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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9-29 야곱이 아비에게
본문은 야곱이 아비에게 축복을 받은 장면입니다.
1)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속인 것이 축복을 받는데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장자 기업의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하여 된 것입니다(25:23, 롬9:12-13).
2) 혹 사람들이 이삭이 리브가와 야곱에게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했어도 그 축복한 바가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하나님께서 성도의 거짓을 어느 정도 용인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대로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행사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실성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야곱이 에서보다 승하게 될 것은 그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실에 있습니다(25:23). 사람이 부족해도 하나님은 그 예정하신 뜻대로 그 구원을 이루시는 원리에서 그분께서는 야곱을 위한 이삭의 축복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3) 본문 21-25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야곱의 음성이 에서의 음성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를 에서와 동일시하기에 곤난을 느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경 야곱에게 축복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실수나 연약이나 죄악으로 인하여 실패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1. 본문 19-20절은
“(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입니다.
야곱이 한 말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에서로소이다’라는 것이요,
둘째는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나이다’라는 것이요,
셋째는 ‘내 고기를 잡수소서’ 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너무 안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살펴야 합니다. 당초에 야곱은 겁이 많고 불안 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불안을 씻어버리고 자신 있게 대담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례로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 의무에서 고유한 한계를 범하면 곧 무한정한 방종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는 가르침을 얻습니다.
거짓말도 일종의 기술이 되어서 늘어만 갑니다. 그런데 부실한 기술이어서 윗 돌 빼서 아래 막는 식으로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또 자기한계에 합당한 것보다 지나친 일을 시도하는 자는 사단에게 문을 개방하는 자입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정해 주신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께서 정하신 범위내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 이상 좋은것은 없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야곱이 사기로 축복을 구하고 허위로 축복을 소유하려 한 것이 신앙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특수한 잘못과 정도에서 탈선도 하나님 말씀으로 생겨난 믿음이 제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야곱은 사냥에서 속히 돌아온 데 대한 변명으로 하나님께서 사냥감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때 그는 경건 생활 규칙을 따라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거짓말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섞는 죄를 짓습니다. 이와 같이 진실을 떠날 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일 뿐입니다. 어떤 좋은 일이 우연한 기회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야곱이 자기의 순조로운 사냥을 하나님의 섭리의 덕분으로 돌린 것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혜택의 시여자인 양 가장하였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자기 기만에 대한 위장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만큼 그의 과오는 위증 죄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을 자기 유익을 위하여 이용합니다.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기를 소원하는 사람마다 매사에 조심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2. 본문 21-25절은
“(21)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 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입니다.
여기서 이삭은 사술을 의심하여 주저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설사 야곱이 이때 축복을 받았더라도 그 축복은 믿음의 뒷받침이 없었기에 헛 일이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이렇게나마 축복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손을 빌어 자기 일 수행하기를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삭은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 계획을 촉진하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 이삭은 눈먼 사람처럼 모르고서 자기 의중에 둔 자기 사람에게 내릴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옮겼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지만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 사역하는 보통 기능에도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들은 하나님 명령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그 화목에 돌아가는 자가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그 목사들은 씨를 널리 뿌리면서도 열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분과 권세를 그들에게 맡기시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들이 가진 판단과 지배 하에 두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이삭이 몰랐다해도 거룩한 말씀은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비록 자기 종의 판단력이 흐려져 오판을 했지만 자기 의도 성취를 그만 두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톨릭에서 꾸며낸 이야기에 대해서 명백한 논박점을 얻습니다. 그들은 성례전의 전체 효력이 집례 하는 자가 가진 의도에 달려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이 사람의 뜻에 달려 있듯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속아서 축복을 했을지라도 그가 선언한 축복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전체 신앙이 남아 있어서 부분적으로 그의 행동을 규제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음성을 중시하지 않고 감촉을 통해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특성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사람에 대해서도 명백히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태만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장자 에서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그리고 애태워 가면서 이모저모로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에게는 에서가 컸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뭔가 가진 듯이 보이는 인물들이 크게 보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염광 교회가 딱하나 잘한 일이 있는데 강원근씨를 장로로 피택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감각을 무디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일면 하나님께서 한번 공포하신 것은 인간들이 아무리 변경시키려고 노력해 보아도 헛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굳게 서서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종류의 징계로써 이삭이 장자에게 대해 품은 맹목적 애착심을 바로 잡습니다. 에서에 대한 사랑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지나친 사랑은 그의 아들 에서를 그나마 머무를 수 있었던 하나님 말씀에서 밀어냈습니다. 이런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그의 이런 꼼꼼한 야곱에 대한 조사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너무도 자연적인 감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우리의 인간적 애정의 고삐를 놓는 일이 없도록 여간 주의해야 합니다.
3. 본문 26절은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입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입맞춤 관습이 당시에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저속한 사람들은 마음이 둔감해졌던 늙은이가 행하는 축복을 경히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마음껏 먹고 마신 노인이 다만 연극의 한 역을 해내고 있던 자에게 축복을 한다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럽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앞에서도 야곱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어린 자의 선택은 그분의 말씀대로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속된 자들이 존중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를 존중하여 명상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이삭은 마음의 침착을 잃고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명령을 명상하지 못할 정도로 먹고 마시는 것에 예속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식을 애착한 나머지 자기 소명에 대한 확신을 잃고 진지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신이 연약하였기 때문에 흔들리고 주저했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늘에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헛되이 장난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경솔하게 이 일에 나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족장의 마음에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신앙심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인간 마음 속에서 밝게 빛을 발하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4. 본문 27절은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입니다.
여기 “내 아들의 향취”는 에서의 옷에서 나는 들 냄새입니다. 이삭은 그 냄새를 가지고 풍작(豊作)된 밭 냄새를 연상합니다. 이 “향취”는 결코 불건전한 신비가들이 주장하듯이 기적적인 향취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보아도 풍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암브로우즈 교부께서 가르치신 은유가 있습니다. 동생 야곱은 형의 신분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그가 빌어온 의복은 형의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아버지의 취각에 향기롭고 즐거운 냄새를 풍겼습니다.
우리는 암브로우즈 교부가 가르치듯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 존전에 들어갈 때는 이와 똑같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부터 의의 옷을 받아 입습니다. 그 옷의 향기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들어가며 그를 대신하게 될 때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을 대신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삭은 자기 아들을 위해 땅의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소원하지 않고 탄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축도 내용은 자기 아들이 세상에서 잘 되고 땅에서 풍부한 소산을 얻으며 커다란 평안을 누리고 남보다 빛나는 존귀를 얻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식 없고 진정한 경건의 수련을 쌓지 않은 자들의 오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자들은 이들 거룩한 족장들이 받은 복은 연약하고 덧없는 이생에 대한 것 뿐이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구절에 나타나는 것은 이와 전혀 반대입니다. 이삭이 왜 땅의 은총에만 자기 축복을 국한시키는지에 대한 설명은 용이합니다. 여호와께서 옛날 열조들의 눈앞에 장래 기업에 대한 소망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우리를 곧장 하늘로 불러 올리십니다. 그렇지만 열조들을 인도하실 때는 우회하듯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하늘 기업의 거울과 보증으로 지정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자비 행위 가운데서 그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 총애하신다는 표징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현재의 낙에 만족하게 하여 하늘을 무시하거나 일부 어리석은 자들이 상상하듯 단지 빈 그림자를 따르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보조 수단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살던 시대를 따라서 점차적으로 하늘을 향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하는 자들의 처음 열매요 영원하고 썩지 않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기에 그의 영적 나라는 때가 이를 때까지 이런 식으로 그림자로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이런 여러 가지 상징 속에 내포되었습니다. 어느 의미로는 이 상징을 옷 입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거룩한 조상들의 신앙도 바로 그 수단을 관찰하고 이들 지상 생활에 기본이 되는 수단들을 통해서 하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삭이 하나님의 현세적 은총을 두드러지게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아들에 대한 소망을 이 세상에 국한시키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열망하던 수준까지 자기 아들을 높이 올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증거는 그 자신의 말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아들에게 열국의 지배권을 양도한다는 것이 주요한 요점입니다. 그러나 그런 존엄한 지위에 대한 희망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자기종족이 여호와의 택함을 받았다는 신념이 들지 않았다면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권리가 단 하나의 아들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삭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번영의 인생 행로를 탄원할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행운을 내려주시도록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충분히 고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확고하고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 아버지 총애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5. 28절은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이슬”이 농사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파종기와 결실기에는 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중해에서 서풍에 의해 밤중에 내리는 것인데 뜨겁고 비가 적은 팔레스틴의 여름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신33:13, 28, 호14:5, 슥8:12).
“땅의 기름짐” 은 토지가 비옥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신8:7-9, 11:9-12). “곡식과 포도주” 는 농작물 중에 중요한 것을 가리킵니다(신7:13, 호2:8,22, 욜2:19). 이렇게 성경은 농작물이 풍성한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들은 풍년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사람이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하다는 사실을 인하여 자연히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시4:7). 그러나 그 기쁨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 드리는 마음이 찬송으로 올라가야 됩니다(시65:9-13).
6. 본문 29절은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1) 여기서 몇 부분 나누어 살펴봅시다.
(1)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만민”이란 “만”자는 원문에 없습니다. 다만 “백성들”(암밈)이란 말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2)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라는 이 말씀은 후에 다윗이 에돔을 정복하므로 성취되었습니다(삼하8:13-14, 왕상11:15이하). 에돔은 에서의 자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에게 대하여는 형제들입니다.
(3)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라는 말씀은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는 내용입니다(12:3). 이것은 야곱의 후손중에서 일어날 메시야가 인류 축복의 기관이 될 사실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 되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축복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그를 믿지 않는 자(저주하는 자)는 정죄를 받습니다(요3:16-18).
2) 여기 이 말씀은 보통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으레 말하는 헛소원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공인 받은 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자요, 성령께서 부리시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자기 아들의 행복을 반대할 자에게 선언하는 저주는 하나님께서 직접 저주하시는 것과 마찬가지 효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약속을 확증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신자를 자기 보호 아래 받아들이실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에게 원수가 되겠다는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이삭이 하는 축복 기도의 역점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서 자기 종 야곱에게 인자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그를 거룩한 선민의 족장과 머리로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기 권세로 그를 보호하시며 지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종류의 원수 앞에서 그의 구원을 확보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행한 축복은 이런데 쏠리고 있습니다. 사실상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누리는 신령한 복의 성격이 이런 것들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감사와 찬송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