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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긍정과 부정
출 8 : 1 - 15
서 론
세상 사람들 중에는 내일이라는 것에 희망을 걸고 오늘의 고통을 참고 살아가는가 하면 반대로 내일의 절망 속에서 오늘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포자기 하다가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단어는 하나인데 그 내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천태만상입니다. 내일이란 말은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일이라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낭비하는 어리석음도 있음을 지적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 희망적인 면에서 긍정적입니다.
본문 28-29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 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이리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하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내일면 애굽땅의 파리재아잉 물러간다는 것은 춤을 출 입니다. 일초 일분이라도 빨리 지나갔으면 바라는 마음 간절할 것입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절망에 빠져 자살 할 것입니다. 만약 자사라하지 않는다면 타락하여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내일의 희망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2. 절망적인 면에서는 부정적입니다.
본문 9-10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게 끓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까 내게 보이소서 그가 가로되 내일이나라"하였습니다. 이는 현명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생각을 해봅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미루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개선을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자기의 불행을 스스로가 연장하는 어리석은 행동이고 자기 영혼을 더 강퍅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생활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네가 알 수 없음이라"(잠 27:1)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기자는 말하기를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약 4:13-17)하였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내일 일을 아는척하고 과신하는 것도 문제이고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쉽게 포기하는 것도 또한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볼 때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입니다.
3. 오늘과 내일을 선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 9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와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끓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까"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은 재림을 준비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 살고 세상 일을 하는데는 아직 백년은 더 산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과 내일의 균형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늘을 불성실하게 살고 내일을 강조하다보면 오늘을 또한 불성실하게 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을 더욱 성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생활이 지혜롭게 사는 생활이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과 내일을 선용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고난을 참고(롬 8-18) 내일을 모르니 오늘을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잠 27:1, 눅 12:20-21).
결 론
모세처럼 알차게 일하기 위하여 오늘과 내일을 선용해야 할 것이고 바로의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는 오늘과 내일을 선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과 내일을 잘못 악용할 때에 그 사람의 오늘과 내일 아니 현재와 미래의 흥망 성쇠가 좌우될 것입니다.
출애굽기강해
출 8: 1-15
요즘 인기가 있는 영화 중에 [가든 오브 에덴]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신학적인 측면이 아닌 예수의 내면적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감동적인 영화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조화시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데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에덴의 동산이라는 이 영화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만족해 할 때 바로 그곳이 "축복의 땅"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잠깐 천리안에 들어가서 몇 가지 통계를 보았습니다. 최근 고위 공직자 집에 절도범이 거액의 금품을 털었는데 훔친 금액과 잃어버렸던 금액이 아주 크게 차이가 납니다. "서로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은 누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라는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약 81.4%의 네티즌들은 절도범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7.8%는 고위 공직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은 시민들의 여론을 훑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하는 어리석은 노력들이 계속되는 것이 안타깝게만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피로 만드는 첫 번째 재앙에서 바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재앙으로 개구리들이 바로의 왕궁과 신하의 집과 백성들의 집에까지, 심지어는 떡반죽 그릇에까지 가득가득 차게 하셨습니다. 12월쯤 나일강에서 개구리 떼들이 수없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애굽 사람들은 "이 개구리야말로 애굽에 풍요와 축복을 주는 신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신과 풍요상징으로 개구리 우상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몸체는 여성의 몸체이고, 머리는 개구리의 모양을 한 개구리 우상을 '헤크드'라고 말합니다. 그 축복과 풍요의 신이라고 생각되는 '헤크드'가 왕궁부터 신하와 백성들 집에까지 가득가득 차면서 이제는 풍요의 신이 아니라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벽화를 보면 왕이 식사를 하는 식탁까지도 개구리들이 가득 올라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향해서 말하기를 "당장 이것을 쫓아내면 좋겠다" "언제 이 개구리 떼들을 철수시킬까요?" 모세가 물어보았을 때에 10절에 보면 바로가 말하기를 "내일 당장 이것을 쫓아내라" 풍요와 축복을 가져다 주는 신이라면 많을수록, 가까이 있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그들의 삶 속에 뛰어든 개구리를 보면서 왕부터 백성들은 질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구리가 그들에게 다가감으로 인해 불편을 주고 짜증을 나게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의 우상의 허구를 깨뜨리시고자 하는 주님의 깊은 의도가 이 개구리 재앙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피 재앙에는 끄덕도 하지 않던 바로가 개구리 재앙을 만나면서 항복을 했습니다. "이 개구리들을 쫓아내주기만 한다면 너희 백성들을 데리고 가도 좋다. 그러니 너희 하나님께 구해서 제발 좀 쫓아 내줘라" 바로가 애원하고 있는 장면이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이 말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바로가 항복을 했습니다. 개구리 떼만 철수시켜 주면 이 백성을 해방시켜 준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하나님, 개구리 떼들을 다 물리쳐 주시 옵소서" 13절에 가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라" 여러분, 이 장면을 쭉 연상해 보시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바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서 자기 외에는 백성들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독재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모세와 아론에게 약속을 하자는 거예요. "이 개구리 떼만 철수시켜 주면 내가 이 백성을 보내 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어요. 얼마나 순진합니까? 여러분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거짓말쟁이가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거짓말을 하는고? 아마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그 말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개구리 떼들이 다 물러갈 수 있도록 기도할께요. 언제면 되겠습니까?" "내일 그 일을 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요구대로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모세와 아론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정말 모세와 아론이 더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은 바로의 속셈을, 바로의 그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그가 이 고통만 지나가면 또 딴 소리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은 믿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가르칠 때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아주 되바라지도록 어떤 상황이 생기면 융통성을 마음껏 부려서 손해라고는 눈꼽만치도 보지 않도록 그렇게 가르치십니까? 아니면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순수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까? 목사는 성도들이 때로는 거짓말을 해도 들어줍니다. 우선 성도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 목사의 중요한 모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십니까?"하고 들어줍니다. 왜 들어줍니까?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첫 번째 피 재앙에서도, 두 번째 개구리 재앙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물씬물씬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생각합니다. "저 멍청한 것들이 내가 지금 딴 생각 가지고 그러는 데도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내일 당장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구나.."아마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하나님조차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 만족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바로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개구리 떼들이 다 죽었습니다. 풍요와 다신의 신, '헤크드'는 이제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복되고, 유익한 존재가 아니라 아주 불편하고 도움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개구리 떼들은 물러갔습니다.
우상의 허구를 주님께서 체험적 사건으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희망과 자유를 노래했던 시인 '휘트먼'에게 어느 의사가 말을 합니다. "제가 의사 생활을 한 지가 30년이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수많은 처방을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약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휘트먼이 "사랑이란 약이 잘 안들으면 그때는 어떻합니까?" 의사가 대답하기를 "그때는 사랑의 약을 2배 쓰지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생각으로 이것만은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예수 십자가의 사랑의 힘으로 덮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시간 고백해야 할 줄 믿습니다.
어느 가정에 강도가 침입해서 잠자던 주인을 칼로 위협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주인이 깜짝 놀라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꺼내서 주었습니다. 돈을 모아보니까 390환이 되었어요. 옛날 이야기지요. 그때 1환이면 아주 큰 호떡 하나를 먹을 때입니다. 돈을 강도에게 주니까 덥썩 빼앗아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 "여보, 390환이나 주었는데 고맙다고 인사나 하고 가야지?" 그랬더니 뒤돌아서서 "고맙수다" 그리고서는 달아났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그 강도가 수갑에 채워진 채 끌려왔어요. 아마 순찰하던 경찰관에게 현장에서 붙잡힌 모양입니다. "이 사람이 당신 집에서 돈을 훔쳤습니까?" "아니요" "이 강도는 당신 집에서 훔쳤다고..." "아닙니다. 그것은 훔친 것이 아니고 내가 준 것입니다. 내가 주니까 이 사람이 고맙다고 인사도 하던대요" 이렇게 까지 얘기하니까 경찰관이 강도를 더 이상 붙들 수가 없어서 풀어주었어요. 강도 만난 그 주인이 누구였느냐 하면 '소파 방정환'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강도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고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미움이 있고,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죄악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조차도 내가 속일 수 있다고 바로처럼 생각한다면 크게 착각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 아론과 모세는 바로에게 속아주고 있는 거예요.
어머님이 시장 갔다 오면 잔돈이 생는데 화장대 위에 그냥 놓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데 그 잔돈이 없어지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돈을 훔쳐간다? 그럴리는 없을텐데... 그럴 아이들이 아닌데..." 그 다음번에 시장 다녀와서 또 잔돈이 생기면 그냥 놔두어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 속아주시는 거예요. 모세와 아론이 속아주는 것입니다. 왜? 깨닫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개구리 재앙에서 면하게 해주면 주께로 돌아올까? 지금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면 주님 앞에 새롭게 헌신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에게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을 깨뜨리시면서 이제 너희들이 의지했던 그 '헤크드'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알게 하시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크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신 거예요. 그런데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바로는 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절대로 백성들을 보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무슨 말이예요?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셔요. 우리의 완악함을, 우리의 강퍅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또 한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려운 시기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시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줄 믿습니다. 이 고통 지나가고 나면 바로처럼 또 옛 모습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고통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기간 동안 주님을 바로 만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만나는 그리고 깨닫는 기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우리의 완악함과 강팍함, 정말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하는 바로 같은 우리의 심정들이 새로워져서 주 앞에 순진함으로, 순수함으로 새롭게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이 고난의 터널 속에서 하나님을 바로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길을 바로 가게 하옵소서" 고난이 오면 어떻고, 행복의 기간이 오면 어떻습니까?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와 같이 어떤 경우에도 주님 앞에 그 믿음 지키고 충성의 삶을 살아가는 전천후 신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마다 바로처럼 그 어려움만 지나가면 되겠다고 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바로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또 한번 그가 주 앞에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지금까지의 연약했던 우리의 모습을 용서해 주시고, 새롭고 변화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