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황궁의 일과는
조아로 시작되었다.
조아는
문무백관이
황제가 정무를 보는
궁전 앞의 넓은 뜰에 늘어서 있다가
황제가 납시면 아침인사를 올리는 조회 행사다.
그런데 그 시각이
새벽 5시 15 분쯤 이었으니
부지런하지 않으면 고위관리를
시켜줘도 어려웠을 듯하다.
때는 서기 626년 8월 초,
이세민이 황태자가 된지 2달이 된 때였다.
조아를 마치고 물러가려는 그를
고조 이연이 수라를 같이 하자며 잡았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둘이 어린 시절의 문답교육 같은 대화를 나눈다.
황제가 물었다.
“남의 위에 서려면
어떤 참모가 중요한지, 셋만 대봐라.”
황태자가 답한다.
“첫째는 스승처럼 모실 참모이고,
둘째는 직언하는 참모이며,
셋째는 고문으로 모시는
조언자들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황제가 미소를 띄며
계속 묻고, 태자가 답한다.
“태자의 스승 같은
참모는 누구냐?”
“방현령, 두여회, 장손무기
같은 사람들이겠지요.”
“직언으로 보필해 줄
참모는 누구냐?”
“위징이나 왕규 등이
해당되겠지요.”
한참 후
침묵을 깨고
황제가 다시 묻는다.
“지금 조정에 짐이 스승이라고 여길 만한,
또 짐에게 목숨 걸고 직언하는
대신들이 몇이나 있다고 보느냐?”
“누구라고
꼽을 수가 없나이다.”
“그렇다.
꼽을 만한 사람이 없느니라.”
그리고 잠시 후,
황제는 태자에게 부드럽게 말한다.
“세민아,
이제 짐은 물러앉아 너의 성취를 고대하마.”
중국 역사 상
청의 강희제와 함께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당 태종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양위하는 이연의 나이 60,
즉위할 이세민의 나이 28이었다.
고조 이연의 옆에는
이세민과 달리
스승이나 직언자,
고문 같은 진짜 인물이 없었다.
황제인들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연은 물러갈 때를 안 것이었다.
결정장애라 할 만큼 우유부단하고 평범했지만,
그 점에서 수 양제와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세민이 둘째아들임에도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적 공이 다른 형제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연의 성공은
7할이 아들의 덕이었다.
관중에서
이연이 물러나려 하자
설득해 장안을 차지한 것부터,
반란 진압, 하나라 왕 생포, 낙양 점령 등 큰 승리는 이세민의 몫이었다.
기개가 뛰어나고,
투르크 식 기마술에
독창적 전술을 가미한 용병과
전세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탁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둘째가
왕이 되는 것이 쉬웠겠는가?
황태자인 큰 아들 건성은
평범하다 못해 용렬했고
막내 원길은 난폭하고 무식했다.
건성은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생각하는 것이 이세민을 모략하고
원길과 공모해 자객과 독으로 죽이려 했다.
이를 풀 수 있는 고조는
우유부단해 엉거주춤한 채
오히려 이세민을 나무라며
의심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고조가
이세민에게 양위를 말하기 두 달 전에,
세 형제는 새벽에 조아에 참석하려고
현무문으로 들어오다가
피를 보게 된다.
이세민이 두 형제를 죽인 것이다.
이른바 ‘현무문의 변’이었다.
이어서 측근의 권유대로
형제들의 아들 10명을 모두 죽인다.
그때 고조는
궁궐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다음 해였다.
새해 연회가 열렸다.
음악이 흐르는데,
예년처럼 장엄한 연주곡이 아니라
태종의 전투광경을 표현한 무곡으로
나중에 칠덕무라 불린 곡이었다.
칠덕무란 춘추좌씨전에서
무력의 일곱 가지 덕을 설명하고 있는 데,
이를 따와 무력 무가 아닌
춤 무자를 써서
칠덕무라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춘추좌씨전에서 말하는
무의 일곱 가지 덕이 무엇일까?
1.난폭한 짓을 금하고,
2.군사를 징발치 않고,
3.대의를 지키며,
4.공로를 밝히고,
5.백성을 편케 하고,
6.무리를 화합하고,
7.재물을 넉넉히 한다
말하자면,
무가 단순 폭력이 아니라,
평화번영의 수단이라는 뜻이다.
요즘도 새겨들을 좋은 말이다.
아무튼 이날 태종이
과거 싸움터의 일을 잊을 수 없다며
용맹한 무곡을 택한 배경을 설명하자,
한 신하가
“폐하의 무공에 비한다면
모든 문의 힘이 빛을 잃습니다.”
고 말한다.
그러자 태종이 답한다.
“난세를 다스리는 데는 무로써 하고,
실현된 것을 지키는 데는 문으로써 한다.
둘은 그 역할이 다를 뿐이다.”
태종은 단순 무인이 아니었다.
즉위 후 문학관을 열고 방현령, 두여회 같은
당대의 문사들을 18학사로 임명하는 등
문무 겸비한 제왕이었다.
이것이 바로
태종의 정신이었고,
당의 국정지표였던 것이다.
인상적인 몇 장면을 뽑아 정리해 봅니다.
#1. 평판왕이 끝판왕
이연이 수 조정을 공격할 때
그의 군대는 전투 때 군량미가 바닥나도,
들판에 무르익은 오곡을 약탈하지 않고
값을 주고 가져갔고,
군사들에게는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지 말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라고 방을 붙였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보기 드문 배려와 세심함으로,
다른 군대와 차별화한 것이었다.
또, 장안에 입성하면서 군사들에게
“우리는 장안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장안을 지키러 왔다.”
고 말한다.
결국, 이런 정성 덕분에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 처음 3만이던 군사가
4달 후 20만으로 불어나 장안에 입성한다.
실체가 뒷받침 된 평판이라면,
평판왕이 곧 끝판왕이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 것이다.
#2 청규(淸規)와 누규
세상 규칙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자말로 청규라 해서,
효도, 정직 같은 도덕적 규칙이다.
두 번째는 누규라 하는데,
뒷골목 규칙 같은 것으로, 싸움판이나
도둑질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물을 털어도 먹고 살만한 집 이상을 턴다.’
는 것은 임꺽정 같은 의적의 누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누규를 중시해
‘누규가 무너지면 반란이 일어나고,
혁명이 뒤따른다.’
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나름 새겨들을 부분이다.
우리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3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세민이 낙양을 공격하자,
성을 지키던 왕세충이
부하들과 전략을 짜고 있었다.
그때 말직에 있던 공근이 계책을 아뢴다.
그러자 부하장군이 나서
“말직이 당돌하다.”
고 깔아뭉갠다.
그가 실망해
얼마 후 이세민에게 갔다.
이세민은
직급은 낮으나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아채고 환대한다.
훗날 뛰어난 전략으로 큰 힘이 되게 된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다.
한편, 강남으로 간 수 양제는
총신 우문술이 죽자
그 아들 우문화급을 근위대장으로 앉힌다.
그러나
단순한 우문화급은
원래 살던 장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동생과 짜고 근위군을 동원해
양제의 가족과 대신들을
죽여 버린다.
더 한심한 것은
일을 저지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시로 동생과 둘이 술 마시며
번갈아 우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최후발악처럼
양제를 독살하고 황제를 칭하다가
며칠 후 도적떼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런 사람을 근위대장으로 임명했으니,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다.
#4 현모양처의 표본 장손황후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악처였지만,
위대한 정치가 곁에는
대체로 훌륭한 부인이 많았다.
장손황후가 그랬다.
선비족 귀족 출신인데,
언행이 황후가 되기 전․후가 한결 같았다.
또, 학문을 좋아해
머리 손질을 하는 동안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종이
정치적인 의견을 물으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라며 말하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는 엄격하고 검소했다.
하루는
태자의 유모가
태자의 생활용품이 보잘 것 없다고 하자,
유모에게 타이른다.
“태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격과 덕, 명망이다.
지금 백성들도 굶주리고 어려운 데
장식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랫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에게는 훈훈하였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아내는
황후를 빼고
비, 빈 등 111명이었는데,
이들부터 말단 궁인까지
병이 나면 직접 위문 가서 위로한다.
또 궁인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으면
그 자리서는 보조를 맞춰 나무라지만
나중에 변호해 구해 주곤 하였다.
아무리 황후의 성품이
인정 많고 슬기롭더라도,
남편에 대한 믿음과 확고한 주관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외유내강의 표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신분상승에 올인하는 무사확
태종이 즉위해 과거 전투에서
물자수송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무사확을
지금의 국토교통부장관에 해당하는
공부상서에 임명하였다.
꿈에 그리던
고급관리가 된 무사확은
집에 돌아와
조강지처 상리씨 부인에게 말한다.
“그동안 수고 많았소.
평생 써도 남을 보화를 줄 테니,
낙양이나 멀리 강남으로 가서 살면 어때?”
상리씨 부인이 놀라자,
무사확이 말한다.
“이제 왕족 핏줄을 가진
여자를 얻어야 빛을 본다고.”
무사확은
서둘러 수 황실 집안의
양씨 부인을 새로 맞는 데,
얼마나 빨리 재혼을 해치웠는지
아들들도 미처 모를 정도였다.
이 양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 무조,
훗날 측천무후다.
운명은 무후의 등장을
그렇게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소씨 부인의 유서
이세민이
새 황태자로 책봉된 후
궁성 문 앞에 민성함을 설치하였다.
첫날부터 함이 가득가득 채워졌는데,
그 가운데 고조의 친구이자
공신인 팽 장군의 부인 소씨의 유서가 있었다.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얻은 젊은 부인이었는데,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더렵혀진 몸으로 어찌 세상을 보겠습니까?
허나 장차 저 같은 여인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되기에 저의 치욕을 밝힘니다. ...
동궁이 황제가 되면
유서가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테니 태워버리고,
새 황태자가 나타나면
공개해 후세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사건은
고조 때로 거슬러간다.
소씨 부인이 먼 투르크 국경으로
떠나는 남편을 전송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저택으로 숨어든
괴한들의 미혼향에 취해
정신을 잃고 어디론가 옮겨진다.
거기엔 부인의 미모를 탐내던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잠에 빠져든
소씨를 상대로 욕심을 채우고
다시 집으로 옮기도록 한다.
이러기를 몇 번,
이상을 느낀 소씨가
집에서 액풀이를 하는데,
황태자가 나타나 대놓고 겁탈한다.
결국 부인이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니,
문명은 진보했지만 남녀 삶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 당 태종의 인재관리
“다나까 일본 전 수상이
20대에는 삼국지를 읽고,
30대에는 정관정요를 읽어라.”
고 하였다고 한다.
공교롭게 나도 30대에 정관정요를 읽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정관정요는
군살 없이 근육과 뼈가 튼실한
스포츠맨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삼국지에 비해 그렇다.
조직 경영과 리더십의 정수가 녹아있다.
당 태종은
인재를 등용할 때
과거 내편,
네 편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적재적소였고,
또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말이다.
“사람이 자기의 얼굴을 보려면
거울에 비춰봐야 하듯이,
군주 자신의 허물을 알려면
충신의 간언을 경청해야 한다.”
“군주 자신이 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신하는 군주의 과실에 대해
간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성인’이라는 낱말을
‘다 알고 있다’거나
‘무결점의 사람’으로 바꿔보면
오늘날 리더십에서
참고할 황금룰이 될 듯하다.
#2 리더십의 정수 - 명군(明君)과 암군(暗君)
어느 날 태종이 위징에게
“천자는 어떻게 하면 명군(明君)이 되고,
암군(暗君)이 되는가?”
라고 물었다.
위징이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겸하여 들으면 밝고(明),
편파적으로 들으면 어둡다(暗)고 하였습니다.”
한자 밝을 명(明)은 해와 달이 함께 있다.
그러니
명군이 되려면,
낮에 들리는 소리나 밤에 들리는 소리,
듣기 좋은 말이나 듣기 싫은 말,
같은 편이나 반대편의 얘기를
가리지 않고 두루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자 어두울 암(暗)은
해의 소리만 있으니,
한쪽 말만 편파적으로 듣는 것이다.
그러면 암군이 된다.
위징의 이 말이야말로
소통의 기본이요,
리더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