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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軍 義民團의 再發見
李榮浩 벨라도
序論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이야기 주제는 [독립군 의민단의 재발견]이다. 의민단은 팔도구 성당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 당시 성당의 정확한 주소는 만주 간도성 연길현 팔도구시이다. 따라서 중국, 특히 간도성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정리하면 의민단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교회사적 자료들을 먼저 살펴 보겠다.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은 대략 100년 단위로 특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1784년부터 1900년대, 1900년부터 2000년, 200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독립군 의민단의 재발견]이란 역사적 자료에 초점을 맞추면서 필자의 임의적인 선택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84-1900), 이 시기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은 무엇보더 먼저 1784년에 있었던 이승훈 베드로의 세례 사건이다. 두 번째는 1831년의 조선 지목구에 이어 1838년 있었던 요동대목구 설정이었다. 이 일은 그 당시 한국과 중국천주교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오늘 날에도 유효하다. 한국천주교회는 북경 중심 즉, 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의 철학적 의식에서 태여 났지만, 성장은 북경과 결별하고 요동중심 즉 파리외방전교회식 성가정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만일 한국이 북경과 지속적인 연결이 가능하였다면 마태오 릿치의 철학 및 신학 발전에도 한국천주교회가 많은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자들은 이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천주교회 주교좌 성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871년 제7대 조선지목구장, 리델주교에 이르기까지 주교좌 성당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지목구는 요동반도내 차구(백가점)를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펼쳐오다가 선교 본부가 일본 나가사끼로 이전하였다는 소식만 전해 주고 있다. 한편 중국교회는 1898년까지 요동대목구 주교좌 성당을 유지해 오던 양관은 남(심양)과 북(길림)으로 분리되면서 조선지목구와의 형제적 우애는 일단 멈추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교회 우애는 그 이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이어가고 있었다.
(1900-2000), 이 시기에 있어서 첫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났던 의화단(1900년)이었다. 이 일로 중국교회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특히 한국과 인접한 간도 교회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전후로 하는 주변 사회 환경의 변화, 즉 청일 전쟁(1894년)과 러일 전쟁(1904년), 그리고 한일 합병(1910년)은 새로운 차원에서 한중교회를 한층 더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공동 대응도 가능하게 하였다. 한중교회의 공동 대응에 대한 첫 번째 사례는 재치권(1904년)이었고, 두 번째는 의민단(1919년) 사건이었다. 재치권은 사목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의민단은 간도 신자들의 자발적인 사회 참여라는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회내의 사건은 그동안 해외로 떠 돌던 조선지목구장 주교좌 성당이 8대 민대주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서울에서 자리 잡은 일과 한국천주교회의 연길교구 창설(1920년)에 이어 79위시복(1925년)이었다. 시복의 의미가 초기 한국교회사에 있었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었다면, 연길교구 창설은 조선지목구의 완전 정착에 이어 최초의 중국선교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2000-2018), 이 시기의 특성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속에 하느님의 섭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중국교회에 속해 있었던 연길교구는 비록 50년이라는 짧은 기간(1904년-1946년) 동안 한국교회 안에 머물렀지만, 연길교구가 떠난 자리는 크고 깊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왜냐하면 이념 충돌이라는 특수 상황속에서 연길교구가 한국교회로부터 강제로 퇴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작된 시성시복 운동(2009년 장익주교 교령-춘천교구)은 이러한 역사속에서 받은 상처에 대한 치유라는 역사의 순환 모습이 그 안에서 발견된다. 근대사 이념 문제에 대한 시성시복 추진은 춘천교구가 제일 먼저 시작하였으나, 평양교구에 이어 연길교구에서도 곧 준비될 것이 예상된다.
한중교회, 특히 간도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을 연표로 정리하여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84년-북경에서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천주교회가 태동되었다.
1792년-로마는 이 소식을 듣고, 한국을 북경, 즉 포르투칼 선교회에 위임하였다.
1794년-북경은 한국을 새로 창설되는 본당 또는 공소 정도로 여기고 주문모 야고버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주신부는 5-6년 선교 하다가 한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쳐 순교하였다.
1811년-한국은 주신부 순교 후 선교사 재파견을 북경과 로마에 간곡히 요청하였다.
1827년-북경은 오랜 시간동안 대답이 없었고, 로마는 한국 서신이 도착하자마자 북경의 직무유기를 강하게 질타하였다.
1831년-로마는 포르투칼의 한국선교권을 취소하고, 조선지목구(교구) 설정 후 파리외방전교회에게 한국교회를 위임 하였다. 이번에는 평사제가 아닌 주교를 파견하였다. 왜냐하면 본당이 아닌 교구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자신들의 선교 특성에 따라 방인 사제 양성을 우선 과제로 설정하였다.
1,브뤼기에르(소)-2,앵베르(범세영)-3,페레올(고)-4,베르뇌(장경일)-5,다블뤼(안돈이)-6,리델(이복명)-7,블랑(백규삼)-8,뮈델(민)-9,라리보(원형근)-10,노기남-11,윤공희-12,김수환,13-정진석,14-염수정
1837년-최초의 신학생, 김대건 안드레아는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주변 환경이 매우 불편하였다. 포루투칼 선교회의 냉대 때문이었다.
1838년-로마는 조선지목구의 주변 환경을 정리해 주었다. 몽고 지역까지 포함한 요동 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요동대목구의 주교관은 양관에 있었다. 양관은 개주시 남쪽 5-60리에 위치하고 있다. 양관은 한국과 심양, 북경 그리고 장춘과 소팔가자로 갈 수 있는 해안가 인근 도시이다. 몽고와 만주 전지역을 관활하는 선교 본부로 보면 양관의 위치가 불편해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 교통수단으로 보아 육로 보다는 해로가 더 발달하였고 안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배를 타고 요동반도에 도착하면 첫 번째 만나는 도시가 바로 장하시(太長河)였다. 여기서 5-60리 하천을 따라가면 차구(백가점)를 만나고 조금 더 나아가면 양관(羅家店)인 것이다. 차구는 조선지목구(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선교 본부가 있던 곳으로 요동대목구(초대 요동 대목구장 베롤(Verrolles, 方若望) 주교관인 양관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물론 거리상 뿐만아니라 사목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요동 대목구는 조선지목구의 사목상 편의를 위해 차구(백가점)을 재치권까지 부여하였고, 그런 이유로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이곳을 제2의 고향처럼 드나들며 은사님들의 사목을 도왔다. 특히 최양업 토마스는 서품(1849년)후 수개월간 이곳에서 첫 사목(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신부 보좌)을 펼치기도 한 곳이다. 조선의 선교본부가 일본의 나가사끼로 이전할 때까지 재치권은 계속 유효하였다. 요동과 조선지목구 모두 파리외방전교회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 근대 교회사, 즉 1904년에 있었던 한중국경지역의 재치권에 이어 한국교회가 만주지역내 연길교구 창설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1842년-요동 대목구 차구(백가점)가 지리적인 이유로 조선지목구의 선교 본부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단동과 대련의 중간지점 장하시 인근 도시)
***소팔가지(1800Km)-장춘-양관(개주에서 5-60리)-(봉황성)-천산산맥-용화산,계관산 근처-차구(백가점장하시에서 5-60리)***
1844년-김대건, 최양업 부제서품이후 차구(백가점)에서 입국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845년-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서품후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순교하였다.
1849년-최양업 토마스 사제 서품후 이미 재치권이 부여된 백가점 성당 보좌로 머물면서 입국을 시도한 결과 성공하였다.
1861년-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과로로 순교하였다.
1898년-만주 대목구 분리--양관 즉 해안 도시에서 내륙으로 들어 간 특색이 있다
❑-길림 중심-북만주 대목구
❑-봉천(심양)-남만주 대목구
1900년-중국의 외세 배척 운동의 하나인 의화단 사건은 중국천주교회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 특히 만주 대목구, 남북의 성당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성직자들 역시 거의 순교 당하여 교회의 정상적인 사목이 불가능할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1904년-청나라 발상지로 성역화(聖域化) 되어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던 만주 일부 지역이 청의 쇠퇴와 함께 왕래가 자유로워 지면서 신흥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중국경 지역에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성행되어 한국인 도시가 형성되자 교회 사목에도 변화가 왔다. 그런 이유로 서울의 민대주교는 길림의 랄루이에 대주교에게 국경지역 신흥 도시의 재치권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만주는 1900년에 일어났던 의화단 사건으로 많은 성당들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고 성직자 역시 대부분 순교를 당하여 정상적인 사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북만주 지목구장 랄루이에 주교는 민대주교가 요구한 국경지역 재치권을 동의해 주었다.(요동의 남북대목구와 조선지목구 모두 파리외반전교회 관활이었기에 합의가 가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최문식 베드로 신부가 팔도구 성당 파견,
1919년-대형 사건이 한꺼번에 발생한 시기로 국내에서는 순수 평화 시위인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으나, 간도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강력한 무장 독립군 창설이 진행 되고 있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의 정보 능력을 집중하여 한층 더 강화하는 과정 중에 팔도구 성당 주임 최문식 베드로 신부는 독립군 의민단과 관련되어 인질로 무려 7개월간 납치가 지속 되었다. 팔도구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의민단은 한국독립군 3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화력을 갖고 있었으며, 독립군 대장으로 의심받는 본당 신부의 납치에도 불구하고 청산리 전투까지 의민단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1920년-청산리 전투(10월)에 이어 일본의 대패(3,000명 전사) 후 마적단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민간인 대학살이(3,500명) 다음해 봄(1921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중국교회와 협의하여 연길 및 의란이 중국북만주대목구로부터 원산대목구로 위임(1922년)되었다. 새로 한국천주교로 위임된 지역의 끝머리는 송화강과 아무르강, 그리고 우수리강이 만나는 가목사와 부금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출발하여도 상하좌우 1,800Km에 해당되는 광활한 영토였다. 강을 넘으면 소련이요, 산(흥안령)을 넘으면 몽고 벌판이었다.
1921년-주교 서품식(5월) (명동부주교 및 원산지목구장)
1925년-북한 공산당 창설, 장개석 혁명군 창설(일본은 피부병, 공산당은 심장병)
1932년-만주 사변
1946년-봉천관구(연길교구 흡수)
1962년-한국교구 창설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 간도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은 지리적으로 볼 때 대륙 진출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사적으로 보면 간도는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 성장 과정에도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한국교회 초기, 간도는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길목과 선교 본부 역할을 함으로써 방인 사제 양성과 더불어 한국천주교회 성장의 요람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근대사의 경우, 간도의 변화 속도는 더욱 빨랐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강점기 중 간도는 한국인의 신천지로 급부상 되었기 때문이다. 간도는 한국인의 대량 이주로 이미 한국인 도시화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한중교회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재치권(裁治權)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간도의 상황은 거주민의 분포로 보아 80% 이상 한국인이었고 실제로 중국 언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재치권의 시기는 길지 않았다. 1904년에서 1920년, 즉 16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재치권의 이유가 충족 되기 이전의 시기를 감안하면 한국인의 간도 거주는 16년보다 훨씬 길어진다. 재치권 시기내에 간도는 일본의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중대한 현실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교회는 평신도의 사회 참여, 즉 독립군 의민단이란 이름으로 시대적 소명에 당당히 응답하였다. 그러나 의민단 출현의 후유증은 대단히 크고 깊었다. 의민단은 간도 지역내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교회 전체를 파산 직전에 까지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상처 투성이 간도를 통체로 받아 드렸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이미 언급 한바와 같이 그곳의 주민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원산교구의 간도 진출, 즉 한국천주교회의 연길지목구 창설이 바로 그것이다. 연길지목구는 원산대목구 관구안에 속한 교구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연길지목구는 원산대목구에게 사제 양성을 지속적으로 위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속에 연길지목구의 출중한 인재들이 최근에 이르러 한국천주교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함흥교구장서리 이동호 아빠스, 수원교구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등이다.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처럼 새로운 역사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의민단으로 이미 초토화 된 간도교회는 이념 문제로 또다시 광풍속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념 문제, 그것은 원산교구의 간도 진출을 강제로 퇴출 시켜 버린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0년에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내 연길교구는 1946년에 이르러 중국천주교회로 넘어 갔다. 재치권의 시기까지 모두 합친다고 해도 42년의 짧은 시간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가 연길에 머무는 동안의 수 많은 상처들은 정말로 대단했다. 우리는 그것을 박해라고 한다. 비록 짧은 시간속의 고통이었지만, 한국천주교회 초기 순교와 비교될 만큼 크고 깊었다. 교회는 오늘날, 이러한 이념 갈등으로 인하여 희생된 이들을 위한 시성시복을 진행하고 있다. 시성시복, 그것은 신앙의 확실한 표현이며 진정한 회개와 고백, 그리고 이어지는 용서와 화해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출발이기도 하다.
간도에 대한 한국천주교의 역사는 위와 같이 그저 흘러가버린 과거 역사만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새롭게 조명되어 오늘 우리 앞에, 우리가 함께 고민할 문제들을 분명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의민단의 출현은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사회 참여였으며, 제2차 바티칸 정신을 무려 40년 앞서간 시대정신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순수 교회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간도 전체 사회에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오늘날 이 지역의 새로운 문화 발전의 첫 출발이 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 유일하게 마자막 남은 문화 충돌, 그것은 월등한 민족의 강력한 힘, 또는 월등한 이념의 주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가톨릭적인 문제 해결 방식, 즉 시성시복의 방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간도는 수 백 년 동안 흥망성쇠에 따라 형성된 지역 특유의 감정들, 아직도 진행중인 이념 갈등, 그리고 각 민족의 대 이동으로 복잡하게 엉겨 붙은 혈연관계, 현재에도 진행중인 강대국들의 이권 문제등이 첩첩히 쌓인 곳이 바로 이곳, 간도이기 때문이다.
간도 교회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구체적인 예, 즉 사연 많은 어느 신자의 자기 고백을 들어 보자. 물론 전개되는 이야기는 과장되거나 허위는 아니며 실제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야기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필자의 생각, 즉 간도 사회의 현실적인 상황과 함께 미래 지향적인 내용도 함께 첨부하고 있다. 의민단 정신이 신자들의 자발적인 사회 참여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렇지만 증언자의 고백도 필자의 역설도 모두 지극히 기우러진 편견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아낌없는 비판이 요구된다.
문제의 이야기는 이렇다. 큰 삼촌은 시대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독립군 투사, 그런데 막내 삼촌은 집안의 문제아였다. 만주 시절, 사냥개처럼 민첩하고, 두뇌가 뛰어나고 영리한 일본 경찰로 가족들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형제들의 격투가 실제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노부모는 두 아들을 바라보며 눈물속에 청춘을 다보내야만 했다. 두 삼촌들은 극과 극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한 세대의 아품이 식어 갈 때쯤, 타고난 재능으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둘째 삼촌이 유능한 공산당 당원으로 성공한다. 또 다른 형제, 셋째 삼촌은 형제들 싸움에 지치고 짜증스러웠다. 그러기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인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최근 서울로 유학 나온 수 많은 조카들을 돌보는 큰 고모...., 그는 평양으로 훌쩍 떠나버린 오빠가 한없이 걱정스럽다. 그리고 명동에서 성직자 가정으로 자리잡은 거룩한 외촌들.. 그들은 가족들의 일치를 위해 묵상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흩트러진 대가족들은 모두 90이 훨씬 넘은 집안 어르신을 뵈려고 만주의 연길 본가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어떤 말씀으로 집안 어르신께 인사를 올렸을까?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말..., 어머니, 만수무강 하세요? 어머니, 편안하세요? 어머니, 행복하세요? 그러나 누구도...., 어떤 말도 그분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방 한구석에 있던 신부가 미사 가방을 펼치고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창문의 두꺼운 커텐을 내려준다. 또 다른이는 적당한 밥상에 제대포를 씌운다. 이어서 보물처럼 모셔진 십자가와 촛대가 자리를 잡더니 밀초의 은은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절대 침묵중에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사중 간간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연로한 어르신의 눈물이었다. 수많은 후손들....,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특별한 이념도, 품격 높은 애국심도, 풍부한 경제력도 연로한 어르신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미사 중 하느님 품안에서만 가족 모두를 따듯하게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뿌리 깊은 신앙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일, 즉 미사가 가능했다. 그렇다. 우리는 가족 미사 전례중에 가족 단위 문제가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다. 의민단에서처럼 집단적인 사회 참여라면, 좀더 시야를 넓혀 갈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시성시복에 해당된다면, 이 두 가지 경우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간도 지역안에 확대 시켜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미사 전례중에 가족 단위 상처가 치유되는 상황, 그것은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특별한 이야기일까? 그것은 아니다. 실제 상황이었다. 간도 교회의 구성원이 바로 그렇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이 바로 이것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만든 것입니다. 정말 안탑갑다. 신앙인이었기에 이 정도의 치유가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재, 간도 지역의 많은 이들은 신앙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그들도 우리가 감동시킬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광화문 시성시복의 모습속에 그 해답이 있다. 10% 조금 넘는 한국 교회였지만, 우리는 전 세계를 향하여 평화의 멧세지를 힘차게, 그리고 분명하게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길과 평양에서 시성시복하는 날, 그들의 교회 모습이 겨자씨 만큼 작을찌라도 그들의 멧세지 역시 전 세계가 감동할 만큼 크고 웅대할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늘 우리 시각, 즉 서울에서 연길을 바라보며 서울식대로 미래를 걱정 한다. 그러나 연길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아래와 같은 그림이 보인다. 계속해서 연길에서 서울을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그려 보겠다.
지금까지 소개한 연길의 크리스찬적 가족의 일은 분명 멀고 먼 미래의 희망 사항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당장, 우리 모두의 가족들 앞에 놓여 진 현실은 어떠한가?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한쪽으로만 치우 친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정말 그렇다. 정말 심각하고 냉정하게 우리들 자신, 우리들 가족들, 이어서 우리들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연길교구내 가족들의 일상적인 생활속의 모습, 특히 북한 가족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 보자.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도 어렵게만 생각했던 북한 방문, 그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쉽게 쉽게 해결하고 있었다. 그들의 북한 방문은 지방 행정부의 말단 권한으로도 지체없이 허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소개된 연길 가족의 북한 방문, 즉 셋째 삼촌을 보려면 늦어도 삼일이면 연길 시청에서 허가증이 발급된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지금 연길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70% 이상 북한에 가족들이 있으며, 그들은 이웃 도시 나들이처럼 북한 지역의 친척을 자유로이 방문 하고 있다. 38선 넘어 살고 있는 가족 방문을 평생 기다려도 불가능한 우리와 대조된다.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상호 신뢰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에서 연길 방문 역시 같다는 것일까? 순수 가족 방문이라면 상호 동등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탈북 문제와 연결하면 전혀 다른 문제로 변질 될 수 있다. 일단 원칙적인 것에만 집중해 보자. 많은 상상력을 동반한 우리의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와 같은 상호 방문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북한 역시 우리들의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탈없이 건재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남북한을 가로 막는 38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상호 불신일 수도 있다.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장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호 신뢰와 불신이 위와 같은 엇갈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간도, 그리고 남북한의 상호 단절, 이러한 사회 환경의 결과로 나타난 지역 교회와의 단절, 그것의 핵심 문제가 상호 신뢰와 불신이었다면 그것은 한국천주교회의 몫으로 사회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볼만 하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과거, 교회의 사회 참여를 외쳤던 의민단이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직설적인 경고였다면, 시성시복은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라는 차원에서 차별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성시복은 권력자가 강압적으로 하느님 나라 존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관계를 분명히 따져 묻는 일이었고, 이 일로 우리는 그들에 의해 참혹한 순교를 강요당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분명 하느님 나라가 지상 왕국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을 지상 왕국으로 착각하거나,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무참히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그 결과 수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일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할 말은 해야 한다. 다만 슬기롭고 지혜롭게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시성시복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해야 하며, 신앙고백처럼 진행되는 회개와 고백, 그리고 이어지는 용서와 화해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분명하고 확실한 상호 신뢰를 만들어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상호 신뢰를 쌓아 가는 제도로써 시성시복보다 더 나은 제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이 상호 신뢰를 쌓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상호 불신 관계를 허물고 소통할 수 있고, 가까운 이웃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의민단의 역할은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당위성을 찾아내어야 하며, 함께 실천하는 일이다.
本論
본론에서는 첫 번째로 의민단이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40년 앞서간 한국천주교회의 사회 참여 단체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의민단의 성장 과정도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의민단은 그 당시 교회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음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의민단의 재발견으로 우리들의 현실 참여, 즉 시성시복의 적극적인 참여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뜻을 전하고 있다. 시성시복의 본래의 의미, 즉 회개와 고백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일의 첫 번째 출발은 로마교회와의 정식외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독립군 의민단의 기본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40년 앞서간 한국천주교회의 사회 참여였다.
일본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마츠우라 주교는 교회의 사회 참여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정치참여 비판은 공의회 이전 신앙이다”일본 정평위 마츠우라 주교,
"세상 속에서 흔들리면서 하느님 나라 향해 여행하는 교회"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1)-요한 23세 교황은 교회를 세상에 개방하고, 현실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인 <사목헌장>이라는 것이다.---“이제 신앙인들은 세상의 고통을 보았을 때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의무’임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2)-1962년 12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고 4일 뒤에 발생한 쿠바사태를 예로 들며, 당시 쿠바에 설치된 소련 미사일 배치로 미소간 전쟁 위기에 있었으나, 케네디 미 대통령이 “세계 어느 국가나 이념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존경받는다”는 이유로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결국 요한 23세 교황이 후르시초프와 케네디 대통령 사이에 중재에 나서서 미사일 철거로 전쟁위기가 사라졌다. 마츠우라 주교는 “교회는 정략에 따라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며 “복음적 입장에서 평화를 중재하고, 화해와 일치를 가져다 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3)-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역시 처음에는 빈민들을 위해 지원하는 선량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서 부유층과 군사지도자들의 칭찬을 가장 많이 받던 인물이었는데, 그가 빈민들을 지켜보면서 “왜 가난한가?” 묻기 시작하면서, 빈민을 착취하는 부유층과 이를 옹호하는 군사정권과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빨갱이 주교’라는 말을 듣던 로메로 대주교는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현실문제에 눈감지 않고 발언하다가 결국 미사 중에 암살당했다”
한국천주교 독립군 의민단의 경우,
1)-세상의 고통을 보았을 때 즉시 사회 참여를 결정하였으며
2)-사회 참여 목표는 특정 정치 참여가 아닌 보편적인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3)-사회 참여 결과로 재산과 생명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의 기본 정신을 충실히 따랐다
한국천주교회내 평신도들의 사회 참여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립군 의민단이었다. 많은 이들은 독립군 의민단 존재에 대하여 화들짝 놀라고 있다. 혹시 십자군은 아니냐? 누가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든 것이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의민단은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정신에 따라 신자 스스로 만든 사회 단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의민단이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결과에서 창설되었다면 그것은 그 지역의 본당 사제의 사목 방향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당시 팔도구 성당은 간도의 신흥 도시 내 본당으로써 신자들을 위한 사목의 우선순위는 끊임없이 본당 관활내로 유입되는 유량민 신자들의 안정적인 사회정착을 돕는 일이었다. 간도에 유입된 유량민의 규모는 그 당시 서울의 인구 정도, 대략 3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유량민 중 신자들의 숫자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팔도구 성당은 본당 사목회와 신자들 중 풍부한 재력 능력을 갖춘 신자들이 적극 협조하여 상호 신용 금고를 개설하였다. 팔도구 성당 주임 신부의 이와 같은 독특한 사목 방법으로 태여난 상호 신용 금고는 현금뿐만 아니라 현품(귀중품 내지 농산물의 잉여품으로 주식과 부식을 포함한 농업협동조합 운영) 과 인력 개발까지 효율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신자들의 안정적인 정착과 삶의 질을 중산층 이상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그 당시 간도는 터무니 없는 토지의 임대차 관례. 이상 기온으로 인한 자연 재해와 기근, 그리고 고금리 대금업과 임금 착취로 사회 문제화 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팔도구 성당 신자들의 안정적인 사회 정착 증거는 보훈처에서 수집된 독립 운동 자금과 관련된 사건 기록물 등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이러한 증거물들은 독립 운동사, 특히 독립운동의 재정적 측면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지대한 역할을 간접적으로 들어내는 증거물들이다. 또 다른 증거는 교회의 성장 속도였다. 1910년, 400명선에서 출발한 팔도구본당 신자들이 1920년, 즉 10년 사이 5,400명으로 증가한 사실에서 확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간도 지역내 신자들의 증산층 이상의 안정적 삶은 청산리 전투 후 유행처럼 번져가는 마적들의 인질극 표적이 되어 개인 및 공소가 흔적 없이 괴멸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팔도구 성당 주임 신부의 사목 방향은 상호 신용금고 운영과 함께 지역 주민을 위한 학교 설립과 교육 내용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팔도구 성당 부설 학교등에서 가르치는 교육 내용은 그 당시 서울과 전혀 달랐다. 일본의 간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과 과목으로서는 대표적인 것이 역사, 지리, 조선어로써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 교과서로써 동국역사(東國歷史), 중등동국사락(中等東國史略), 이십세기 조선론등에서는 역사 지식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역사 교육은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 의식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지리 교육은 조선 땅이 결코 일본의 일부분이 아니라, 조선의 강역, 즉 산과 바다 그리고 국경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었다.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 교육과 함께 조선의 독립 정신을 심화 시켰던 것이었다. 조선어는 역사 및 지리 교과서에 이어 민족의 얼을 가르치고 이어가는 강력한 수단임을 가르치고 있었다.
초기의 천주교학교들은 1899년 싸리골, 호천개, 부처골 등지에서 주일학교 등의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1920년 기준으로 교향학교(交響學校), 사립한성학교(私立韓成學校), 사립한양의숙(私立韓陽義熟), 덕흥의숙(德興義熟), 독흥의숙(讀興義熟)등 간도 내 전 지역을 상대로 30여개 학교에서 매년 340명정도 학생을 배출하고 있었다. 의민단은 교회의 이런 교육 분위기안에서 때를 기다리며 강력한 독립군 부대 창설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신흥무관학교에서처럼 군간부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군사 교육은 실시되지 않았다. 의민단은 상호 결속과 통제가 가능한 300명의 정예군만 유지하였다. 넘치는 인력자원은 국민회 또는 북로군정서 등 다른 독립군 부대를 안내해 주었다. 따라서 신자들은 의민단외에 다른 독립군 부대에서도 많은 인원들이 활동하였다. (윤선자 논문 참조)
2. 독립군 의민단의 청산리 전투대한 교회의 반응(1919년-1921년)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독립군 의민단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논평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독립군 의민단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논평 역시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천주교회는 독립군 의민단에 대하여 처음부터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간접적으로 교회 반응을 살펴보면 독립군 의민단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대단히 긍적적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문건은 주교 서품식(1921년 5월1일)에서 발견된다.
....드브레 주교(명동 부주교) 및 보니파시오 사우아 아빠스 주교(원산지목구장) 서품식 날(1921년 5월1일), 주변국가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목구장 대부분은 서울에서의 서품 행사에 참석하였다. 서울의 뮈델주교, 대구의 드망 주교, 오사카의 카스타니어 주교, 나가사끼의 콤바츠 주교, 심양의 슐레 주교 등이었다. 그 시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기 중 이었다. 순수 천주교회 행사임에도 불구히고 일본 정부의 요직 인사들 역시 모두 참석하였다. 그날은 노골적으로 일본과 한국천주교회가 힘겨루기 하는 날이었다. 일본은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조직과 화력에서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대패(1919년)를 하면서 3,000명에 이르는 정규군을 잃었다. 일본은 청산리 전투 참패이후 경신년의 마적단 토벌(1920-21년)이란 이름으로 민간인 3,500명 대학살을 끝내가는 시점이 바로 서울의 부주교 및 원산 지목구장 주교 서품식 날 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청산리 전투 마적단에는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이 분명 있었다. 경신년(1920년) 대토벌이후에도 유독 의민단의 중심지로 의심받는 팔도구 성당이 20여 차례 집중적으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초토화 되었다는 점은 청산리 전투에서 천주교회 신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컷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뮈델주교는 방금 만주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막 끝내면서 주교 서품식장에 들어서는 일본 관리들의 속셈을 전혀 몰랐을까? 청산리 전투 후, 경신년 대토벌 당시, 전투장이 아닌 팔도구 성당 마당, 특히 수많은 신자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는 독립군 의민단 단원, 이경찬, 그리고 그들의 동지들을 정말 몰랐을까?
주교 서품식에 참석한 정부 요직 인사를 보면,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마주노 박사, 마츠나까 외무국장, 총사령관 오바장군, 마에타 장군, 서울 주재 각국 영사, 러시아 영사등이었다. 일단 그들의 독설을 들어보자.
주교 서품식 날 사이토 총독의 건배 제의는 아래와 같았다.
......여러분의 한국내 포교 활동에 대한 저의 존경심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사들입니다. 90년전 여러분은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갖은 난관과 고통을 이겨 낸 그 노고가 점차 열매를 맺어, 이제는 명실 공히 한국 내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종교와 그 종교가 주는 지혜로운 교훈은 국민들을 독실하고 경건하며 예의 바르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국민의 도덕적.신체적 안녕을 위해 여러분과 우리사이에 항구적이고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겸손과 용기를 위하여 건배!!!---(친일 외교에 협조 요청)
-여기서 사이토가 말하는 국민이란 일본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순명은 무조건 머리를 숙이는 맹종과 다르다. 옳은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아닌 것은 그르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짜 순명인 것이다. 용기 역시 맹종과 확실히 구별된다.
뮈델 주교 건배 답사는 직설적이었다.
...저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가톨릭 선교사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용감하다는 사실을 총독님처럼 인정해도 저를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감한 분들은 신앙을 위해 피까지 흘리신 우리 선배들이셨습니다. 저는 또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모두 용감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소중한 제2의조국,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예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성교회의 영광과 원만한 선교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 파견국 중에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을 위하여 건배!!!---제2의 조국 한국을 위하여.....(늘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뮈델 주교는 분명히 한국인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한국의 번영과 구원을 위해...(분도 통사257쪽 참조)
자료를 확인해 보면, 민대주교의 청산리 전투 전몰 신자들에 대한 예우는 순교자 수준이었다, 일본과의 담판에서 뮈델 주교는 판정승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성직자 모두는 죽을 각오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간도의 신자들은 의민단을 통하여 교회의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평신도들에 의해 신앙을 스스로 받아 드렸던 것처럼 의민단 역시 제2차 바티칸 정신을 40년 앞서 간 의미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의민단이 100년전, 고귀한 피까지 흘린 교회의 사회참여 정신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때 그 시절처럼 총칼을 들고 최전선에 나가야 하나. 최전선은 어디며,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서울에서 평양 그리고 팔도구 성당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그렇다고 의민단에서처럼 최첨단 무기로 길을 뚫어야 하나?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38선 불통의 원인은 분명 상호 불신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와같은 상호 불신은 우리의 기본적인 권한, 즉 인권을 극도로 훼손하고 있었다.
상호 불신을 풀어가는 접근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극히 제한적이다. 용서와 화해라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서와 화해는 회개와 고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방적인 용서와 화해는 의미없는 선물에 불과하며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와 고백 그리고 용서와 화해라는 과정을 모두 거치는 것이 바로 시성시복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불신으로 훼손된 인권을 시성시복으로 모두 회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3.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정점이다. 그 일은 정식 외교라는 틀 속에서 시작될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1946년 중국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큰 변화가 예고되었다. 만주에서는 봉천이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무순, 열하, 길림, 사평가, 연길이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봉천 관구안에 들어 갔다. 그 결과 그때까지 조선 교회, 즉 원산관구안에 속하였던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1920-1946)
조선지목구(1831.9.9.)는 중국 교회보다 늦은 1962년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조선지목구가 교구로 넘겨준 유산 중 아주 귀한 선물은 당연히 103위 성인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지목구(1838.12.12.)에서 봉천관구 소속 연길교구로 넘겨 줄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시성시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기에 한국에서처럼 연길교구내 성인들에 대한 시성시복 하는 날, 로마 교황을 평양과 북경(만주)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성시복, 그것은 인권회복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핵 문제가 강자의 몫이라면, 인권회복의 완성, 즉 시성시복은 분명 한국천주교회의 몫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현실 사회 참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고민해 보아야 한다. 독립군 의민단, 그리고 지금 준비중인 시성시복운동은 교회의 사회 참여 모습들이었다. 그때 그 시절, 요동 대목구는 많은 이유등으로 점진적으로 쇠퇴해 갔다. 그러나 조선 지목구는 성장을 거듭해 갔다. 한중교회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지난 날들을 천천히 되돌아 보자. 로마교회의 특별한 배려로 한중교회가 처음 만났던 200년전 요동 반도, 즉 양관(요동대목구)과 차구(조선지목구)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라는 한 지붕 아래서 꿈같은 밀월 관계를 유지하며 극동 아시아 선교의 출발을 서둘렀다. 그러나 첫 출발부터 고난의 길을 함께 가야만 했습니다. 미사에 대한 오해로 주민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아 몽고와 극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요동지목구장 베론 주교와 제4대 조선지목구장으로 추대될 베르뇌 신부는 요동에서 상해까지 고난의 피난길을 함께 가야만 했다. 그것은 성가정의 에집트 피난과 비교될 만큼 한국과 중국 교회의 멋진 어울림이었다. 이제 그런 역사적 사건들은 기억속에만 머물지 않고, 동장군의 지루한 질투에도 불구하고 눈속의 매화처럼 화사한 꽃잎을 내밀며, 만물이 약동하는 봄날의 참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 재현해 주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은 역할 기능으로써 한국교회는 그동안 받기만하다가 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200년 전에 있었던 일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판박이 재치권, 즉 팔도구 성당등 국경지역의 재치권으로 시작된 한국과 중국 교회와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이어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연길지목구 창립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한중교회는 과거 200년에 이어 다가오는 미래에도 어려울 때 서로 협력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 분명하다.
교구와 교구의 관계는 절대로 독립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가 지금 중국교회에 속한 연길교구의 과거사를 논하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한국천주교회 품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이러한 한국교회 모습은 역사속에서 하느님이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는 섭리로 받아 드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북한을 통하여 같은 멧세지를 중국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근대사에 있어서 연길교구에 관한 한국천주교회 역사는 비록 50년이란 짧은 기간(1904-1953) 이었지만,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의민단에 이어 이념, 즉 공산주의 출현으로 인한 희생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대원군 시대와 비교될 만큼 대형 사고가 분명했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이웃나라 중국도 이 문제에 깊숙이 관계되어 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출발점인 한국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시성시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종점은 중국이다. 북경과 평양이 로마와 화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손해 볼일은 없다. 로마와의 화해로 그들은 수많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 그들과 로마는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미 시작된 시성시복 운동, 즉 2009년 38위에 대한 장익 주교님의 교령 선포는 지역적으로 북한 지역이며, 순수 가톨릭 교회적인 행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념 논쟁을 극복하여 극동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가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 세계인이 공인하는 객관적 가치 즉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이뤄지는 결과는 인권 문제 해결의 정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권 문제, 그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의 첫 번째 출발, 즉 상호 신뢰는 의외로 쉽게 풀려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식외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이 그동안의 로마교회와의 단절을 종식하고 정식 외교를 시작한다면 상호 신뢰 형성과 함께 시성시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미 10년전부터 이러한 일, 즉 시성시복을 준비해 왔다. 한국은 이미 그 결과를 확인하였으며, 이어지는 웅대한 영광을 맛보았다. 로마 교황이 평양과 북경을 방문하는 날,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도 우리처럼 광화문의 영광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복잡하고 어렵게 여겨지는 간도교회의 인권 문제, 그것은 이와 같은 정식외교라는 틀속에서 의외로 쉽게 풀려갈 수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무엇보다 로마교회와의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중재 역할에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일은 한국천주교회의 우선 과제중에 으뜸으로 여겨진다.
정식 외교 후 중국과 북한이 모든 것을 한국천주교회에게 맡겨 준다면 극동아시아 천주교회에 이미 조직되고 훈련된 카리타스등과 협조하여 후생사업 마무리 작업까지 원만하게 풀어갈 것이다. 이어서 서울에서 평양, 그리고 북경을 거처 로마까지 대륙횡단 철도가 이어지길 다시 한 번 간절히 바란다
結論
의민단의 재발견으로 확인된 東北亞의 人權 問題,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몫이다. 왜냐하면 근대사에서 나타난 의민단의 출현, 그리고 이념 갈등으로 발생되는 순교, 그 결과로 이어지는 시성시복등은 한국천주교회가 지금 당장 거쳐 가야만 하는 교회의 사회 참여, 즉 의민단 정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역사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현실 참여속에 성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시성시복은 우리 모두의 자발적인 사회 참여로써 기도와 희생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시성시복은 당사자들의 진정성 있는 회개와 고백, 그리고 이어지는 용서(容恕)와 화해(和解)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우리 모두의 적극적인 기도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이미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무려 40년 앞서간 사회 참여, 즉 독립군 의민단의 역사가 있다. 또한 최근의 구소련의 회개를 되돌아보면 많은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시성시복은 이러한 과정을 거처 평화와 공동 번영의 길로 우리 모두를 분명히 안내할 것이다. 그러기에 한 편의 소설로 필자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그 안에 당근과 채찍이 모두 들어있다. 필자의 부족한 점, 많은 이해 바란다. 의민단의 재발견이란 이름으로 간도와 북한 문제를 풀어 보려는 시도는 많은 우려와 엉뚱한 방향 제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미래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많은 이들의 거침없는 지적과 교회 발전을 기대하며 이어서 귀중한 자료 소개하고자 한다. 간도교회의 人權 問題 해결 후 이어지는 한국천주교회에게 주어질 과제이다. 남북한 분단선을 기준으로 하였지만, 교회내 교구 소속 지역은 다르다. 서울교구와 춘천교구는 북한 지역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제시된 내용은 대략적인 참고용으로 이해하시기 바란다.
북한은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등 두 교구로 출발한다. 몇 년 후 평양교구는 이럴 것이다. 현재 6道, 120개 市郡, 94개 區, 491개 洞, 1967개 里, 103개 공업단지, 총인구 13,899,015명이다. 예비신자 20% 잡아보면 2,782,500명이다, 본당은 예비신자 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561개 본당이다. 공소는 준 본당으로 리에 하나씩으로 하면 2084개소 이다. (지역행정에서 군에 이어 면을 삭제하고 바로 리가 존재한다. 북한의 리는 남한의 면과 비슷하다) 평양교구는 도 또는 직활시에 하나씩 즉 6개 교구로 분활 되어도 작지 않다.
함흥교구는 이렇다. 현재 4道, 63개 市郡, 68개 區, 288개 洞, 1290개 里 131개 공업단지, 총인구 7,906,769명이다. 예비신자 20% 잡아보면 1,378,500명이다. 본당 5000명 기준으로 하면 본당 272 이다. 공소는 준 본당으로 리에 하나씩으로 하면 1499개소 이다. (리는 남한의 면과 같다) 함흥교구도 도 또는 직활시에 하나씩 즉 4교구가 분활되어도 작지 않다 교구 또는 본당 설립에는 인력과 재력이 많이 든다. 북한선교는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등 2개 교구의 일이 결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 10개 교구 설립에 관한 한국 천주교회의 숙원 사업이야기다. 성직자는 물론하고 평신도들이 온 힘을 다해 풀어 갈 숙원 사업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보자. 성당 833개소, 준성당 3583개소에 대한 재력과 인력은 얼마나 필요할까? 1992년 11월7일 중국 요령성은 50년 동안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였다. 그때 그들은 단서를 달았다. 지역 개발에 호응하여 교회를 개발할 것을..., 만일 자금 부족으로 포기하면 국가에 다시 환수 된다는 조건이다. 중국 교회는 가난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많은 재산들이 또다시 몰수되는 수난을 격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북한 교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면 그 결과는 중국천주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편 소설, (2015년 4월2일, 수원교구해외선교부에 소개된 글)
신나는 安圖县 本堂 巡禮,
이영호 벨라도
유럽까지 뻗어 갈 TR[大陸橫斷鐵道=transcontinental railroad]는 부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한반도를 지나 광활한 중국 대륙을 관통할 TR는 각 플래트 홈의 엇갈린 이해(利害) 관계 속에서 신중론자들에 의해 한동안 억류되었다. 우려(憂慮)가 확신(確信)으로 기우러 가자 대범한 친구들은 TR를 무조건 출발시켰다. TR는 자신을 알리는 기적 소리와 함께 로마를 향하여 전력 질주(疾走)해 갔다. TR는 출발과 함께 점차 괴물화 되어갔다. 식성(食性)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TR가 머무는 풀랫트 홈이라면 어김없이 TR의 불랙홀로 변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TR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文化) 뿐만아니라 극비밀로 감추어진 군사(軍事) 비밀까지 거침없이 집어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랙홀, 그 곳은 크고 작은 다툼이 없는 고요함과 평화만 흐르고 있었다.
태여 난지 얼마 안되는 TR이지만,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는 식욕으로 인하여 급성장하면서 때 이른 꽃망울을 터 트리고 있었다. 꽃 중에 꽃, 그것은 바로 능금화[能金花]였다. 오고가는 물량 만큼 살찐 과수나무의 열매[黃金]는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뿐이랴. 열매에서 풍기는 향기 역시 유별났다. 그것은 많은 이들의 이성 뿐만아니라 예민한 오관을 마비 시켜갔다. 만일 누가 자신의 몫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폭동(暴動)도 불사할 모양세이다.
TR는 말 그대로 철길이다. 정해진 대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TR를 멋대로 진화 시켜 버렸다. 탈선 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기차를 전복 시켰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TR를 따라 자동차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서민들에게 오토캠핑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벨라도와 동료 일행은 의민단(義民團) 깃발을 앞세우고 용인(龍仁)의 은이 성지(聖地)로 모여 들었다. 安圖县 聖堂을 목적지로 오토 캠핑를 하기 위해서였다. 1,000Km의 대장정이었다. 쉽지 않은 여행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어갔다.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캠프카는 안도현을 향하여 출발했다. 의민단(義民團) 오토캠프카 일행은 어느듯 서울과 개성을 벗어나자 북간도 특급열차 노선을 따라 온성을 향하여 전력 질주해 갔다. 온성에 도착한 의민단(義民團)은 곧바로 경신 성당을 향하여 두만강을 건너 갔다. 간도에 처음으로 입성(入城)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한중(韓中) 자유 여행 지역으로 선포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유럽에 들어 온 기분이다. 1,000Km의 긴 여정 끝에 의민단(義民團)은 안도현(安圖县)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지나 온 길은 아래와 같다
용인(은이 성지) ➟ 서울 ➟ 개성 ➟ 평양 ➟ 평성 ➟ 순천 ➟ 고원 ➟ 함흥 ➟ 북청 ➟ 단천 ➟ 길주 ➟ 청진 ➟ 라진 ➟ 온성 ➟ 敬信镇(경신진) ➟ 板石镇(판석진) ➟ 珲春市(혼춘시) ➟ 英安镇(영안진) ➟ 密江乡(밀강향)➟ 凉水镇(량수진) ➟ 图们市(도문시) ➟ 長安镇(장안진) ➟ 延吉市(연길시) ➟ 朝阳镇(조양진) ➟ 銅佛寺镇(동불사진) ➟ 头沟老(두구로) ➟ 石門镇(석문진) ➟ 安圖县(안도현)
安圖县 本堂 주임 박신부가 의민단(義民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박신부는 수 차례 안도현을 방문해 왔던 의민단(義民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올 때이면 단동 - 장하 - 개주 - 심양 - 장춘 - 길림 - 교하 - 돈화 - 안도를 택하였다. 항공기인 경우는 장춘(또는 연길)으로 와서 기차로 오곤 하였다. 그러나 이 번 만은 달랐다. 자가용으로 대륙을 횡단(橫斷)한 것이다. 한탄강을 따라 가다가 임진강을 넘은 곳이다. 그 곳은 수 십 년 금단의 땅이었다. 연길로 가는 길 역시 막힘이 없었다. 그들은 평양을 지나자 원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흥을 지나 청진에 도착했을 때 잠시 머뭇거렸다. 나진, 선봉 지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미개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듯 안도현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도현 본당 주임, 박신부 옆에 정씨가 보인다. 그들은 지금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일 뿐이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였다.
朴神父, 汽车用一下吧(박신부, 차 좀쓰자!)
很忙(몹시 바뻐.)
啊,你刚才说什么?(니, 지금 뭐라고 했나?)
很忙, 我去, 靠那边! (바쁘다고 했다. 갈란다. 비켜라!)
你什么?(뭐라고?)
....,!?(.....,!?)
박신부와 정씨의 인연은 특별했다. 주종(主從) 관계(關係)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묵인(黙認)되어 왔다. 중국 정부는 지난 수 십 년 간......, 법률적으로 완전한 종교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명문(名文)상 일뿐이었다. 실제적으로는 극도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시켜 왔다. 그런 이유로 박신부는 늘 범법자로써 사회로부터 소외되었고, 정씨는 집행자로써 막강한 국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씨는 수시로 권력 남용하여 범법자들을 사유화, 또는 노예화 하였으나, 그런 사실을 비난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종교인들이 정씨의 횡포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흔적없이 사라져 갔다. 정씨는 지방 행정부의 일급 전범자가 분명했다. 그는 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만 박신부는 달랐다. 슬기롭게 정씨와 맞섰다. 위의 대화 내용은 자세히 살펴보면 극도로 예민한 양면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따져보자. 정씨가 박신부의 승용차를 쓰자고 하였다. 그때 박신부는 정씨에게 중국어로 정중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어에는 존칭이 없다. 사실은 분명 둘 다 조선 사람이었다. 조선말로 정중히 대화를 하려면 존칭을 사용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박신부는 의도적으로 중국어로 쏘아 붙혔는데 그것은 박신부 심기가 몹시 불편하여 정씨에게 막말을 퍼 붙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알아 차린 정씨는 박신부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덤벼 들었다. 그러나 박신부는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끝까지 중국어로 정씨를 몰아 붙이고 있었다.
박신부와 정씨는 평상시에도 늘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박신부의 경우, 정씨의 권력 남용은 한 점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정씨는 늘 불쾌하였지만 박신부와의 대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패(慘敗)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바뀌었다. 중국 정부가 로마 천주교회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로마 교황 방문을 요청한 일로 정씨가 실직되고 만 것이다. 정씨는 실직과 함께 일급 전범자로 몰려가고 있었다. 정씨는 갑자기 떠 밀려 온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박신부가 정씨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사제관으로 불러 들였다.
“정분도씨, 직장은 잡으셨나요?”
“신부님, 어떻게 제 본명을 아셨지요?”
“분도씨, 어머님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고백성사를 보시겠어요?”
“신부님, 고맙습니다.”
정씨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정씨의 거친 성격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진화된 것이었다. 그는 편하게 살고자 함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날 들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정씨는 박신부 권유에 따라 그동안 부정축재로 모아 온 재산을 포기하고 전액 사회에 기부하기로 결심하였다. 교회는 정씨를 정중히 받아 드렸다. 그의 진정한 회개(悔改)와 고백(告白), 그리고 보속(補贖)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 정씨는 폭권을 누리던 때보다 주름살이 펴지고 생기가 돌더니,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60대가 넘은 중년이었지만 40대 정도의 장년처럼 힘과 패기가 넘쳐 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