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간판 없이, 조명보다 온기가 먼저 스미는 식당들.
서울이라는 큰 도시의 틈새에서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며 소박한 음식을 내는 작은 식당들에는 서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0영 년 전 '식당 골라주는 남자'라는 졸저를 펴낸 적이 있다.
책 서문에 '체중이 엄청나게 불었는데 사나운 식탐, 관대한 식성, 맹렬한 식욕 때문'이라고 적었다.
지천명을 두어 해 넘긴 지금은 먹성이 예전만 못하지만 음식에 대한 애정만큼은 여전히 지극하다.
먹는 것 자체는 즐겁지만 음식을 내는 식당에 들러 그 공간에 얽힌 이야기.
그 공간을 자주 방문하는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을 사실 더 좋아한다.
서울의 소박한 식당이 주는 위로
직업이 여행 작가이니 틈만 나면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
특정 식당 하나만 보고 여정을 꾸릴 떄도 빈번하다.
전국 에 산재한 수많은 식당 가운데 '풀뿌리 식당'을 유난히 좋아한다.
개인적 조어인 풀뿌리 식당이란 우리 고장, 우리 마을, 우리 동네에서 우리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보통은 현지 주민이 드나드는 작고 허름한 식당을 의미한다.
풀뿌리 식당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우선 혼자 또는 부부가 운영하는 협소한 입장이 대부분이라 주인장의 개성이 코앞에소 생생하게 드러난다.
풀뿌리 식당은 매일같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반복된 작업을 수행하는 거룩한 노동의 현장이자 숭고한 루틴의 무대이기도 하다.
긴 시간 자리를 지키며 동네 변천사를 고스란히 목격했으니 향토 박물관이라 부를 만하다.
무엇보다 면면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 식당만의 음식 디테일을 가만가만 들여다 볼 때 그야말로 짜릿짜릿하다.
네게 서울은 '풀뿌리 식당에서 찾는 맛'이다.
이런 풀뿌리 식당을 만나려면 지방 소도시나 어느 한적한 시골에 가야 할 것 같지만, 대한민국의 심장이자 유서 깊은 도시인 서울에도 없을 리 없다.
대로변을 한 꺼풀 벗어나면 그동안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거나 온갖 매체에 소개돼 크게 조명받지는 못했어도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를 고수헤온
아름다운 풀뿌리 식당과 조우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서울의 풀뿌리 식당들은 큰소리 내지 않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울시민의 희로애락을 안아준 살가운 동반자이자,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서울시민의 기본적인 외식 생활을 책임져온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다녀온 중구 신당동의 '청구만두'는 경남 고성군 출신의 남편과 함양군 태생의 아내가 지키고 있다.
상경한 부부가 음식 장사를에 바친 세우러만 40년여에 달한다.
지금도 남편은 세벽 5시에 일너나 15분 거리의 식당으로 직행하고, 아내는 오전 8시쯤 합류한다.
꽈베기와 도넛도 맛볼 수 있지만 청구만두의 간판스타는 역시 만두다.
만두피를 빚고 만두소를 마련하는 모든 공정에 부부의 손길이 더해진다.
김치만두에 들어가는 김치도 직접 담근다.
고기만두와 김치만두 모두 피는 야들야들하고 맛은 담백한 편이다.
자꾸만 손이 간다.
과거에는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던 동네 아귀의 소박한 수제 만둣집 풍경도 점점 없어지는 추세라 더욱 애틋하다.
종루구 창진동의 '삼경원'은 1939년생 어머님이 지휘한다.
여든 중반의 나이에 몸은 강파르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다.
심경우너에서 가장 잘나가는 메뉴는 단연 도니장찌게다.
단골 소재인 두부, 호박, 감자 외에도 오징어가 넉넉히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된장찌게보다 국물이 한 뼘 더 시원하고 감칠맛이 도도하다.
잘게 썬 고추를 넣어 매운맛의 존재감도 확연하다.
조미하지 않은 김에 갓 지은 밥을 올리고 양념간장을 조금 뿌려 먹은 다음 된장찌게로 마무리하면 행복감이 솔솔 피어오른다.
맛보다 진한 건 '이야기'
성북구 삼선동2가에 자리한 '삼태기도너츠'의 운영은 충남 태안군 출신의 아내와 충북 증평군 출신의 남편이 맡고 있다.
반죽하고, 반죽을 숙성시키고, 숙성된 반죽으로 꽈배기와 도넛의 모양을 잡은 것은 아내의 몫이다.
님편은 아내의 '작품'을 받아 기름에 튀기고 설탕에 묻혀 손님에게 판다.
호흡이 척척 들어 맞는다.
내로라하는 베이커리의 페이스트리 못지 않게 결이 예술적으로 찣어지는 찰꽈베기, 반죽의 힘이 기세등등한 찹쌀도넛,
서두르지 않는 단맛이 빛을 발하는 단팥도넛 등 모든 메뉴가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중구 인현동2가의 '성원식품'은 가게에서 술도 팔고 안줏거리도 파는 '기맥집'의 범주에 든다.
하지만 전주에서 시작해 서울까지 불어닥친 가맥집 열풍에 편승해 급조된 가게가 아니다.
요즘 세대의 눈에 신기하게 보이는 옛 모습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가게에서 음식을 팔 뿐이다.
성원식품에는 메뉴판이 따로 없다.
가까운 인현시장에서 그날그날 장을 봐 형편에 맞게 음식을 낸다.
매일 준비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출현하는 안주감들이 있다.
가자미구이와 조기구이는 부지런하게 등판하고, 오징어데침과 소라숙회는 꾸준하게 출석하며, 김치전과 동태전과 두부부침은 빈번하게 등장한다.
라면은 오후 5시까지만 끓여준다.
호박,양파, 달걀 등을 정성껏 넣어 준다.
기본 안주인 양념간장을 끼얹은 마른 멸치도 귀중한 존재다.
나는 서울의 풀뿌리 식당에서 '서울의 소울'을 느낀다.
거기에는 서울에 사는 살마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는 서울의 어느 골목에서 또 어떤 풀뿌리 식당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접하게 될까.
생각만 해도 마음 한 쪽이 따뜻해진다. 노중훈 글
노중훈 : 66개국 500여 개 도시를 여행항 여행 작가이자 MBC 표준 FM<노중훈의 여행의 맛'>을 진행하고 있는 방송인
'풍경의 안쪽', '할매, 밥 됩니까'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