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 「향수」 「호수」 「조약돌」 감상 (brunch.co.kr)
향수 鄕愁 / 정지용 鄭芝溶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랴.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랴.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랴.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조선지광> 65호, 1927. 3>
<출처: 정지용전집, 1.詩. 민음사:1988>
호수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 정지용(충북 옥천/1902~1950)
[출처] 호수/정지용詩|작성자 소통강사 송지열
정지용, '호수'
요약 정지용 시인이 1930년에 발표한 시.
1920년대~1940년대에 활동했던 정지용 시인이 1930년에 발표한 시로 1935년에 발간한 첫 시집 <정지용 시집>에 실려 있다. 감정과 언어의 절제가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간결한 시어를 통해서 간절한 그리움을 절제 있게 보여 준다. 얼굴/마음, 손바닥/호수가 완전한 대칭을 이루면서 ‘얼굴을 가리우다’, ‘눈을 감다’라는 서술어가 현실 세계에 대한 철저한 차단과 단절을 의미한다. 그 대신 눈을 감는다는 것은 내면세계의 입구로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사물의 시간으로 내려가는 것이며, 그 시간은 몽상의 현실을 소화하는 시간이다. 눈을 감음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내면성의 세계가 이 시의 중심 공간이다.
조약돌 / 정지용
조약돌 도글 도글……
그는 나의 魂의 조각 이러뇨.
알는 피에로의 설음과
첫길에 고달픈
靑제비의 푸념 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즉 붉어 오르는
피에 맺혀,
비날리는 異國거리를
嘆息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 도글……
그는 나의 魂의 조각 이러뇨.
조약돌/정지용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옥천구읍은 누가 뭐래도 ‘향수’로 대표되는 정지용의 고향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실개천 옆에 초가로 복원한 정지용 생가가 있다. 당시 한약방이었던 생가는 실개천(지금은 석축으로 말끔하게 정비해 ‘실개천’이 주는 정감을 느끼기 어렵다)의 범람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바로 옆은 정지용문학관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전시장 입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 정지용이 벤치에 앉아 있다. 관람객이 기념사진을 찍는 일종의 포토존이다. 1929년 스물일곱 나이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한복 입은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민족 말살에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였음을 감안하면 교사 신분으로 쉽지 않은 차림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옥천구읍을 관통하는 실개천 옆에 정지용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정지용문학관 로비에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 정지용 인형이 앉아 있다. 관람객의 포토존이다.?
정지용문학관 내부는 그의 대표작 '향수' 전시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서정성 짙은 사진과 시어로 꾸며 놓았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 이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불온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월북 시인이라는 누명으로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연구자들조차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정○○’ ‘정X용’으로 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옥천구읍에 그의 문학관이 들어서고 생가가 복원된 것도 뒤늦게나마 자진 월북이 아니라 납북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 당국에 의해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됐다가 평양의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또는 그 직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수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48년 짧은 생은 고난과 우여곡절로 얼룩졌지만 그의 작품은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시어로 남아 있다. 전시관은 그의 대표작 ‘향수’에 대한 헌정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사진과 함께 전시된 시어 하나하나가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구읍 뒤편 교동저수지 주변은 ‘지용문학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정지용과 비슷한 정서를 표현한 여러 시인의 작품을 시비에 새겨 놓았고, 저수지 물위에도 그의 작품을 눈으로 보듯이 재현해 놓았다.
옥천구읍 뒤편 교동저수지 주변은 '지용문학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그의 시를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옥천구읍은 누가 뭐래도 정지용의 고향이다. 담배 가게 처마에도 그의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옥천구읍의 정지용 생가 주변 골목은 온통 그의 시 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정육점 외벽에도 정지용의 시가 적혀 있다. '얼룩백이 황소'가 이렇게 소비될 줄이야.?
구읍의 골목과 상가에도 정지용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향수미용실’ 옆 고깃집에는 ‘얼룩백이 황소’ 그림이 손님을 부르고, 담배 가게 처마 밑도 그의 또 다른 작품 ‘오월소식’이 까치 그림과 함께 장식하고 있다. 담장과 골목마다 바다, 바람, 별똥, 춘설, 조약돌, 피리 등 서정 깊은 시어로 가득 찼으니 시인이 있는 마을은 얼마나 풍성한가.
도란도란 옛이야기 나누며 걷기 좋은 ‘향수호수길’
실제는 가난으로 힘들었을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고향은 아름다움으로 추억된다. 집안이 어려워 16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던 정지용에게도 옥천구읍은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할, 한없이 푸근한 곳이었다.
옥천에는 그의 대표 시 ‘향수’에 나오는 것처럼 넓은 벌이 없다. 실개천도 예전 같지 않고, 얼룩빼기 황소는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성근 별이 박힌 하늘과 함초롬 이슬을 머금은 풀섶은 가까이 있다. 옥천구읍에서 동편으로 낮은 언덕을 넘으면 드넓은 금강 물줄기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대청호 상류이니 호수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 물길 옆 산자락으로 ‘향수호수길’이 조성돼 있다. 도란도란 옛이야기 나누며 걷기 좋은 길이다.