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91/라이피즘]자본주의를 넘어 "삶"으로!
최근 김누리 교수의 저서 『당신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와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등 두 권을 읽고 그 느낌을 끄적여 지인들과 공유할 때까지, 나는 그가 현대 정치 초창기에 통일사회당을 이끈 '김철'의 아들이자 현재의 정치인 '김한'의 친동생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한 친구가 댓글을 보내와 처음 안 것이다. 그것은 아무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도, 뭐라고할까, 약간 아이러니컬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재밌는 소설가 출신의 김한길은 최근 대선 과정에서 '정치 모사꾼'이라는 느낌이 들어 '눈엣가시'였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수구守舊정치인은 생래적으로 싫지만, 철새나 변절정치인은 어쩐지 그 사람의 속성을 보는 것같아 더욱 싫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칼럼 모음집인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말미의 '에필로그'를 읽고 탄복한 얘기를 하고 싶다. 그 전문을 고스란히 옮기고 싶지만, 그래도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생각한 몇 마디를 지인들과 공유하고 싶어 자판을 토오톡 두들기는 주말 아침이다. 이곳은 인천 청라지역 무수한 아파트들이 메타세콰이어 숲처럼 사방을 둘러봐도 초고층 '성냥갑 집'들뿐인 아들의 집이다. 한 달 전 이사를 와 어제 처음으로 와본 것인데, 사람이 눈을 뜨면 산이 보이고 들판과 논이 보여야 하는데, 커튼을 걷자마자 숨이 막힌다. 예전에 전북 향토문단의 '큰 나무' 신석정 시인이 어쩌다 서울에 한번 올라오면 "공기가 눈에 보여서 싫다"며 곧장 내려갔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새 내가 그 정도가 되었을까? 같이 살자고 해도 못살 것같다. 흐흐.
김교수은 작금의 세계에 대해,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자본주의 유일 지배'의 '결산서'를 내밀고 있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자본주의의 결산서라니 무슨 얘기인가? 자본주의라 하면 한 마디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경쟁지상주의가 아닌가? 이것을 '야수野獸 자본주의'라 일컬는데, 그 폐해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라. 이 야수자본주의는 인간 존엄의 조건인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 생존의 조건인 사회를 파괴하며, 인간 생명의 조건인 자연을 파괴해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체제로는 이 문명이 더이상 '진전'하면 안된다는 것이고, 오랫동안 성찰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새로운 주의主義'를 제창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것) 용어가 등장한다. 들어는 보셨는가? '라이피즘lifism'. 뭐라고 한마디로 번역할 말이 없다. '생활주의' '삶주의'도 어색하고 개념이 선뜻 우리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라이피즘은 그냥 라이피즘으로 읽고 사용해야 할 듯하다. 그보다 먼저, 라이피즘의 정의定義를 이해해보자. 자본주의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삶life을 파괴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생존life을 파괴하며, 생태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생명life을 파괴하는 체제라는 사실에 동의하신다면, 인간을 소외하고 사회를 와해시키며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사상적, 실천적 활동이 어찌 필요하지 않겠는가?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은 그동안의 세계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는가? 삶이든, 생존이든, 생명이든 영어로는 모두 라이프life라고 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즉 "삶"인 것이다. '죽음die, death'의 반대말인 '삶'처럼 중요한 키워드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지금은 말하기도 거시기한 시인 김지하가 '생명사상'을 말하고, 우리나라의 석학 이어령박사가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게 '생명자본주의'였을 것이다.
라이피즘은 그보다 훨씬 더 시의적절하고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개념이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 머리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한 개념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신선하고 기발하다. 김교수는 그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라이피즘은 자본주의의 '앤티 라이프anti-life' 성격을 직격直擊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과 생존과 생명에 적대적인 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폭로한다.
둘째, 라이피즘은 이데올로기적 유산에서 자유럽다. 20세기를 각인해온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넘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파를 얼마든지, 충분히 아우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인간소회에 맞서는 자율주의자든, 자본주의의 사회적 착취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든, 자본주의의 자연 파괴에 저항하는 생태주의자든 모든 라이피스트kifist(인간의 삶과 생존과 생명을 존중하고,
그 바탕이자 전제인 생태를 중시하는 사람)의 우산雨傘아래 모일 수 있다.
셋째, 라이피즘은 현대사회의 최대 현안이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생태 문제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넷째, 라이피즘은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함으로써 근대 휴머니즘 전통의 현대적 적자嫡子임을 증명할 수있다.
다섯째, 라이피즘은 자본주의가 파괴하는 삶, 생존 생명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겨눈다는 점에서 주로 사회적 착취외 불평등을 문제 삼는 사회주의보다 포괄적이로 진취적인 개념이다.
이제 곧 '포스트post 코로나시대'가 닥쳐오면 거대한 전환의 시대가 되어야지만, 우리 인류가 살 길이 있다는 김교수의 개념 정리가 어찌 이리 깔끔하고 일목요연한가. 머리에 쏘오옥 와닿는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모든 게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 시장중심사회는 인간중심사회로, 경쟁사회는 연대連帶사회로, 신자유주의 국가는 복지국가로, 인간의 자연지배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으로,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능력주의)는 디그노크라시Dignocracy(존엄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 와우-, 멋있다. 가장 진보적인 정당의 강령綱領같지 않은가. 좋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부터 '휴머니스트'가 아닌 라이피스트가 되겠다. 누군가 이런 강령으로 창당을 한다면 라이피즘당의 당원黨員도 기꺼이 되겠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되, 가볍게 절망에 빠지는 않는 것, 유토피아와 멜랑콜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환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아닐까 생각한다는 김교수의 생각과 성찰 그리고 문명사적 대안代案에 '백퍼 공감'할 뿐 아니라 무한대의 박수를 보낸다. 볼프 비어만이라는 학자가 한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자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는 말을 상기想起하자. "우리 모두 이 졸문을 보면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이념인 '라이피즘'에 대해 깊은 관심과 응원, 성원, 후원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이 절실하다.
첫댓글 미래 대안에 대한 라이피즘 글 공감합니다.
자본주의 결산서하니, 이젠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구나하는 느낌이 드는구료.
이런 선각자가 코리아에 있고, 이 글을 선물해주신 우천 위원님께 감사.
자본주의는 이젠 양극화 끝단까지 온 느낌, 모든것이 이해대립의 관계.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내 인생은 어차피 소풍이니, 행복하게 나머지 삶 살아가자.
감사드립니다. 우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