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36
9월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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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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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h2igOSjOq8 (양지훈 F.살레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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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옥중서간(獄中書簡)! 듣기만 들어도 가슴이 싸하게 아려오고, 코끝이 찡해지는 표현입니다.
오래 전 함께 살았던 문제아들 가운데, 이제는 성인이 되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잘 안 풀린 친구들이 가끔씩 저에게 옥중서간을 보내줍니다.
요즘 보기 드문 손편지입니다.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썼습니다. 달필 중에 달필입니다. 교도소 안에 문예반도 있는지, 내용도 수준이 상당합니다. 자신의 지난 부족했던 삶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굳은 결심과 각오가 생생하게 느껴지며 큰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옥중서한을 쓰셨습니다. 대체로 에페소서, 필립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이 네 개의 편지를 옥중서한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쓰셨을까? 하는 친저성(親書性)에 논란이 있지만, 옥중서한 한편 한편은 참으로 매력적인 편지들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깊은 감옥에서의 큰 고통 속에서도, 담장 너머 그리스도 신자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격려하고 고무하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들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중서한이라고 분류하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는 권고합니다.”(에페소서 4장 1절),
“내가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이 온 부대와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도 분명히 알려졌으며…”(필리피서 1장 13절)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는 나 바오로와 교우 디모테오가 우리의 사랑하는 협력자 필레몬 그대와…”(필레몬서 1장 1절)
“여러분은 갇혀 있는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콜로새서 4장 18절)
콜로새는 소아시아 지역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져 있는 오지였기에, 긴요한 용무가 없는 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갔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콜로새를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지 콜로새에도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오지인데다, 에페소 교회와도 꽤 거리가 있었던만큼, 이 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약간의 고립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기 콜로새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단적 요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초기 교회다보니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다교 신앙, 그리스 철학이 뒤죽박죽된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단을 선포하는 지도자들의 가르침 중에 크게 그릇된 것은 자기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자신들은 다른 지역 그리스도교 교회 신자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훨씬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더 큰 위험성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배척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콜로새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적 교의, 특히 종교 혼합주의, 그리고 그릇된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주변에서도 많은 이단들과 이단적 가르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사회 안에서도 백성들을 큰 혼란 속으로 몰고 가는 그릇된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균형 잡힌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방황하는 백성들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확한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는 것, 많이 배우고, 많이 연구하고, 많이 기도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중요한 책무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콜로새서 구절은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립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우주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장엄하게 찬미하고 기리는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찬가에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체 자연 질서 위에 계신 분이시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온갖 충만함’은 하느님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완전성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찬가는 역사 속 인물인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육화하신 아드님으로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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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wSMv6hPc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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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죽을 때까지 속 좁은 노인이란 소리 안 듣는다>
“라떼는 말이야….” “요즘 애들 이해를 못 하겠어!” 등의 이런 말을 자주 한다면 그 사람은 속 좁은 노인일 확률이 다분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노인을 ‘꼰대’라는 용어로 비하합니다. 꼰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또 어린 꼰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자기 생각만이 다 맞는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그때그때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표징, 혹은 하느님의 뜻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튜브 채널 ‘달빛 부부’의 ‘12년 동안 가면을 쓰고 생활한 스티븐 연’의 내용입니다. 스티븐 연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른 미국 영화계의 큰 인물이 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하지만 그도 삶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너는 한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고, 나가서는 미국인들에게 “너는 미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을 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는 밖에서는 미국인답게, 집에서는 한국인답게 생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워킹 데드’라고 하는 시리즈에 거의 주연급으로 많은 인기를 얻기까지는 동양인으로서 많은 차별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나리’를 찍으면서 당시 이민 1세대의 고통을 그대로 연기에 녹아내며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왜 그리 힘들게 일해야 했는지, 싸워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아버지는 스티브 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아들은 그동안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꼈습니다. 아버지도 그러한 아들을 안고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꽉 막힌 근성을 나무라십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틀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추려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헌 부대인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치 않는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8-39)
그렇다면 옛것은 다 나쁘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변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은 변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입니다.
수십조 개에 이르는 인간의 세포는 7년이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변하면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지 않으면 암 덩이가 되어 인간이 죽습니다. 변할 것은 변해야 하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현재 지옥에 관하여, 혹은 십일조에 관하여 말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선악과는 꼭 바쳐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변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장궤틀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반면 너무 엄숙한 분위기의 미사는 변해야 합니다. 미사는 하느님을 만나는 혼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너무 제사 분위기이고 형식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형식은 철저히 지켜지지만 실상 미사 안에서 얻어야 하는 열매, 곧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죽어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임은 스티브 연처럼 그 역할을 수행해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를 소화하면 모든 인간을 이해해서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역을 있는 그대로 연기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새로운 포도주이십니다. 그분은 유연성 없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삶이 그분 안에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안은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아드님을 팔아넘긴 가리옷 유다도 이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안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안에는 가리옷 유다의 수많은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은 곧 모든 인류를 받아들임이고 이해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살게 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만날 모든 이들의 모습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루한 어른이 아닌 익어가는 어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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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하는 신부님을 위한 송별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동차로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기쁜 마음으로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교구 사제모임을 하면서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한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나이가 많은 선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침실을 가장 좋은 침실로 정해 줍니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하려 해도 후배 신부님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배려해 주는 후배 신부님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배는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선배들의 말을 실천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미안함 마음은 늘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인 저는 디지털 세대인 후배들의 능력에 감탄 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마술사와 같이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만들어 내는 것을 봅니다. 5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신부님께 수고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아 있는 사제들도 소임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은 매주 미사 후에 친교를 하고 있습니다.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친교를 위한 비용입니다. 생일, 기일, 백일, 졸업, 연도와 같이 애경사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친교의 비용을 내어 놓습니다. 늘 2달 정도는 친교 신청이 밀려 있습니다. 저도 곧 어머니의 기일이기에 친교를 신청했습니다. 음식 준비입니다. 국수, 비빔밥, 떡, 빵, 김밥과 같이 다양한 음식을 마련합니다. 본당 성모회의 임원들이 매주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차림입니다. 친교실 창고에는 의자와 접이식 탁자가 있습니다. 일찍 오는 분들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습니다. 저도 일찍 성당에 가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보다 일찍 오는 교우들이 먼저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합니다.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모회에서는 탁자에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꽃병을 놓습니다. 그러면 친교실은 아름다운 연회장으로 모습이 바뀝니다. 각종 야채가 들어간 비빔밥, 시원한 오이냉국, 후식으로 빨간 수박이 준비된 나눔은 부러울 것 하나도 없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는 선배를 배려하는 후배들의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부대는 매주 친교를 위해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봉사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새 부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 포도주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들의 ‘성실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새 포도주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새 포도주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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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33-39: 단식의 정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유다인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34절)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라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묵은 나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가 없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하여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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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6-39)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잘못된 것은 버리고, 올바른 것을 지켜라.”입니다. (이 말씀은 “오래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지켜라.”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잘못된 것’은, “어떤 신심행위를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마태 6,1.5.16)”,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것(마태 6,24)”,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것”(마태 23,3), “속은 깨끗이 하지 않고 겉만 깨끗이 하는 것”(마태 23,25)과 같은 ‘위선’과 ‘율법주의’입니다. ‘올바른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또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생활입니다.(마태 7,21)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단식 논쟁’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제 사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겉으로만 자주 단식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진짜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단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생활은 전부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것은 위선이다.”라고 꾸짖으실 때마다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고칠 생각도 못 합니다.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음식 문제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있는 ‘음식에 관한 규정들’을 폐지하셨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마르 7,19) 이 말씀은, 죄를 짓고 나서 남 탓하지 말고, 음식이나 물건 탓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는 본인이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구약성경의 ‘음식에 관한 규정들’을 지키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3-15) 이 ‘환시’는, 사도들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어떻든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을 보면, 사도들은 예수님 승천 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의 음식 규정들을 따르면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도 몸에 완전히 배어 있는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방인 선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분명히 지시하셨습니다.(루카 24,47) 그런데도 사도들은 처음에는 “유대인은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도 안 되고,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음식을 함께 먹어도 안 된다.”는 관습에 얽매여서(사도 11,3), 유대인들만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랬다가 베드로 사도가 체험한 ‘환시’를 계기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방인 선교’에 나서게 됩니다. <“사도들이 드디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 시작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성경을 모르는 세속 사람들도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서, “정권이 바뀌었으니 사람을 바꾸고 정책을 바꾸고 법을 바꾼다.”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개선’이 아니라 ‘개악’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속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생깁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언제든지 ‘항상’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올바르게 잘 되는 일들도 책임자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다 바꾸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래되었더라도 ‘선한 것’은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은 계속 지켜야 합니다. 반대로, 새로운 것이라도 ‘잘못된 것’과 ‘나쁜 것’은 빨리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이천여 년 전의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온 하느님의 십계명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옛날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또 십계명도, 항상 ‘새로운 것’이고, ‘좋은 것’이고, ‘선’입니다. 그러니 계속 충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근대와 현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나 유물론 사상, 또 범신론 사상, 뉴에이지 운동, 히틀러의 전체주의, 또는 국가주의 사상 같은 것들은 모두 ‘나쁜 것들’이고, ‘악’입니다. 그 외에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단 사상이나 사이비 종교들도 많습니다. 자기들은 ‘새로운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오랫동안 내려온 ‘선’을 부정하는 경우, 그것들은 모두 악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습관과 타성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새롭다는 것들에 빠져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말씀의 정확한 뜻은, “구원의 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에만 얻게 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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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험난한 전교 여정에 이어서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전한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땅끝인 로마에 가서 당신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그에게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 또한 아버지 안에 계시듯,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염원은 “제 안에”, “아버지 안에”, “우리 안에”, “그들 안에”, “저와 함께”와 같은 반복되는 표현들에서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주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고, 오늘도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십자가와 죽음, 성체와 사랑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과 일치의 하느님 안에 머물며 주님을 깊이 체험한 이는 이 좋으신 분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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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유다 사회는 단식과 더불어 자선과 기도를 통하여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였지요. 늘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하느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은 새로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 유다 사회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그렇게 완고하고 폐쇄적이었을까요? 누구보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데는 그렇게나 더딘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요?
유다 사회를 떠나 가만히 우리네 삶으로 시선을 옮겨 와 봅니다. 습관이 되어 편한 하루하루의 삶, 굳이 바꾸지 않아도 무리 없는 삶의 방식들, 애써 찾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는, 어쩌면 더 이상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실천들.
그 속에서 바라고 기다리는 새로움은 실은 묵고 묵은, 더 이상 낡을 수 없을 만큼 닳고 닳아 버린 골동품이 된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기다린다지만, 실은 케케묵은 제 욕망의 민낯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은 헌 것을 버리고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 것과 헌 것이 만나지 말며, 새 것은 새 것과 만날 수 있도록 식별하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문제지요.
제 삶이 새롭지 않은데, 새 것을 기다린다는 모순을 깨닫는 것, 삶은 파도의 물결처럼 출렁이고 번잡한 욕망으로 가득한데, 제 삶의 고요를 바라는 황당함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것에서든 헌 것에서든, 태초부터 여태껏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은, 솔직한 모습으로 기쁘게 한잔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합니다. 괜스레 저만을 위한 축제를 기다리면서 제 욕망에 젖어 혼자서만 배시시 웃는 철부지는 되지 말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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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충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묵은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하느님의 옛 약속이 새로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주인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혼인 잔치의 기쁨으로 비유하십니다. 율법의 규정은 예수님으로 완성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웅덩이에 갇힌 물과 같이 썩어 신선한 향기를 간직하지 못하였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질책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쌓아 놓은 신앙의 기득권이 없어질까 봐 걱정하여 죽음이 깃든 물을 마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열린 영혼은 언제나 새로운 생명수를 마시게 됩니다.
형식적인 관습에 매달려 주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도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헌 가죽 부대는 영적인 무관심과 게으름, 죄의 습관을 뜻합니다. 새 포도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새로운 열정, 구원을 향한 새로운 걸음을 말합니다.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을 섬기는 모습’, ‘반복되는 일상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맞는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같은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새로움과 영감을 느낄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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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정웅 시몬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만 바라보고, 모세의 율법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아예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데도 그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한다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맛보아왔고 맛보고 있는 묵은 포도주에 너무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묵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셔온 묵은 포도주가 이 세상의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새 포도주는 그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얽매어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들이기에, 눈과 귀만 먼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굳어버린 그들이기에, 구세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예수님을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실 때에 제일 먼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제대로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전의 낡은 악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며, 헌 가죽 부대를 버리고 새 가죽 부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 4장 말씀처럼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아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해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복음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하느님이 아닌 세속을 향해 있었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향해 있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입어야 합니다.
새 가죽 부대를 마련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예수님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드릴 수 있도록 회개의 생활로써 새 가죽부대를 마련하도록 합시다. 부족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나직이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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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사를 하는데, 누군가가 저만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빤히 보시는 것입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곧바로 제의방 거울을 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더군요. 성당 입구에서 인사하는데, 저만 바라봤던 자매님이 제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15년 전 갑곶성지에서 신부님을 처음 봤었는데,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 저는 이렇게 많이 늙었는데, 신부님은 하나도 늙지 않으셨어요.” 늙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역시 늙고 있습니다. 주름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없어졌으며, 검버섯도 보입니다. 젊어 보이는 부분은 제 또래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다는 것뿐입니다. 그 밖에도 늙음의 징후는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님은 저를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하실까요? 자기 자신과 저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많이 늙었는데, 저는 늙고 있지 않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비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곳에서만 제대로 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렇게 물으면서 그들은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지 못한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생활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성적인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러 오셨지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새 옷과 새 부대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세대에는 새 기분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새 세대를 열면서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헌 옷에 새 천을 대고 기워보아도 옷은 더 찢어지기만 할 뿐, 헌 것(율법 시대)은 폐기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을 빌미로 각종 외부적인 형식으로 경직된 종교가 아니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풀어 나아가는 개방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과의 비교는 절대 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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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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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기>
-꼰대가 되지 맙시다-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새것과 헌 것”을 주제로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예수님께 시비를 걸 듯 이의를 제기하는 참 고루해보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순간 “꼰대”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꼰대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 꼰대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꼰대와 멘토,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야말로 영원한 멘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습니다.
꼰대 6하 원칙에 의하면 꼰대는 “1.내가 누군 줄 알아? 2.네가 뭘 안다고, 3.어디 감히, 4.왕년에, 우리 나이 때엔, 5.어떻게 나한테, 6.내가 그걸 왜?” 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자라합니다. 꼰대 방지 10계명도 재미있습니다.
1.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2.“고맙다” “수고했다” 고 자주 말하라.
3.오만하지 마라.
4.칭찬에 인색하지 마라.
5.능동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라.
6.강요, 협박등 강압적 태도를 자제하라.
7.매사 솔선수범하라.
8.젊은 세대의 문화에 민감하라.
9.자기계발에 힘쓰라.
10.진짜 꼰대가 되라. 진짜 꼰대는 본인의 뚜렷한 소신과 철학이 저절로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참 재미있습니다. 어제는 참 귀한 자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짐이 되는 선물은 사양하는 편이지만 어제의 원숙한 노년의 요셉 성인상 그림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하루 2-3시간, 6개월 걸려 그림 그림이라는 설명에 놀랐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자비하신 노년의 아버지 모습의 렘브란트 그림과 짝을 이루는 성 요셉의 그림에, “아, 나도 이제 자비하신 할아버지 나이에 도달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림의 이런 자비로운 노년의 어른들을 두고 꼰대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부터 10월4일까지의 창조시기 바치기 시작한 기도문도 참 좋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시의적절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섬세한 조치에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가톨릭의 힘이며 자랑일 것입니다. 철저한 생태적 회개를 바탕한 고백은 물론이고 다음 부분만 잘 명심하여 기도를 바치면 꼰대 예방에도 좋겠다 싶어 인용합니다. 참고로 어제 피조물의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주제는 “피조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였습니다.
“올해 창조시기에 청하오니,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처럼, 꺼지지 않는 주님 성령의 불로 저희를 불러 주소서. 저희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소서. 저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자기 내면만 향하던 시선을 돌리게 하소서. 주님의 피조물을 관상하고,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각 피조물의 목소리를 듣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이 거룩한 땅을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우는 저희를 주님의 은총으로 비추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한마디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학인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며 겸손히 배워 실천하면서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꼰대로 부터의 탈출이 가능하겠습니다. 꼰대가 아닌 꽃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이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꼰대에 버금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이의 제기에 주님은 흥분하지 않고 이들의 무분별의 무지를 일깨우십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로 단식의 때 단식하라는 충고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계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축제의 때, 왜 축제인생을 자초하여 고해인생으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새것과 헌것의 비유를 통해 아주 알기쉽게 설명하십니다.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헌옷에 새 천조각을 꿰매는, 헌 가죽 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어리석은 꼰대 짓으로 매사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늘 깨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새 부대의 마음으로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새삼 노년의 지혜에 해당한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마음의 부대가 되도록 깨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이 종래의 관행에 익숙해진 우리의 보수적인 집착의 경향이 얼마나 바꾸기 힘든지, 그리하여 꼰대의 처지를 이해해야 함을 또 배우게 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무시할 수 없는 인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새 부대의 마음으로 새 포도주의 현실을 받아 들이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이런 겸손한 노년의 분들은 저절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새삼 꼰대는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 87세 노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꼰대라고 하겠는지요! 교황님의 정신의 젊음, 마음의 젊음은 어느 젊은이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정신 역시 복음의 예수님처럼 젊고 자유롭고 당당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늘 주님 앞에서, 그 책임을 다한 결과의 확신일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나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세상 잣대가 아닌 주님 사랑의 잣대로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유로운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였을까?”가 참 좋은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분별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분은 어려울 때 피신처가 되신다.”(시편37;27,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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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5,34)
<회개의 단식!')>
오늘 복음(루카5,33-39)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다른 사람들은 다 단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하는지?'에 대해서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혼인잔치를 예로 들면서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곧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기쁨의 시간, 잔치의 시간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단식할 수 없고, 하지만 신랑을 빼앗기는 날, 곧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날에는 당신의 제자들도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슬플 때나 또는 새로운 변화요 새로운 시작을 앞에 두고 하는 '회개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 때 종종 단식합니다. 이 끊어내는 '힘듦을 통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이 '동참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새롭게 다시 탄생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1코린4,1-2)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성실함'입니다. 언제 어떻게 찾아올 지 모를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인 '죽음'과 최후의 심판의 때인 '주님의 다시오심'을 성실하게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성실함이 바로 '회개의 단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8)
오늘도 '성실하게' '회개의 단식'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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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루카 5,33-39 (단식 논쟁 - 새 것과 헌 것)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삶>
함께 할 때
모자람 없이
나를 내어주고
홀로 머물 때
흐트러짐 없이
나에게 깃든다
날마다
홀로 그리고 함께
함께 그리고 홀로
벗들과 어울려
마음껏
먹고 마시며
홀로 오롯이
정성껏
단식하며 기도한다
날마다
오름 그리고 내림
내림 그리고 오름
오늘을 빚은
어제를 품되
내일을 향하고
낯익은 낡은 것에
길들여지지 않고
낯선 새로움을 품는다
날마다
죽음 그리고 탄생
탄생 그리고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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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KQ1qDS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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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 39)
새 포도주를
만나는 향기로운
시간입니다.
새 포도주를 만나고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새 포도주
맛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제의 포도주와
오늘의 포도주는
다르듯 매순간이
새로운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새 포도주이심을
깨닫게됩니다.
매순간이
새 포도주를
맛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묵은 포도주는
묵은 포도주로
이어지고
새 포도주는
새 포도주로
이어집니다.
우리 영혼에
스며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새 포도주를
전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생명의 길에
새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새 포도주가
될 때입니다.
용서하시는
새 포도주의
삶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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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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