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官廳紀行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이 정규직은 아니다. 기간제나 계약직이 있는데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명함은 있지만 실직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조선 시대도 유사했다. 조선의 관직은 實職과 散職으로 나뉘고, 실직은 실무를 담당하는 직이고 산직은 벼슬은 있으나 근무처가 없는 명예직이다. 실직은 祿官과 無祿官으로 구분한다. 녹관은 녹봉을 받는 직책이며 녹은 월봉으로 받는 미곡이고, 봉은 월봉으로 받는 포를 말하는데, 녹봉은 이 두 가지의 통칭이다. 녹관은 다시 정직과 체아직으로 분류하는데, 정직은 지속적으로 근무하며 녹봉을 받는 정규직이고, 체아직은 일정 기간 교대로 근무하되 근무할 시 만 녹봉을 받는 임시직이나 계약직이다. 체아직은 정해진 녹봉이 없고 1년에 몇 차래 근무실적에 따라 녹봉을 받는다.
遞兒職은 뜻을 보면 ‘아나 이것 받아라‘입니다. 조선의 무관직은 대부분 체아직이고, 기술 관료와 훈도도 체아직입니다. 체아직은 체아와 반체아가 있는데 반체아직은 임기가 6달입니다. 경국대전의 관직 수는 5,605개인데 그중 체아직이 3,110입니다. 문관인 동반 벼슬은 전체 1,779개 중 체아직이 106개로 6%인데 무관인 서반 벼슬은 전체 3,826개 중 체아직이 3,005개로 80%입니다.
체아직은 크게 동반체아, 서반체아, 잡직체아로 구분하는데, 동반체아는 의관, 역관, 산관, 율관, 관상관, 같은 기술직과 내시입니다. 서반체아는 양반출신의 특수군과 비양반 출신의 군인과 의원입니다. 서반체아 3,005개의 보직 중 특수군, 선전관, 겸사복, 별시위, 내금위, 친금위, 족친위, 갑사 등에 소속된 양반 군인이 무려 2,666개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잡직체아는 동반과 서반 중 양반이 아닌 평민이나 천민 중 받은 직책이 약 1,600개입니다.
녹봉이 없는 무록관은 어떤 자리일까? 무록은 관직은 있지만 녹봉이 없는 자리인데 월급이 없는데 왜 관직을 받아 일을 할까요? 무록관은 보통 과거에 급제치 못한 양반이 맡는데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지요. 무록관은 서울의 경관직과 지방의 외관직으로 나뉩니다.
경관직에는 의금부 당하관을 비롯해 교서관, 사옹원, 상의원, 군기시, 예빈시, 수성금화사, 전설사, 전연사, 내수사, 소격서, 빙고, 장원서, 사포서, 사축서, 조지서, 도화서, 활인서, 와서, 귀후서 같은 각 관서의 정3품 당하관, 정4품 제검, 정5품 별좌, 정6품 별제, 정8품 별검 등이 있습니다.
외관직에는 종5품 경기좌도. 우도 수군판관, 충청우도 수군판관, 종6품 찰방과 교수, 종9품 도승, 훈도, 검률, 심약 등이 있습니다.
이런 무록관에는 진정 수입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다. 자신의 직책으로 수단껏 다양하게 수입을 올리고, 농민 상인 공장 등 평민과 관노의 관리까지 자신의 직무와 연관된 대상에서 돈을 끌어냈습니다. 가끔 무록관에서 유록관으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고 지방수령으로 뽑혀가는 사례도 나옵니다.
산관은 일종의 명예직으로 공을 세웠을 때 포상의 일환으로 주어졌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줄 실직이 없을 때 산직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근무처가 없지만 그래도 벼슬아치가 누리는 지위는 유지했고, 세금이나 형벌에서 벼슬만큼 대우를 받고 자식에게 음서제로 벼슬길을 열어 줄 때도 있어 요긴하게 쓰였다. 산직에 머물다 실직이 나면 이동하는 경우가 있으니 산직이라도 벼슬을 받는 것을 좋아 했다.
왕의 공식 비서실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6명의 승지가 있는데 모두 정3품 당상관이다. 당상관이란 조정회의 시 堂上즉 임금이 있는 대청마루에 앉을 수 있는 관원이다. 조정의 같은 정3품 관리도 당상과 당하는 옷의 차림새나 대우에서 차이가 많았다. 당상관은 옥관자를 달고 영감 칭호를 받지만 당하관은 사기관자를 달고 나으리 칭호를 받았다. 도승지는 각자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는데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다. 정3품이지만 종2품을 지낸 관리가 승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승정원일기는 승원원의 주서 2명의 임무로서 늘 배석하여 국정기록을 쓴 담당자이고, 현재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약 4배의 분량이고,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본이 500쪽 430권인데 만약 이 승정원일기를 모두 번역하면 1,700권은 족히 나올 량이지만 아직 번역이 완료되지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승정원일기 같은 방대한 량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일곱 재상의 근무처 의정부
의정부에는 종2품 이상의 재상이 7명이 근무를 한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비롯해 좌찬성 우찬성 그리고 좌참찬 우참찬이다.
삼정승의 임무를 보면 좌의정은 判吏曹事라 해서 이조의 인사관 관련 업무를 맡고, 우의정은 判兵曹事라 하여 병조의 인사권을 맡았다. 영의정은 외교와 형벌에 관한 가벼운 일을 맡았다. 종1품 찬성의 임무는 재상을 보필하는 업무이다. 참찬은 판서보다 서열이 높은 벼슬이나 비변사가 정무의 중심이 된 후로 장관인 판서보다 힘에서 밀리었다.
정승이 되는 나이는 대체로 50대가 많았다. 참고로 선조 대를 표본으로 살펴보면 박순 50세, 유전 55세, 이산해 50세, 정철 54세, 유성룡 49세, 김용남과 이원익이 50세에 정승에 오른다. 그러나 심수경은 75세 황희는 24년 정승에 있었고 나이가 87세에 사직을 했다.
지방관은 떠나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하는데 궐내행하 과정에 대전별감이나 승정원 사령에게 적게는 60냥 많게는 300냥의 돈을 줘야 문을 통과 시켰다. 당시 1냥에 쌀이 3말, 2냥에 포 1필이니 지방관의 300냥은 쌀 90가마의 가격이다. 대단히 큰 액수로 수령을 가는 사람이 서울에 파견된 저리를 시켜 본 읍에 비용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을 추천한 이조의 판서 참판 참의 정랑 좌랑을 차례로 만나 인사치례를 했다. 그리고 행장을 꾸려 발령지로 가는데 물건과 데리고 갈 사람을 정해야 한다. 나라에서는 刷馬(쇄마)라 하여 15마리 정도의 말을 빌릴 돈을 주는데 300냥에서 600냥이다. 이 돈으로 부족하여 추가 비용을 임지의 백성이 부담한다. 임지의 이방은 관속과 임지의 대표를 대동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신임 수령을 만나고 마을에서 추렴한 돈을 바쳐서 경비에 보탰다.
경기 감영은 서울과 수원, 충청감영은 공주, 전라감영은 전주, 경상감영은 대구, 감원감영은 원주, 황해감영은 해주, 평양감영은 평양, 함경감영은 영흥이었으나 시기별로 약간의 변동은 있었다. 관찰사는 지방 관리의 성적을 매기는 자리인 까닭에 임기를 1년 이상 하지 않았다. 관찰사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처럼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2명 이상 있는 곳은 그중 하나를 관찰사가 겸임을 했다. 관찰사의 직속 관원으로는 판관, 도사와 검률, 심약이 있었다. 판관은 관찰사의 부관이고 도사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로 군사와 국방까지 맡아 관찰사를 보좌했다. 검률은 법률을 담당한 관원으로 법 해석과 인용을 맡았다. 심약은 도의 생산물 중에서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심사하고 감독했다.
부는 관찰사의 관리를 받지 않는 자치단체다. 부를 다스리는 부윤은 관찰사와 동급의 종2품이다. 개성, 경주, 전주, 영흥, 평양, 의주 등에 부윤이 있는데 이중 전주 평양 영흥부윤은 관찰사가 겸임을 했다. 부윤 휘하도 경력, 도사, 교수를 파견했다.
고려 초 전국12 목에서 조선은 전국 20목을 뒀는데 경기도는 광주 여주 파주 양주이고 남은 7도에 커다란 읍의 지명이 주로 끝나는 16읍이 목이다. 이곳은 정3품 상하관인 목사와 교수와 판관이 있었다.
군중에서 인구가 1,000호가 넘는 곳은 도호부로 승격을 했는데 군사적 요충지는 대도호부로 승격을 했다. 경상도안동, 강원도강릉, 평안도영변, 함경도안변 등이다. 대도호부는 목사와 같은 정3품 관리를 도호부는 종3품 관리를 파견했다.
군은 종4품 관리를 뒀고 가장 많은 행정단위는 조선의 360고을 중 반이 현이었다, 큰 현에는 종5품의 현령을 작은 현은 종6품의 현감을 뒀다. 조선시대 현령은 34개소, 현감은 141개소이다.
군수나 현령 현감은 군수님 현령님 현감님이라 하지 않고 모두 사또, 또는 나리라 호칭을 했다.
역참의 우두머리 찰방은 각도의 역참을 관리하는 종6품의 무록관리다. 역참은 국가 명령서 전달, 군사 정보를 주고받는 통신기지, 사신 왕래의 접대를 하는 여관 기능을 맡는 독특한 곳이다. 유사시 찰방은 북방의 역촌을 순시 방비를 맡는 지휘관의 역할도 했고, 탐관오리나 질병의 조사를 맡는 암행어사의 역할도 했다. 암행어사는 찰방의 역졸을 이끌고 출두를 했었다.
지방관청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육방관속인 아전이 했다. 아전은 경아전과 외아전으로 나뉘는데 경아전은 한양의 중앙 관청에 근무하는 아전으로 녹사, 서리, 조예, 나장, 차비군 등을 가리킨다. 이들은 중인 계층으로 녹사는 종6품까지 서리는 종7품까지 승진할 수 있다. 외아전은 향리와 가리로 구분하는데 향리는 그 지방 출신 아전이고 가리는 지방관이 데려오는 아전이다. 향리는 지방 정전 앞의 육방 청에서 근무를 하고 녹봉이 없는 탓에 백성에 돈을 걷어 생활을 했다.
지방관의 최대 강적은 좌수와 향관이다. 향관의 수장을 좌수라 하는데 지방자치 조직인 유향소의 우두머리다. 유향소는 향청이라 불렸고 유향소는 대개 현마다 하나씩 설치됐다. 유향소는 좌수와 별감이 있는데 좌수 중에는 판서 출신도 있었고, 고을에 따라 수령이 향관에 밀리는 곳도 허다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는 향원들이 향회에서 좌수를 선출하면 고을 수령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좌수가 부리는 향관은 별감과 풍헌, 약정이 있는데 이들은 총칭하여 鄕丞이라 불었다. 풍헌은 좌수의 지휘아래 고을의 부역, 세금 징수, 산림보호, 농토 등급판단, 소송과 분쟁 조정 및 결정을 담당하기에 백성에게는 수령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령은 임기가 끝나면 바뀌지만 좌수나 풍헌은 지속적이라서 백성은 수령보다 더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아전보다 향관의 부정이 심했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글을 보자
풍헌 , 약정, 별유사(마을의 호적 사무나 잡무를 하는 사람), 방주인(관청의 연락 담당한 하급자)은 문서를 고치거나 붓을 함부로 놀려 부정함이 아전보다 심했다. 무릇 상납물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태반이 녹아 없어지는데, 여름에 납부해야 할 것을 봄에 납부한 것으로 변경하여 손바닥 뒤집듯 하고, 밑돌과 윗돌을 밀어 옮기고 뒤집어 전하며 그 횡령으로 인한 결손이 수만 푼(100푼이 1냥)에 이른다. 이들은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니 큰 좀이나 다를 바 없다. 무릇 시골 사람으로 순박한 자는 풍헌 약정의 직임을 피한다. 그러니 부랑자나 간사스런 자가 아전, 좌수, 별감 등과 체결하여 약정의 직임을 얻는다. 그리고는 생선을 사고 닭을 잡아 권세 있는 아전을 섬긴다. 그들의 횡령이 발각되면 아전, 좌수, 별감은 수령의 측근과 입을 맞춰 “그 고을엔 결손이 많은 것이지 그들이 훔친 것을 아니다”라고 주장하거나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도저히 받아 낼 수 없다 ”라고 한다. 수령은 그 말을 믿고 죄를 저지른 그들에게 매 한 대 치지 않고, 죄 없는 백성은 재징수를 모면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2019.02.15.
조선관청기행
박영규 지음
김여사 발행
첫댓글 조선관청의 직급 직위에 대한
체계를 공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소중한 자룝니다.
보관해두면 언젠가 소용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