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彈琴臺記
忠의 州됨이 震域의 中에 當하여 喬嶽이 南에 環擁하고 漢水와 達川이 東과 西로서 來會하여 山明野沃川媚石秀하며 水運이 一方으로 嶺을 間하여 洛에 連絡하고 一方으로 京城을 거쳐 海에 達하니 진실로 南北의 咽喉요 交通의 要衝으로서 古로부터 國原 또는 中原을 稱해옴이 徒爾함 아니다
바야흐로 高句麗와 新羅가 覇를 爭하매 麻峴竹領을 必佔線으로 하여 血戰을 重疊하고 및 新羅ㅣ 意를 得하매 此地로서 小京을 삼아 貴戚子弟와 六部豪民을 徙하여 이를 實하니 爾來 一千年에 한갈(한결)같이 京과 道와 牧과 營으로서 國中에 重視되고 拳石撮土가 史料(원문은 史紏인데 중국 명나라때 주명호가 지은 역사비평서라고 한다. 문맥상 史料가 맞다고 여겨 史料로 고침)中에 一物 아닐이 없다
大門山의 一麓이 兩水의 交會點에서 劈開陡截하여 千仞仰高의 壁이 一道奔流의 滄江을 抱하고 周遭遠近의 風物을 管領하는 者를 彈琴臺라 이르니 일즉 樂聖于勒이 一代獨得의 妙調와 千古系傳의 秘音을 淸風流水에 彈奏하여 絃中의 雨와 指下의 波로써 天을 格하며 神을 動하던 地라
그러나 二調五曲은 前塵이 己漠하거니와 後의 斯臺에 臨하는 人으로 하여금 愈久愈新의 感慨를 禁치 못하게 하는 者ㅣ 別로 存함이 있다
宣朝龍蛇의 倭亂에 國에 備ㅣ 없고 海에 患이 닥쳐 旬望의 間에 嶺以南이 다 敵의 蹂躪에 맡겨지고 朝廷이 蒼黃하여 宿將申砬을 起하여 巡邊使로 삼아 保障捍衛의 責을 委畀하였으니
頹勢의 下에 天塹이 또한 用되지 못하고 敵의 大衆이 分路해 嶺을 넘어 一時에 殺到하니 거의 天이요 人力의 抵住할 바가 아니었다
砬이 본대 歷戰常勝의 名將이요 幕佐에 金汝岉이가 있었으되 事ㅣ 此에 至하여는 計를 韜鈐의 常套에 求할수 없음을 알고 決然히 退路를 斷하고 舟釜를 沈破하고 一戰必死의 背水陣을 琴浦灘頭에 布하니 意ㅣ 瓦全에 없고 志ㅣ 玉碎에 專함이라
雷擊電掣의 끝에 握拳透爪한 一軍將卒이 渾然히 殉國成仁의 一團으로 化하고 砬은 英雄末死의 心과 天地不磨의 恨을 長江白波에 投寄하니 어찌 그리 壯快하며 凜烈하며 正大光明하기 赤日朗月과 같으뇨
天은 비록 井陘의 奇勝을 慳하였으나 人은 넉넉히 睢陽의 高躅을 繼承코 餘ㅣ 있어 猾賊의 心膽을 寒栗케 하였음이 毋論이며 또 그 突騎銳鋒을 遮住하여 漢都의 急을 小緩한 功도 可沒치 못할 것이다
대저 七年風塵大小百戰에 義氣英風으로 千古에 輝躍할 者는 특히 錦山晋州와 함께 琴浦를 擧할 거이요 三者의 中에서도 初頭垂範의 壯擧로서 琴浦를 推하여 最를 삼지 아니치 못할 것이어늘 世에 혹 浮議를 聞함은 다만 英雄의 眞面目을 成敗以外에 求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臺上으로부터 眸를 放하여 憑躅할진대 一丘一壑 다 毓靈의 勝地요 一隈一塢가 무비 會心의 名區라 華國의 文章은 强首가 卓爾하고 入神의 筆法은 金生이 爛焉하며 金允侯의 敵愾는 山城이 壘壘하고 崔弘嗣의 行儉은 道岸이 冷冷하며 淡烟綠蕪에 蘂城의 故宅이 依俙하고 荳棚菁花에 陽村의 遺塌이 隱約하며 羽衣는 泡臺仙洞에 飄拂하고 梵幡은 鏡碑獅塔에 翩飜하며 漕運의 舊站은 浦曲에 歷歷하고 島夷의 貢路는 棘榛이 荒翳하니 志士興感의 境과 騷人 咏嘆의 情이 一臺를 環하고 서로 映發하여 거의 應接에 暇치 못할 것이 있다
하물며 西風落日에 丹月을 遙指하면서 三尺龍泉萬券書皇天生我意何如를 郎然一吟할 때에 意氣男兒의 壯懷가 鬱拂하고 腔血이 沸騰하여 劃然한 長嘯로 天地를 裂破치 않고 말지 아니케하는 豪興은 진실로 浮雲遠岫麥瀧稻畦와 鳥飛魚躍春花秋月의 尋常한 勝槩에서 擬像相得할바가 아님이랴
忠은 旣開敷한 一面과 함께 未發榮한 一面을 有하니 往日의 開敷를 갈수록 發榮케 하는 곳에 無窮한 光譽가 忠의 來日에 約束되여 있는 것이다
忠의 士ㅣ 능히 自奮自勵하여써 地靈을 發揚하고써 史績을 增上하기에 精進코 退惰함 없을진대 忠의 誇矜이 昔日의 國原小京에 있을 것 아니라 도리여 當來世界에 對한 人物의 淵藪와 文化의 源泉됨에 있을 것이요 그러할진대 이 臺에 來遊하는 人의 忠에 向한 嘆美欽頌이 더욱 可量치 못할 것이다.
月岳이 娥娥하며 漢水가 洋洋하며 萬古淸風이 長吹코 斷치 아니하리니 忠의 地ㅣ 어찌 江左의 一奧區로 말며 彈琴의 臺ㅣ 어찌 閒人의 一笻屐地됨에 그치랴 一片貞珉이 이를 他日에 驗할 것이다
檀君紀元 四千二百八十七年 四月 日 忠淸北道
<번역>
충주의 고을됨은 우리나라(震域, 동방의 단군의 땅이란 뜻)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산들이 남쪽에서 둘러싸고 있으며, 한강과 달천이 동서에서 흘러와 만나니 산은 밝고 들은 기름지며, 강은 아름답고 바위는 빼어나다. 또한 수운(水運)은 한쪽으로는 고개를 넘어 낙동강 유역과 이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울을 거쳐 바다에 닿는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남북 교통의 요충지요 나라의 중심지로서 국원(國原) 또는 중원(中原)이라 불린 것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고구려와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시절에는 마현(麻峴, 鷄立嶺)과 죽령(竹嶺)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승리를 거두자 이곳에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귀족 자제들과 육부의 유력 민호를 옮겨와 살게 하였다. 그 후 천 년 동안 충주는 수도를 보좌하는 중요한 행정 중심지로 중시되었으며, 이 땅의 돌 하나 흙 한 줌까지도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대문산의 한 줄기가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절벽을 이루며 솟아오른 곳이 바로 탄금대이다. 천 길 절벽이 큰 강을 끌어안고 있어 사방의 경관을 굽어보는 명승지이다. 옛날 악성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타며 절묘한 가락과 비전의 음악을 연주하여 하늘과 신명까지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륵의 음악은 이제 먼 옛일이 되었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깊은 감회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임진왜란 때 조정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고 왜군은 바다를 건너와 불과 며칠 만에 영남 지방을 유린하였다. 이에 조정은 명장 신립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국토 방어를 맡겼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형세에서 천혜의 요새도 소용이 없었다. 왜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고개를 넘어 한꺼번에 밀려들었으니 사람의 힘으로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립은 원래 백전백승의 명장이었고, 참모로는 김여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전술로는 이 위기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퇴로를 끊고 배와 솥을 깨뜨린 뒤, 죽음을 각오한 배수진을 탄금대 앞 강변에 펼쳤다. 살아남을 생각은 없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울 뜻만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군사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의의 집단이 되었고, 신립은 끝내 남한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그 장렬함과 의로움은 해와 달처럼 밝고 빛나는 것이었다.
비록 하늘은 신립에게 한신의 정형(井陘, 楚漢戰爭시 漢나라 장군 韓信이 背水陣으로 승리를 거둔 곳이다. 井陘之戰이라 한다.) 대승과 같은 승리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의 충절은 충분히 후세에 남을 만하였다. 또한 왜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서울이 함락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춘 공도 결코 묻혀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수많은 전투 가운데 충의와 절개로 길이 빛나는 곳으로는 금산, 진주와 함께 탄금대를 꼽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충절의 본보기를 보인 곳은 바로 탄금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패배만을 보고 신립을 비판하는 것은 영웅의 참모습을 성패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시 탄금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산과 골짜기마다 명승지가 아닌 곳이 없다. 강수(强首)의 문장, 김생(金生)의 서예, 김윤후의 호국 정신, 최홍사의 청렴한 행적 등 충주의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 또한 예성(蘂城)의 옛 자취와 양촌 권근의 유허, 사찰과 탑, 옛 조운(漕運)의 흔적 등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어우러져 보는 이의 감흥을 끝없이 자아낸다.
더욱이 서풍이 불고 해가 질 무렵, 단월(丹月)을 바라보며 자신의 포부를 읊조릴 때면 뜻 있는 사내의 기상이 솟구치고 뜨거운 피가 끓어오른다. 이런 감흥은 평범한 산수 경치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충주는 이미 찬란한 역사와 함께 아직 피어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옛 영광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면 충주의 미래에는 무궁한 명예가 약속되어 있다.
충주의 선비들이 스스로 힘써 노력하여 이 땅의 영기를 드러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면, 충주의 자랑은 과거의 국원소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계의 인재 양성과 문화 창조의 중심지가 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탄금대를 찾는 사람들이 충주를 더욱 찬양하게 될 것이다.
월악산은 우뚝 솟아 있고 한강은 도도히 흐른다. 만고의 맑은 바람도 끊임없이 불 것이다. 충주가 어찌 단순한 지방의 명승지에 그치겠으며, 탄금대가 어찌 한가한 유람객만 찾는 곳으로 끝나겠는가. 이 비석은 훗날 그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
[탄금대기 (彈琴臺記)
충주(忠州)는 우리나라(震域)의 중심에 위치하여, 높은 산(喬嶽)이 남쪽으로 둘러싸고 한강(漢水)과 달천(達川)이 동쪽과 서쪽에서 흘러와 만난다. 산은 밝고 들판은 비옥하며 강은 아름답고 돌은 빼어나다. 수로 교통은 한편으로는 조령(새재)을 사이에 두고 낙동강과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양(京城)을 거쳐 바다에 이르니, 진실로 남북의 중요한 곳(咽喉)이자 교통의 요충지이다. 예로부터 이곳을 국원(國原) 또는 중원(中原)이라 불러온 것이 어찌 헛된 일이겠는가.
바야흐로 고구려와 신라가 패권을 다툴 때 마목현(麻峴)과 죽령(竹領)을 반드시 차지해야 할 방어선으로 삼아 혈전을 거듭하였다. 신라가 뜻을 이룬 뒤에는 이곳을 소경(小京, 국원소경)으로 삼고 왕실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부유한 백성들을 이주시켜 이곳을 채웠다. 그 이래로 천 년 동안 한결같이 서울(京)과 도(道), 목(牧)과 감영(營)으로서 나라 안에서 중히 여겨졌으니, 한 움큼의 돌과 흙조차도 역사적 자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다.
대문산(大門山)의 한 줄기가 두 줄기 강물이 만나는 곳에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니, 천 길 높은 벽이 한 줄기 세차게 흐르는 푸른 강물을 안고 있다. 주위 멀고 가까운 풍경을 한눈에 거느리는 이곳을 '탄금대(彈琴臺)'라 부른다. 일찍이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한 시대에 홀로 깨달은 오묘한 가락과 천고에 이어져 내려온 비장의 소리를 맑은 바람과 흐르는 물에 얹어 연주하니, 거문고 줄에서 비가 내리고 손가락 아래에서 파도가 이는 듯하여 하늘을 감동시키고 신령을 움직였던 땅이다.
그러나 우륵의 두 가락과 다섯 곡(二調五曲)은 지난 과거의 자취가 되어 이미 아득해졌으나, 훗날 이 대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운 감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장엄한 역사가 따로 남아 있다.
조선 선조 임금 때 일어난 임진왜란(龍蛇의 倭亂)에 나라에는 대비가 없고 바다에는 외환이 닥쳐, 보름(旬望) 사이에 영남 지방이 모두 적의 유린에 맡겨졌다. 조정이 창황(蒼黃)히 당황하여 노련한 장수 신립(申砬)을 일으켜 순변사(巡邊使)로 삼고 나라를 보장하고 지키는 책임을 맡겼다.
나라의 기세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하늘이 준 천혜의 험난한 요새(鳥嶺) 또한 제대로 쓰이지 못했고, 적의 대군이 길을 나누어 고개를 넘어 일시에 죽이려 도착(殺到)하니, 거의 하늘의 뜻이요 인간의 힘으로 저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신립은 본래 여러 전장을 거치며 항상 승리해 온 명장이요, 그의 막하에는 김여물(金汝岉)이라는 뛰어난 보좌관이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병법의 상투적인 책략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결연히 퇴로를 끊고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부순 채(舟釜沈破), 한 번 싸워 반드시 죽겠다는 배수진(背水陣)을 금포(琴浦, 탄금대 앞 나루) 머리에 쳤다. 이는 구차하게 기와로 보존되기보다(瓦全)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겠다(玉碎)는 뜻에 전념한 것이었다.
우레가 치고 번개가 치는 듯한 격전 끝에, 주먹을 쥐고 발톱이 살을 뚫을 정도로 결사항전한 군사들이 혼연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루는(殉國成仁) 한 덩어리가 되었다. 신립 장군은 영웅으로서 마지막 죽음의 심경과 천지에도 마멸되지 않을 한(恨)을 품고 장강의 흰 파도에 몸을 던졌으니, 어찌 그리 장쾌하고 늠름하며, 그 정대광명함이 밝은 해와 달과 같지 않은가!
하늘은 비록 한나라 한신이 승리했던 정형(井陘)과 같은 기묘한 요새를 아껴 신립 장군에게 승리를 주지 않았으나, 그 기개는 당나라 장순이 끝까지 싸웠던 수양성(睢陽)의 높은 자취를 계승하고도 남음이 있어 교활한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음은 물론이다. 또한 그들의 날카로운 돌격 기세를 가로막아 한양의 급박함을 조금이나마 늦춘 공로 또한 묻힐 수 없을 것이다.
대저 7년 동안의 전쟁 속 크고 작은 백 번의 전투 중에서, 의로운 기상과 영웅적인 풍모로 천고에 빛날 곳은 특히 금산(錦山), 진주(晋州)와 함께 이곳 금포(琴浦, 탄금대)를 꼽을 것이다. 이 세 곳 중에서도 가장 먼저 모범을 보인 장한 거사로서는 금포를 으뜸으로 추대하지 않을 수 없거늘, 세상에 혹 부질없는 논의(신립의 패배를 비판하는 여론)가 들리는 것은 다만 영웅의 참모습을 성패(成敗) 이외의 자리에서 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탄금대 위에서 눈을 들어 옛 자취를 더듬어 보건대, 이곳의 모든 언덕과 계곡은 영험한 기운을 기른 빼어난 곳이요, 모든 굽이와 마을은 마음에 와닿는 명승지 아닌 곳이 없다. 나라를 빛낸 문장으로는 강수(强首)가 우뚝하고, 신의 경지에 이른 필법은 김생(金生)이 찬란하다. 김윤후(金允侯)가 적을 물리친 기상은 산성에 겹겹이 남아 있고, 최홍사(崔弘嗣)의 청렴하고 검소한 행실은 도덕의 모범으로 서늘하게 남아 있다.
은은한 안개와 푸른 풀 사이로 예성(蘂城)의 옛 집터가 어렴풋하고, 수수 넝쿨과 부추꽃 사이로 양촌(陽村)의 옛 집터가 은밀히 숨어 있는 듯하며, 신선의 깃옷은 포모대(泡暮臺)와 선동(仙洞)에서 나부끼고, 절의 깃발은 법경대사비(法鏡大師碑)와 승탑(僧塔)에서 펄럭인다. 조운(漕運)을 담당하던 옛 나루터는 강가 굽이에 또렷이 남아 있고, 일인(日人, 島夷)들이 조공 바치러 오던 길에는 가시나무만 거칠게 우거졌으니, 뜻있는 선비가 감회를 일으키는 풍경과 시인이 읊조려 탄식하는 정취가 이 하나의 대를 둘러싸고 서로 어우러져 피어나니, 참으로 눈과 마음에 담아내기에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하물며 하늬바람 부는 해질녘에 단월(丹月)을 멀리 가리키며,
"석 자 용천검과 만 권의 책을 가진 사나이여, 거룩한 하늘이 나를 내신 뜻이 어떠한가!"
하고 낭랑하게 한 번 읊조릴 때, 의기 넘치는 남자의 장한 가슴이 요동치고 가슴속 피가 끓어올라, 툭 터진 긴 파안대소로 천지를 찢어발기듯 토해내는 호탕한 흥취는 진실로 뜬구름, 먼 산봉우리, 보리물결, 벼 이삭, 새 나르고 물고기 뛰며 봄꽃과 가을 달을 보는 예사로운 경치 속에서 서로 견주어 얻을 수 있는 바가 아니지 않겠는가!
충주는 이미 꽃피운 과거의 일면과 함께, 아직 피어나지 않은 영광스러운 미래의 일면을 품고 있다. 지나간 날의 찬란함을 갈수록 더 꽃피우게 하는 그 자리에 무궁한 영예가 충주의 내일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충주의 인물들이 능히 스스로 떨치고 힘써서 땅의 영험함을 발양하고 역사의 자취를 더욱 드높이기에 정진하여 물러섬이나 게으름이 없다면, 충주의 자랑은 옛날의 국원소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가올 미래 세계에 대한 인물의 중심지(淵藪)와 문화의 원천이 됨에 있을 것이다. 그러할진대 이 대에 와서 노니는 사람들의 충주를 향한 찬탄과 흠모의 노래가 더욱 헤아릴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월악산(月岳)이 높고 우뚝하며, 한강(漢水) 물줄기가 끝없이 드넓도다. 만고의 청풍(淸風)이 길이 불어 끊이지 않을 것이니, 충주의 땅이 어찌 강 좌측의 한 깊숙한 변방에 머물 것이며, 탄금대가 어찌 한가한 사람들의 지팡이와 짚신이나 머무는 놀이터에 그치겠는가. 한 조각 굳은 비석(一片貞珉)이 이를 먼 훗날에 증명할 것이다.
단군기원 4287년(1954년) 4월 일 충청북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