고, 제왕(諸王)과 재집(宰執)은 전혀 서로 만날 길이 없었다. 비록 간혹 일 때문에 불러 물어보더라도 노복처럼 대하였다. 지금은 제왕과 재집이 많이들 조회에서 안부를 묻고 은근한 마음을 전하니, 우리나라 역관들 역시 모두 놀라서 쳐다보면서, ‘근래 뇌물이 풍조를 이루자 저들이 우리나라 재물을 가지고 잘 섬기기 때문에 친밀하다.’라고 하였다. 청나라 사람들은 귀천(貴賤)과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단지 금(金)의 다소(多少)만을 보고서 후대하거나 박대하기 때문에 이처럼 문란하다고 한다.
청나라 군주가 산동(山東)으로 8일 여정으로 사냥 나갔다가 돌아왔다. 사냥할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수색해서 범인을 붙잡아 국문(鞫問)하니, 오배(獒背)의 무리 여섯 명이 활과 화살을 지니고 갑군(甲軍)에 섞여 들어갔다가 세 명은 도망갔고 세 명은 붙잡혔다고 스스로 진술하였다. 어떤 이는 전하기를, 농토를 빼앗긴 한인(漢人)이 호인(胡人)에게 핍박을 당하여 갈대숲으로 도망쳐 숨었다가 사냥하는 기병에게 붙잡혔는데, 음모가 있을까 의심하여 붙잡아서 가두고 심문하여 조사했다고 한다.
북경 성내에 수년 이래 매일 저녁 2경(更)이면 모든 닭들이 울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구왕(九王)이 죽을 때도 이와 같았는데, 지금 또 호구왕(虎口王)의 아들이 죽으니 바로 이런 감응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어떤 이가 “구왕은 오랫동안 황제의 정사를 행했으니 신하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호구왕의 아들이 비록 종실로서 왕(王)에 봉작받은 인물이라고 해도 어찌 시변(時變)에 감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중국은 상제(喪制)가 크게 무너졌다고 예전에 들었는데 지금은 오랑캐 풍속으로 다 변했으니 더욱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가장 심한 경우는 연로(沿路)에 버려진 관(棺)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자손이 있는 경우는 겨우 흙으로 발랐고, 유력자는 간혹 벽돌로 쌓았는데 한번 폭우를 겪으면 벽돌이 모두 무너져 관이 드러났다. 매장한 곳도 농토 사이의 길가에 위치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으며, 그 무덤 위에 경작하고 파종하는데 이를 보고 있자니 참담한 심정이다. 유사(儒士)라고 일컫는 자들은 연포(練布)와 연마(練麻)로 최질(衰絰)과 관(冠)과 두건을 만드는데 그 제도를 고례(古禮)에서 본떴지만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으며 그마저도 왕래하는 길에 한 명 정도 보았을 뿐이다.
청나라 사람들은 서로 부를 적에 꼭 상대방 자식의 이름을 들어서 ‘아무개 아버지〔某父〕’라고 부르니, 한결같이 우리나라 향촌의 풍속과 같다. 공좌(公座)에 있을 적에 귀관(貴官)이 관하(管下.소속 부하)를 부를 때에도 그러하다. 이를 가지고 보면, 모든 일에서 아직까지는 중화의 풍속을 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토목공사를 한창 벌여 놓아 이미 황극전(皇極殿)을 개수했고 또 동서(東西)의 행랑을 개조했으며, 또 태화문(太和門) 좌우에 협문(夾門)을 설치했다. 그 목재는 모두 남방의 목란(木蘭)을 가져다가 사용했기에 운송 비용을 이루 다 계산할 수 없다. 건청궁(乾淸宮)은 두 번이나 개수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년 전에 지진으로 인해 황극전과 후랑(後廊.뒤쪽 행랑)이 모두 기울고 기와가 쪼개졌기 때문에 개수하였다고 하였다.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해 갖옷의 경우 초피(貂皮)와 호백구(狐白裘.흰 여우 털로 만든 갖옷) 정도는 천하게 여기고, 부귀한 자들은 모두 백서피(白鼠皮)를 숭상하니 희귀하기 때문이다. 청나라 군주는 흑호피(黑狐皮)를 입는데 먼 오랑캐 지역에서 생산되고 금물(禁物)로 여겼기에 여러 신하들은 하사받은 이후에야 착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산해관 밖의 백성들은 모두 바윗돌을 운반하는 공역이 이미 수년 동안 계속되어 그 고초를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길에서 만난 바위 운송 수레는 노새 수십 마리에 멍에 매고 끄는데도 때로 수레가 부서져 운반할 수 없었다. 그 바위의 크기는 길이가 수십 척 정도였고, 넓이 역시 그와 비슷하였다.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오랑캐 풍속은 본래 화장(火葬)하여 그 남은 재를 항아리에 담아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고 제사를 받든다고 하였다. 순치제의 상(喪)에 한인(漢人)들이 만약 땅에 매장하지 않으면 지리(地利)를 얻을 수 없다고 하자, 마침내 남은 재를 옥 항아리에 담아서 계주(薊州) 땅에 묻고 이어 궁전을 지었는데 극히 크고 화려하였다. 또 숭덕제(崇德帝) 이상 제추(諸酋) 세 명의 재를 심양(瀋陽) 본혈(本穴)에 매장하고 또 궁전을 지었는데 같은 제도로 만들었기에 공사 규모가 너무 커서 완공할 날이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청인(淸人)의 군제(軍制)에는 팔고산(八固山)이라는 명칭이 있다. 형제, 아들, 조카, 종형제(從兄弟) 가운데 재주와 용맹이 있어 장수가 될 만한 자를 택하여 7개 고산(固山)을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청나라 군주가 1개 고산을 직접 거느렸는데, 이는 옛 풍속으로 고산마다 깃발 색깔이 각기 달라 깃발로 구분하였다. 팔왕(八王)과 구왕(九王)이 죽은 이후 거느리던 고산을 청나라 군주에게 귀속시켜 현재 청나라 군주가 거느리는 고산은 3개의 고산이다. 고산마다 부장(副將) 이하 여러 관리를 배치했는데, 우리나라의 중군(中軍),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과 같은 제도이다.
청나라가 연경(燕京)에 들어온 이후 고산마다 모집한 군사는 한인(漢人)ㆍ청인(淸人)ㆍ몽고인(蒙古人) 삼색(三色)으로 나누어 각기 부오(部伍.부대)를 구성하였다. 예전 1고산이 지금은 3고산이 되었기 때문에 24고산이라고 말하는데, 주장(主將)은 한 명이고 부장(副將) 이하는 세 명씩 늘렸다. 청나라 군주가 거느리는 고산은 청나라 군주를 주장으로 여기고, 청나라 군주 또한 사병(私兵)처럼 여겼다. 금년 상원(上元)에 삼 일 내내 잔치를 베풀었는데, 물어보니 청나라 군주의 기(旗) 소속 장사(將士)들이 청나라 군주에게 진연(進宴)한다고 하였다.
한인ㆍ청인ㆍ몽고인 삼색을 합하여 계산하면 연경의 병력은 10만이 넘고, 청인과 몽고인만을 계산하면 겨우 4만이라고 하는데 전해 들은 말이라 상세하지 않다. 기예에 숙달한 포수(砲手)들에게 큰 상을 주면서 권장하여 모집했는데 이미 2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로(沿路)에 배치된 갑군(甲軍)의 수는 봉황책(鳳凰柵) 1백 명, 요동(遼東) 40명, 우가장(牛家莊) 50명, 광녕(廣寧) 20명, 산해관(山海關) 50명이고, 영원위(寧遠衛)는 예전에 40명을 배치했다가 곧 철수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 영고탑(寧古塔)은 1천 명이었는데 지금 병력 수를 추가하려고 한다. 심양(瀋陽)은 1천 명, 개주위(蓋州衛)는 1백 명이다.
이 외에 보포(堡舖)와 주현(州縣)은 단지 옛날 한병(漢兵)의 정액(定額.정해진 인원)만이 있는데, 가장 많은 곳은 통주(通州) 8백 명이고, 그 나머지 계주(薊州),삼하(三河),영원위 등지에는 겨우 3백 명, 1백 명이 있는데 또한 병사로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행을 호위해 가는 갑군 10명은 북경(北京)에서부터 산해관에 이르러 교체했고, 산해관에서부터 광녕(廣寧)에 이르러 교체했으며, 광녕에서부터 우가장에 이르러 교체했고, 우가장에서부터 요동에 이르러 교체했고, 요동에서부터 봉황책에 이르러 교체했으니, 이로써 진달(眞㺚)의 종자가 이미 적음을 알 수 있다.
오랑캐 제도에서 갑군의 1년치 봉급은 은자(銀子) 24냥(兩)이고, 모집한 한인(漢人)은 감하여 12냥을 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로 잡혔다가 모집된 자는 더하여 36냥을 준다. 이는 순치제가 조선 사람을 제일 좋아한 까닭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나라를 세울 적에 규모가 없이 그저 겉으로만 대명(大明)의 법제를 모방했을 뿐이었다. 과거시험을 설행하여 선비를 선발하는데 남방 사람들이 대부분 합격해서 이들을 차례대로 주현(州縣)을 다스리는 직무에 차보(差補)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군병을 관장하는 경우에는 비록 20기(騎)가 채 되지 않는 소보(小堡)라도 모두 호인(胡人)으로 차견(差遣)하였다.
한인(漢人)이 그들을 달자(㺚子)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한인을 만자(蠻子)라고 칭하고 만주(蠻主)라고 자칭(自稱)하였다. 한인은 아무리 높은 관리가 되더라도 감히 따져 물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갑군으로 일컫는 달자가 한인을 채찍질하고, 지현(知縣)이나 지주(知州)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욕을 주니, 인심(人心)이 더욱 다시 한(漢)나라를 생각하고 오랑캐들을 마치 원수처럼 밉게 보았다.
오랑캐 종자가 매우 적어 연로(沿路)에 방어 요새를 설치하고 갑군을 주둔시켰는데 많아야 50명에 불과하고, 적은 경우는 2, 30명이거나 혹은 1기(騎)조차도 전혀 없다. 촌리(村里)에는 한족 20여 명에 오랑캐 한 명이 섞여 있는 정도이다. 또한 무오년(1618, 광해10)과 정축년(1637, 인조15)에 한인과 조선인 중 투항한 종자가 많았지만 진달(眞㺚)이 아니다.
연경(燕京)에서는 성내의 한인을 다 철수시켜 성 밖으로 내쫓고, 오랑캐 기병 4만을 주둔시켜 방비하여 변고가 발생하면, 한 번 북을 쳐서 모두 소집시킬 수 있다. 남경(南京)과 운남(雲南)에 각기 1만 명을 주둔시켜 놓고 신속하게 왕래하며 휘몰아쳐 향하는 곳마다 짓밟으니, 이 때문에 옛날 충의(忠義)한 선비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고, 곤궁한 백성으로 도적이 된 자들 또한 지역을 근거로 무리를 이루지 못하여 천하가 휩쓸리듯 굴복하였다. 형세상 큰 기근이 발생하여 천하가 동시에 무너져 분열되거나, 아니면 반드시 산해관 밖에서 사태가 일어나 그들에게 북쪽에 전념하게 한 이후에야 남방의 호걸들이 바야흐로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봉황성(鳳凰城)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연로의 점포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정(壯丁)을 군적에 등재하는 일이 한창 이어지고 있다.”라고 했는데, 영고탑(寧古塔)과 심양(瀋陽) 또한 그러하였다. 필시 병력을 증강하려는 뜻이 있는데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산해관에 들어온 뒤로 청나라 관리 한 명을 길에서 만났는데, 바로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영고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영고탑은 예전에 갑병(甲兵) 1천 명을 배치했는데, 지금 1천 명을 더하여 2천 명을 배치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영고탑은 우리나라 북도(北道) 회령부(會寧府) 북서쪽으로 거리가 5, 6백 리이다.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들으니, 북병사(北兵使) 이여발(李汝發)이 “병자년(1636, 인조14) 이전 문서를 찾아서 보니 ‘오랑캐 사신이 우리나라의 영고탑은 너희 나라의 강화(江華)와 같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영고탑이 달자의 본 소굴이기에 믿고 훗날 의귀처로 여긴 것인데, 흑룡강(黑龍江)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한다.
순치제가 죽을 적에 구왕(九王)이 종족을 시기해 죽인 일을 징계하고, 또 제위(帝位)를 찬탈하거나 핍박할 근심이 있어 제신(諸臣) 중 훈공(勳功)이 있는 네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 황제를 보필하도록 명하니, 바로 손니(孫尼),소극살합(蘇克薩哈),오배(獒背),알필륭(遏必隆)이다.
오랑캐 제도에 달자(㺚子) 종자는 지위가 경재(卿宰)에 이르더라도 이름이 고산(固山)에 분속되었다가 죄가 있어 삭직을 당하면 군오(軍伍)에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므로 친왕(親王)이 고산을 거느리는 경우에는 경재 이하가 모두 대등한 예로 대할 수 없어 마치 군졸이 주장(主將)을 섬기듯이 모셨다. 농토를 지급하여 농장을 마련해 그 수확물을 가지고 군병을 양성하였다.
구왕이 처음 연경에 들어와 전토를 나눌 적에 기름지고 좋은 땅은 자신이 차지하고, 대부분 척박한 전토는 나머지 다른 고산에게 주어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모두 불만스럽게 여기면서 균등하지 못하다는 원망이 있었다. 구왕이 죽은 후에야 손니가 구왕에게 찬탈하려는 뜻이 있어 그 행적을 숨길 수 없다고 극언하여 추후에 논죄해서 형법을 시행하여 그 기(旗. 팔기군 조직 단위) 휘하 장좌(將佐.장령과 좌리)를 다 죽였다.
손니가 또 말하기를 “구왕의 고산이 오랫동안 좋은 전토를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다른 고산의 척박한 전토와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순치제가 말하기를 “전토를 분할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척박한 땅을 받았더라도 각자 생업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다. 지금 만약 토지를 맞바꾼다면 구왕 고산의 군병들이 필시 견디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재삼 강력히 간쟁하자 순치제가 화를 내며 금법(禁法)을 만들어, 만일 다시 이를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형벌을 적용한다고 하였다.
손니 등이 어린 황제를 보필함에 이르러 오배와 합세하여 다시 전토를 맞바꾸자는 의론을 주장하자, 소극살합(蘇克薩哈)은 순치제의 말을 인용하여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오배가 미워하고 원망하여 참소하자, 소극살합이 용납되지 못할 줄을 알고 늙음을 이유로 사직하면서 돌아가 순치제의 묘소를 지키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오배가 불손하고 딴 뜻이 있다고 논죄하여 그 친척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침내 고산의 토지를 맞바꾸도록 하였다. 또 산해관 내 주현(州縣) 한민(漢民)들의 토지 10분의 7을 빼앗아 부족한 수량을 채웠으니, 유리걸식하는 한민이 지금까지 길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
손니가 병들어 죽자, 오삼계(吳三桂)가 자주 상서(上書)하여 소극살합의 원통함을 변론하고 또 제멋대로 참소한 오배의 죄를 거론하였는데, 오배가 번번이 중간에서 상서를 없애 버려 황제에게 진달되지 못했다. 오삼계가 거짓으로 천거하는 문서를 만들어 청나라 군주가 불러서 접견할 수 있도록 청하고, 이어 밀서(密書)를 품 안에 숨겨 두었다가 직접 전상(殿上)에 투서하였다. 청나라 군주가 비로소 오배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는 것을 알고 그 당여(黨與)를 다 죽였는데, 그의 공로를 생각하라는 숭덕 황후의 말 덕분에 오배만은 주벌을 당하지 않고 현재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이다. 알필륭(遏必隆) 역시 사당(私黨)에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
몽고의 여러 왕 중에 원나라 유종(遺種)이 있는데 전국새(傳國璽)를 얻어 바친 자가 있었다. 청나라 군주가 공주를 그 손자에게 시집보냈으니, 바로 순치제의 누이이다. 그 후 그 손자가 대신 즉위하여 몽고 왕이 되었다. 몽고 왕이 죽자, 그 아우 아불내(阿不乃)라는 자가 또 습봉(襲封)하였는데, 공주가 그 팔기군 휘하 아랫사람과 간통을 하자 아불내가 간통한 자를 화살로 쏴 죽였다. 청인(淸人)이 곧이어 아불내에게 공주를 주어 3남 1녀를 낳았고, 아불내를 승격시켜 친왕(親王)으로 삼았다. 순치제가 죽어도 와서 조문하지 않고, 공주가 죽어도 부음을 알리지 않았으며, 공주가 시집갈 적에 노복으로 시종한 여자를 스스로 취하여 처(妻)로 삼으면서도 알리지 않았다. 강희제가 매우 화를 내며 반역하려는 뜻이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오히려 두려워 꺼리는 마음이 있어 감히 곧장 결단하지 못하고, 아불내가 범한 일을 거론하여 여러 몽고 왕들에게 그 죄를 논하게 하였는데 여러 왕들이 모두 죄를 줘야 한다고 말하였다.
지난해 6월 무렵에 속이는 말로 불러와 심양(瀋陽)에 가두고, 여자 한 명과 몇 명의 계집종을 감옥에 함께 있게 하면서 몽고인이 왕래하면서 물자를 공급하도록 허락할 뿐이었다. 아불내의 사람됨이 억세고 꼿꼿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날마다 직접 비파(琵琶)를 연주하면서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는, “내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두질(痘疾)에 걸렸다가 겨우 나았는데, 같이 있던 여자는 두질로 인하여 죽었다.
청인이 공주 소생 아들을 대신 몽고 왕으로 세웠다. 그 아들이 대신 왕위에 오른 후 심양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 보기를 요청했는데 청인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백여 명의 군사로 지킬 수 있도록 청했는데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자, 크게 화를 내고 손가락을 깨물며 “우리 병사가 수십만 명이고, 오삼계(吳三桂)와 남경(南京)에 파병된 군사 또한 만 명이 넘는다. 비록 조선의 소포(小砲)를 믿고 있지만, 만약 일진(一陣)의 병사로 먼저 그 길목을 차단한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돌아갔다.
산해관 밖이 소란스러워 ‘몽고 병사들이 조만간 올 것이다.’라고 여겼는데, 가을이 지나도록 몽고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진정되었다. 심양의 수장(守將)들이 더욱 걱정하고 두려워 앞장서서 상주문을 올려 아불내의 석방을 조정에 요청하였는데, 그 마음을 완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심양의 갑군(甲軍)들이 모두 말하기를 “말에게 여물을 잘 먹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금년 2월에 동원될 것 같다.”라고 하는데 병력이 사용될 곳은 몰랐다. 북방에 있는 몽고족이 40여 종족인데, 아불내가 가장 호걸스러워 여러 부락을 잘 통솔하였기 때문에 청인(淸人)이 매우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서북쪽에 있는 오랑캐 종족을 몽고(蒙古)라고 혼칭(混稱)하는데 그 종자가 매우 많고 그 명칭도 각기 달라 청인도 두루 알아 낱낱이 거론하지 못할 정도이다. 대개 북방에 있는 오랑캐가 40여 부락인데 청인에게 복종한 부락은 20여 부락이다. 아역(牙譯)들은 “지난해 입조(入朝)한 몽고 부락 수가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라고 일부러 과장하였는데, 우리나라 역관이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다만 서쪽에 있는 몽고 종자들도 입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자, 묵묵히 한참 동안 있다가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청인이 서강(西羌)을 매우 꺼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겨울에 공창부(鞏昌府) 서령위(西寧衛) 경계에 있는 서강이 사신을 보내 입공(入貢)하기를 청하였으나, 오삼계가 비밀리 상소하여 사신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자, 청나라 군주가 그 의견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보내 금과 비단을 후하게 보내니 그 수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입공한 몽고 역시 금년부터 금과 비단을 많이 주었다. 북방 맨 끝에 있는 나선(羅禪)과 와라사(窩羅思) 두 나라 역시 입공하니, 모두 금과 비단을 이익으로 여겼다. 안남(安南),유구(琉球),하란〔荷蘭;네덜란드〕 등과 같은 나라는 통화(通貨.무역)를 위해 입공하였다.
와라사는 몇 해 전에 영고탑 관할의 왈가부(曰可部)라는 곳에서 분쟁을 일으켰다. 나선은 와라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이가 전하기를, 북경에서 영고탑으로 선장(船匠.배 만드는 목수)을 많이 보내 현재 선박을 건조하는데 어디에 사용할지는 아직 모른다고 하였다.
정경(鄭經)이 남해(南海) 가운데 있으면서 70여 섬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 한 섬은 길이가 수백 리이고 넓이가 70리이다. 때때로 바다에서 나와 약탈하자 청나라 조정에서 이른바 상왕(相王)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복건(福建)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했고, 또 남방 백성들이 서로 연합할까 의심하여 바닷가 3백 리를 따라 민가(民家)를 철거하고 갈대를 자라게 해서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 단지 정탐하는 관리만 두고, 또한 군병을 거느리지 않았는데 변란이 발생하여 봉홧불을 올리면 총병(總兵)이 즉시 현장으로 진격하여 싸운다.
남해에서 북해까지 모두 어채(漁採)를 금하니 어업으로 얻는 이익이 영영 끊어져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조각배와 거룻배가 이미 다 파손되고, 조운선만 남아 있는데 올여름부터 또한 조운선을 폐지한다고 한다. 조운선의 폐지는 사실 여부를 확실히 모르겠지만, 통주(通州) 강가에는 예전에 선박들이 화살촉처럼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 행차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7, 8척의 작은 배뿐이다.
산해관을 지날 때 망해루(望海樓)에 올라 보니 물가에 어선 한 척도 보이지 않아 그 까닭을 물어보니 금법이 있어 감히 어기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청인(淸人)이 병부상서(兵部尙書) 명주(明珠) 및 시랑(侍郞) 두 명을 보내 정경(鄭經)에게 투항을 권했는데, 정경이 말하기를 “만일 성(省) 하나를 할양해서 왕으로 봉하고, 또 조선처럼 변발(辮髮)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의당 투항하겠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병부 상서 명주와 절민 총독(浙閩摠督) 유사기(劉士麒)를 보내 정경에게 섬에서 나와 육지로 올라와 살도록 권유했지만, 정경이 권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연경의 시장에는 금단(錦段), 백사(白絲) 및 육계(肉桂), 정향(丁香) 등 약재 종류가 매우 드문데, 남방의 교통이 꽉 막힌 이유 때문인 듯하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런 물건들은 모두 남방에서 조운선으로 실어 왔는데 지난여름 처음으로 선박 운행 금지가 있어 육로를 통해 수레로 운송하기 때문에 희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북경의 온갖 물자가 모두 부족하여 백성들의 빈곤이 극에 달하였다.
매년 사행할 적마다 태복시(太僕寺.사복시)에서 역관에게 달마(㺚馬)를 구매하게 하였는데 그 값이 평소 가격에 비해 몇 배에 달하여 오랑캐 역관들이 이익으로 여겨 미리 사 놓고 우리 사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근래 말 종자가 매우 작아 크고 좋은 말이 전혀 없는데, 그들이 이익을 챙기려고 사방에서 말을 사들이지만 그런 말은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연로(沿路)에 목축하는 말이 천 마리 정도뿐만이 아니지만 모두 소나 나귀와 뒤섞여 있고, 갈기를 휘날리는 기운찬 말을 본 적이 없다. 북경에 들어가 물어보니, 아역(牙譯)이 “말 종자만 작을 뿐이 아니라 사람 종자도 작은데 무슨 까닭인지 모릅니다.”라고 답하였다. 원일(元日)에 의장마(儀仗馬) 역시 작았는데 우리나라 의장마보다 못하였다.
연로의 성(城)과 해자, 관사와 집들이 허물어지고 무너진 상태로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하나도 수리하지 않았다. 마을이 황량하고 폐허가 절반가량으로 병란을 겪었던 모습 그대로이다. 그 광경을 보면 경도(京都)나 주현(州縣)이나 임시로 머무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잘 수리하여 튼튼하게 할 의도는 없는 것 같다. 비록 백성을 다스리고 부세(賦稅)를 징수하는 정사가 있더라도 또한 조리(條理)있게 통합하는 형세가 없고, 단지 힘으로만 위엄을 보여 눈앞에 복종만을 취할 뿐이다.
경유하는 연로(沿路)에는 조그마한 현(縣)의 작은 점포라도 시가(市街) 안에 모두 어깨가 스치고 바퀴가 부딪치는 번성함이 있다. 하지만 전야(田野)를 보면, 땅은 광활하고 사람은 드물어 황량한데도 개간하지 않으니, 인민(人民)의 번성이 우리나라만 못하다.
봉황성부터 산해관까지 천여 리 사이가 텅 비어 방어지가 없고, 이른바 갑군(甲軍)은 영고탑(寧古塔)과 심양(瀋陽)에 배치된 수를 통틀어 계산해도 3천 명이 되지 않는다. 기타 보포(堡舖)와 주현(州縣)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인(漢人) 농부와 상인이다.
만약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산해관 외곽으로 진격한다면 화살촉 하나, 탄환 하나도 허비하지 않고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요동과 광녕을 이미 차지한다면, 산해관 내에서 모두 풍문을 듣고 앞다투어 오랑캐 장수와 관리를 붙잡아올 것이다.
곳곳의 점포마다 관방(官榜)이 있는데 모두 도적을 체포하는 일이다. 물어보니, 산해관 내에서 한인의 민전(民田)을 빼앗아 청나라 장사(將士)들에게 지급한 이후에 곤궁한 도적들이 날로 불어나 겁탈과 약탈이 계속 이어져 여행자는 동반자가 없으면 새벽에 나가거나 밤에 다닐 수 없다고 한다. 연경 이북은 오랑캐와 한인이 뒤섞여 거처하는데 대부분 공사(公私) 농장에서 일하여 모두 세금과 부역을 면제했기 때문에 이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남방은 병란 이후에 가렴주구가 심히 모질어 궁핍한 백성들이 많이들 서로 모여 도적이 되어 간혹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다니기도 하는데, 백주대낮에 부유한 집을 약탈하다가 주현(州縣)에서 기찰하여 체포하려고 하면 놀라 흩어져 종적이 없다고 한다.
산해관 밖 민역(民役)은 전토 1무(畝)마다 은(銀) 3푼(分)을 납세하는데, 우리나라 전토와 비교하면 1무가 30여 부(負)에 해당하니 그 세금이 매우 가볍다. 남방의 세역(稅役)은 하나같이 명나라 제도와 같아 바뀐 것이 없다고 한다.
산해관 밖 보포(堡舖)는 비축한 식량이 매우 적다. 그 까닭을 탐문하니, 민전(民田)은 은(銀)을 납부하고 다시 세미(稅米)를 내는 법이 없으며, 다만 황장(皇莊.황실 소유 농장)의 수확물만 취해 비축하기 때문에 이와 같다고 한다.
오랑캐의 의복 제도는 본래 소매를 좁게 만드는데, 소매 입구를 말굽 모양으로 만들어 손등을 덮는다. 역관에게 물어보니, 옛날에 붉은 머리 말굽 모양 소매가 40년 천자(天子) 노릇 한다는 참위설(讖緯說)이 있었는데, 오랑캐 역관〔胡譯〕 정명수(鄭命壽) 등도 일찍이 앞장서서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이런 참위설이 있었으니, 우리들이 당연히 40년을 누릴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기도(箕都.평양) 민간 풍속에 수숫대 줄기를 사용하여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데, 병인년(1626, 인조4) 겨울 수숫대 줄기 가운데 붉은 글씨 ‘동왕춘(董王春)’ 세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정묘년(1627, 인조5) 봄에 호란(胡亂)이 발생하여 그 징험이라고 여겼지만, 그 글 뜻을 알지 못했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촌 아낙네가 수숫대 줄기를 벗겨 보니 또 붉은 글씨 ‘고월망어어양(古月亡於魚羊)’ 여섯 글자가 있어서 감사(監司)가 이를 조정해 올려 조정의 재신(宰臣)들 모두 이를 보았고,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浹) 역시 직접 보았다고 한다. 지금 30년이 지나도록 징험이 없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요동에서 산해관까지 연로(沿路)에 5리마다 연대(煙臺) 하나씩 설치했는데, 조금이라도 조망할 만한 산언덕에는 모두 연대를 설치하였다. 매 30리, 20리마다 성(城) 하나씩 설치했거나 혹은 4, 50리마다 성 하나씩을 설치하였다. 그 지세에 따라 거리의 원근(遠近)을 삼았는데, 당시 천하의 물력(物力)을 여기에 다 쏟았다.
유적(流賊.李自成)이 연경(燕京) 근처를 핍박할 적에 오삼계(吳三桂)가 40만 군병을 거느리고 영원위(寧遠衛)에 있었는데 감히 돌아오도록 부르지 못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그제야 근왕(勤王)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오삼계가 지체하면서 진군하지 않아 마침내 천고(千古)에 없던 변고를 초래하였다. 명나라 태종이 연도(燕都.연경)로 도읍을 정하여 오랑캐와 인접했다가 후손에게 화(禍)를 끼쳐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신령스런 황제의 계책이 뜻한 바를 알지 못하겠다.
오삼계는 영원위 소속 중우소(中右所) 사람이다. 그 조부의 분묘가 길가에 있는데 갈표(碣表)가 없어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자, 그 죄를 스스로 알아서 훗날 화가 있을까 두려워 감히 빗돌을 세우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악행을 하는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청나라가 이성(異姓)을 봉하여 친왕(親王)으로 삼은 자는 오삼계 한 사람뿐이다. 촉(蜀)에서 운남(雲南)으로 옮겨 봉하여 남방 변경을 방어하게 하고, 촉 땅 및 영원위 등지를 그대로 관할하게 했기 때문에 소속 농장 백성들이 산해관 밖에 가득했다고 한다.
의주(義州)에서 연산(連山) 옛길을 통해 요동(遼東)으로 나와 영원위에 도착하면 14일 여정이고, 의주에서 해변을 통해 곧장 개주위(蓋州衛)로 달려가 영원위에 도착하면 9일 여정이라고 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